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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도로에서 지진의 흔적을 봤다. 금이 쩍 가고 주변이 울퉁불퉁 일그러진 모습. 아스팔트며 시멘트, 금속 같은 건 지구 껍데기의 일렁임 한번에 언제라도 부서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부림지구 벙커X>는 대지진이 일어나 완전히 부서져버린 부림지구라는 동네와 벙커를 떠나지 않는 이재민 이야기다.
숲속 철근 덩어리로 감춰진 벙커 속에는 지진 생존자 10명이 산다. 짐작건대 행정 당국에선 부림지구 지진 생존자들이 오염된 상태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래서 이들은 몸에 생체칩을 이식해서 당국의 감시를 받거나, 아니면 축축하고 답답한 벙커에 숨어있다 가끔 거리로 나가 생필품을 구해 사는 수밖에 없다. 벙커에는 배우가 되고 싶다며 느닷없이 연기를 펼치곤 하는 청소년 혜나도 있고, 프랑스산 홍차와 쿠키를 그리워하는 우아한 노인 부부도 있고, 생활력이 강해 라면을 구해오고 자가전력기를 만드는 대장도 있다. 이들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벙커의 일상을 함께하는 한편,
씨네21 추천도서 <부림지구 벙커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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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며 지역이 봉쇄되는 일이 더이상 낯설지 않은 지금,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고전소설 목록에서 내려와 지금 이 시대를 말하는 소설이 된다. 194X년 알제리 해안에 있는 작은 도시 오랑에 중세를 뒤흔든 페스트가 돌아온다. 죽은 쥐 시체가 길바닥에 널리더니 이내 사람들이 피고름을 쏟아내고 구토와 고열에 시달리다 죽어간다.
“사실 재앙은 모두가 다 겪는 것인데도, 그것이 자기에게 닥치면 여간해서는 믿지 못하게 된다.” <페스트>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일상 자체가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는 세상의 풍경이 숨 막히도록 진득하게 펼쳐진다. 도시 전체가 격리되자 시민들은 마치 유배 생활을 하는 양 현재를 잃고 과거만을 반복적으로 회상하며 고독을 느낀다. 호텔은 텅텅 비고, 필름을 외부에서 받지 못하는 영화관은 같은 영화만 계속 틀어준다. 사람들은 출근을 할 때면 서로 등을 돌리고, 식당에 가면 식기를 꼼꼼히 소독하며, 여름이 와도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감정이 메말라 마
씨네21 추천도서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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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착실히 오는 중인데, 도무지 집 밖의 따뜻함을 즐기기 어려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실내 생활자들을 위해 책 5종을 소개한다. 말이 5종이지 총 11권에 달하는 책의 목록은, 요즘의 세상사를 떠올리게 하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로 시작해, 리커버로 다시 선보이는 을유세계문학전집 소설 5권, 한국을 대표하는 SF 작가 배명훈의 연작소설집 <타워>와 에세이집 <SF 작가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세상의 봄>과 소설가 강영숙의 <부림지구 벙커X>다. 봄이 찾아온 창문을 열고,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3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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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유명한 여성으로 죽었다 자신의 상처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상처가 자신의 힘과 똑같은 근원으로부터 왔음을/ 부인하면서.” 에이드리언 리치가 1974년 발표한 시 <힘>의 마지막 행이다. 이 시는 마리 퀴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또한 여성의 삶이 처한 문제를 뜻하는 것으로 읽힌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집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은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발표된 시를 묶은 것으로, 여성이라는 “생존자들”을 호명하는 작업이다. “나는 살면서 삶 이상을 원하며/ 굶주리는 다른 사람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나의 의지, 나의 사랑 속으로,/ 정신의 폭력주의자들의 십자 포화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딸과 자매들, 연인들의 뇌 속으로, 뚫고 들어온 헐벗음에/ 이름 지어 주고 싶다.”(<굶주림(오드리 로드에게)>) 아주 오랫동안,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는 페미니즘 그 자체로 이야기되고 있다.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은 특정 작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공통 언어를 향한 꿈>, 생존자 여성에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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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도 살인하는 공상을 한다. 연구자들은 살인에 대한 공상을 ‘살인관념’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정상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남성 중 79%, 여성 중 58%가 살인 공상을 해본 적이 있는데, “남성은 잘 모르는 사람이나 같이 일하는 사람을 죽이는 상상을 많이 한 반면 여성은 가족을 죽이는 상상을 더 많이 했다”. 살인 공상은 추상적 사고와 가상의 계획이 가능한 인간의 능력이 만든 부산물로, 머릿속 예행연습을 통해 실제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거나 그로 인해 일어날 결과를 원치 않음을 알게 되는 사고실험이며, 결국은 살인을 막는 효과를 갖는다.
