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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인 디 에어>의 오프닝 시퀀스는 항공 촬영한 부감숏의 나열을 통해 조형적 관점에서 대도시의 전경을 실로 아름답게 구성한다. 하지만 평화롭기까지 한 이 지상 풍경에 망원경이 아닌 현미경을 들이대는 순간, 영화는 울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허망해하는 실직자들의 얼굴을 카메라 바로 앞까지 바싹 당겨온다. 금융위기 이후 밀어닥친 경기침체의 시대상과 불안을 예리하게 파고든 이 영화가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동시대를 공유하는 이러한 시대감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 디 에어>에는 단순한 물리적 거리를 포함하여, 카메라의 원경과 근경, 다큐멘터리적 기법과 기발한 허구의 경계, 대량해고 시대의 해고전문가라는 아이러니와 그것을 가로지르는 인간성처럼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일종의 ‘거리감’에 관한 역전과 균열이 엿보인다. 영화 제목 그대로 ‘공중에서’, 혹은 ‘결정되지 않은’ 삶을 사는 라이언
[영화읽기] 그 남자, 실로 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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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손가락은 한 나라의 수도이고 다른 손가락들은 지방이다.-러셀 셔먼
암브로즈 비어스에 의하면 피아노 연주란 건반과 관객의 영혼을 동시에 누름으로써 소리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뉴욕 태생의 피아노 연주가이며 부소니와 쇤베르크의 제자로서 오늘날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음악 에세이 중 하나라고 불리는 저서 <피아노 이야기>를 남긴 러셀 셔먼은 훌륭한 피아노 연주란 광활한 영역에서 태어난 소리가 미지의 곳으로 소멸되어가는 하나의 소화 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수면 중에도 그 소화 과정은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셔먼은 피아니스트의 엄지를 두고 짐승으로 태어나 귀족이 되는 손가락이라고 명명한다.
피아노 독주를 예매하려고 할 때마다 좌석표를 보고 신중을 기한다. 피아니스트들의 손가락이 잘 보이는 좌석을 예매하는 습관이 시작된 것은 그의 손가락 예찬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 손가락들이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에 초대받기 위해서는 피아니스트의 얼굴보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보이는 좌석쪽이
[김경주의 섬세함을 옹호하다] 피아니스트들의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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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구혜선의 첫 장편 연출작 <요술>이 상반기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영화 <요술>은 젊은 음악가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음악 영화로 서현진, 김정욱, 임지규 등이 출연한다. 지난 1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 한달 반동안의 빡빡한 촬영 일정을 마친 후 현재 후반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요술>은 구혜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첫 장편 영화로 그 동안 <유쾌한 도우미>등의 단편 영화를 작업하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워온 구혜선이 상업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 작품이다. 구혜선의 소속사 YG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비 전액을 지원하기로 해 화제가 되었고, 배급은 CJ 엔터테인먼트가 맡았다.
한편 구혜선은 이사오 사사키와 함께 본인의 자작곡을 담은 소품집을 발표하고, 「탱고」라는 소설을 발표한 데 이어 동명으로 일러스트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첫 영화를 연출한 뒤로는 시상식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 드
구혜선 연출작 <요술>상반기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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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북디자인>은 1935년부터 2005년까지 출간된 펭귄 책 표지 디자인의 역사를 담았다. 한권의 책에 도판 500개. 현대 출판물의 역사를 아우르는 의미로도 부족함이 없는 저작이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펭귄 클래식’으로 가장 익숙한 출판사로 현대적이고 대담했던 초기 문고본 디자인부터 두루 눈에 익은 책들이 등장하지만 내용 면에서 낯선 시리즈도 있다. ‘펭귄 스페셜’이라고 불리는 TV 시사프로그램에 어울릴 법한 폭로적 저널리즘 시리즈가 대표적. ‘펭귄 스페셜’은 전운에 휩싸인 유럽의 분위기를 반영한, 신문과 잡지보다 깊은 읽을거리를 보급판으로 선보인 것이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상식>(1940),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중국>(1939), <왜 영국은 전쟁에 뛰어들었는가>(1939), <전쟁의 새로운 방법>(1940)과 같은 책들이 공격적인 수평선과 강렬한 타이포그래피의 표지로 선보였다. 이 시리즈는 1960년대 들어 각종
[도서] 책덕후 최후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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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소설 속 젊은이들더러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지 마, 라고 말한다면 꼰대 소리를 들을까? 어쩔 수 없다. 책을 보는 내내 한숨이 나왔단 말이다. 이 반짝이는 청춘들이 왜 그토록 밋밋하게 사는가. 주인공 ‘나’, 성실하게 편의점 알바 뛰는 모습이 예쁘기만 하다. 또 ‘나’의 지인들, 평균 이상으로 멋지다. 동료 J는 마르고 키가 크고 피부가 희어 뮤지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청년으로, 특별히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어 몇년간 알바를 하며 자유로이 살아왔단다. 또 J가 짝사랑하는 카페 알바, 별칭 물고기는 흉터를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길고양이와 낡은 책을 좋아하며 거리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을 줄 아는 아가씨다. 패션잡지 빈티지 의상 모델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콤플