심리학자로 특히 범죄심리에 대한 연구를 해온 줄리아 쇼는 <우리 안의 악마>라는 책에서,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다룬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뿐 누구나 생각해보았을 법한 끔찍한 공상이 있었을 것이다. 분노에 휩싸여 상상했던 어떤 장면들, 혹은 이룰 생각을 하지 못했던 성적 판타지. 남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우리 안의 악마>, 악을 말할 때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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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가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게 문제입니다.” 어도비의 커뮤니티 부문 부사장이자 핀터레스트, 우버 등 여러 기업의 투자자이자 자문가라는 스콧 벨스키의 한결같은 주문이라고 한다. 아이디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과 달리, 나 역시 이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아이디어는 실현 불가능하다면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직면하면 환경 탓을 하기 시작한다. 회의만 많고 발전이 없는 조직의 모든 구성원은 이런 ‘남 탓’에 능하다. 댄 애리얼리, 그레첸 루빈, 세스 고딘을 비롯한 베스트셀러 저자들의 글을 모은 <루틴의 힘>은 환경에 매달리기를 그만두고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방법론으로서의 루틴을 손보자는 제안을 담았다. 생각하며 일하지 않으면 일하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많은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하는 자기 계발의 논리이기는 하지만,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루틴의 힘>, 시간이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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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룬다티 로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사회운동가라는 맥락에서 언급되었다.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고, <아룬다티 로이,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는 인도의 정치 상황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 1997년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아룬다티 로이는 소설가이면서 르포르타주를 쓰는 논픽션 작가였고, 사회운동가였다. 2014년 <타임>에서 아룬다티 로이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한 일은 놀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2017년에 새로운 소설을 발표했다. 제목은 <지복의 성자>. 도입부는,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을 사랑하게 된 이유인 동물과 식물이 가득한 공간에 우리를 부려놓는다. “그녀는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았다. 새벽이면 까마귀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박쥐들을 맞이했다. 해질녘엔 반대로 했다. 새벽과 저녁 사이엔 그녀의 높은 가지들에 흐릿한 형태
씨네21 추천도서 <지복의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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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사람의 소지품을 형사들이 살핀다. 세탁소 영수증, 회중시계, 다양한 동전으로 총 75센트가 있다. 희생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고, 지문 감식으로 신원을 확인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형사들은 회중시계를 보며 나이가 많은 사람일지 모르겠다고 추론한다. 시계를 열어보자 이상한 점이 있다. “3시14분에 멈춰 있는데? 사고 시각이 아니잖아.”사건 현장에 불려나온 샘은 궁금해하던 것을 시체 주머니에 있던 노트에서 알아낸다. “안녕하신가, 친구여. 나는 도둑이자 살인자이자 납치범이라네”로 시작하는 일종의 기나긴 편지. 시체의 정체는 연쇄살인마였다.
<네 번째 원숭이>는 ‘네 마리 원숭이 킬러’(줄여서 4MK)라고 불리는 연쇄살인범의 편지와 그를 5년간 추적해온 시카고 경찰국의 4MK전담반 형사 샘 포터를 비롯한 수사진의 상황을 번갈아 보여준다. 연쇄살인마 4MK는 희생자의 귀, 눈, 혀를 적출해 가족에게 보내며 마지막에는 시체를 공공장소에 전시한다.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한
씨네21 추천도서 <네 번째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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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간으로부터, 시간으로부터 떠나온다는 것은 많은 경우 그곳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이다. 그렇게 장소와 주변의 사람이 바뀌면 ‘나’라는 존재도 바뀐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니까, 가끔 스스로의 변화를 잘 모른다. 그러다 그 장소, 그 사람을 만나면서 시간을 되돌리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금희의 <천진 시절>은 그런 소설이다. 주인공 이름은 상아다. 상아라는 이름은 중국 신화에서 온 이름이다. 상아는 명사수 후예의 아내로, 혼자 불사약을 먹고 남편을 떠나 영생을 얻었다. <천진 시절> 속 상아는 운명적 사랑의 주인공이 아니고, 불사약 같은 것은 얻지도 못한다. 상아는 그저 집에서, 고향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기 위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무군을 따라나선다. 부모님은 상아를 그냥 남자와 떠나게 두지 못해 약혼을 시키고, 약혼자와 함께 타지인 천진에 도착하니 일자리를 소개해준 무군의 누나는 둘을 위해 침대 하나짜리 방을 얻어놓았다.
씨네21 추천도서 <천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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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여름 냄새가 난다. 솜털이 날리는 덥고 건조한 시골의 여름, 건초 더미, 차갑고 묵직한 야외 수영장, 햇볕에 탄 피부의 감촉. 주인공 캐머런은 수영선수로 활동하는 10대 청소년으로, 몬태나에서 친구와 애인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레즈비언 정체성을 찾아간다. <이방인>처럼, <사라지지 않는 여름> 또한 부모님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친구 아이린과 캐머런이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인생 첫 키스를 나누며 짜릿한 순간을 보낸 그때, 부모님이 매해 찾아가던 퀘이커 호수에 갔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캐머런은 부모님의 죽음을 전해 들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들키지 않겠다고 안심하고 그런 자신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이 죄책감은 매 순간 캐머런을 따라다닌다.
사랑과 우정, 이별과 불안과 슬픔이 떠돌며 하나의 밧줄로 얽힌 여름의 시간은, 사랑했던 친구의 배신 혹은 고발로 인해 끝난다. 이 단절을 보며 레드클리프 홀의 퀴어 고전소설 <고독의 우
씨네21 추천도서 <사라지지 않는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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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스페인 세비야 지방까지는 비행기로 스무 시간 남짓 걸린다. 하지만 여성이라면, 도시가 아닌 곳에서 태어났다면, 이렇게도 비슷할까 싶어 답답하고도 반가우리라.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는 어려서부터 시골 마을 공동체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에 거부감을 느꼈고 뚱뚱한 외모를 가지고 놀려대는 남자아이들에게 분노했으며 자유로운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절박하게 주문을 외웠다. 좁은 현실을 확장시켜준 존재는 <작은 아씨들>의 조 마치, <삐삐 롱스타킹> 시리즈의 삐삐 같은 여성 캐릭터들이다. 홀로 책에 빠져 지낼 땐 은둔하면서도 자유로웠던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하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으며 저임금 노동과 가사노동 및 육아에 매인 주변 어른 여성들을 고찰했다.
장학금이라는 탈출버튼을 눌러 독일로 떠난 시절에는, 25살에 세계 일주를 해낸 여성 넬리 블라이를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갖가지 국적의 좌절한 학생들이 뛰어내려서 ‘자살자들의 기
씨네21 추천도서 <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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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바람이 흙먼지를 뿌리며 슬레이트 지붕을 엎는 골목. 가난의 풍경을 짊어지고 미래로 가겠다고 다짐하는 여자. 인터넷에서도 소문난 단편 <도둑맞은 가난>은 부자가 제 이력서에 가난 체험까지 집어넣겠다며 한칸 방 살기를 했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들이 가난에 진저리치다 죽어버린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젊은 여성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여름 아침의 억센 푸성귀’처럼 힘차고 청정한 구석을 발견하고서 가난을 소명 삼아 살기로 다짐했는데, 누군가는 그 가난을 한번 겪고 말 경험으로 치부하니 의미를 빼앗겨버려 치욕을 느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치욕 속에 분노하는 순간마저도 너무나 생생하게 활기를 뿜어내 매혹적이다. 미군기지에서 물건을 능숙하게 빼내 팔던 <공항에서 만난 사람>의 무대소 아줌마도 그렇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는 단번에 읽어내릴 만큼 재미있지만 독자를 쥐고 흔드는 힘이 워낙 강해 책을 덮고 쉬고 싶기도 한 박완서 작가의 단
씨네21 추천도서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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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다. <씨네21>이 2월에 추천하는 책은 하나같이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며 문제적이다. 과거에 알던 사람과 연락이 닿으며 한 시절의 기억을 통째로 소환하는 금희 작가의 소설 <천진 시절>이 보여주는 회고의 시간. 데뷔작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뒤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힘써온 아룬다티 로이의 오랜만의 신작 <지복의 성자>도 소개한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마크 웹 감독 연출로 드라마화가 결정된 J. D. 바커의 스릴러 소설 <네 번째 원숭이>. 시대가 흘러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읽히는 작가 박완서 중단편집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때로 유쾌하고 즐겁지만 여성의 삶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의 에세이 <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는 놓치기 아깝다. 에밀리 M. 댄포스의 <사라지지 않는 여름>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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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간 할리우드영화들은 최소한 한국영화보다는 다양성 측면에서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고들 한다. <겨울왕국>이 처음 개봉했던 때, 어린 소녀들이 공주 대신 왕이 되고 싶어 한다고, 그래서 ‘대관식’ 이벤트를 부모에게 요구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엘사는 파괴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자신의 능력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고, 두 자매는 그렇게 남자를 얻는 대신 세상을 얻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엘사는 왕이 된다 해도 허리를 조인 드레스를 입고 메이크업을 한 모습이었다. 외양으로는 공주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새로운 엘사를 보여주는 방법은 어땠어야 하는가. “강한 얼굴 표정을 사용하든지 그런 표정과 아울러 다른 옷을 입게 하든지, 성적 매력과 무관한 변신 장면을 보여주든지 했어야 했다.” 현재의 상황은 페미니즘의 승리가 아니라, 혹시, <대중문화는 어떻게 여성을 만들어내는가>에서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를 인용해 말하는 것처럼 “반페미니스트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대중문화는 어떻게 여성을 만들어내는가>, 21세기식 백래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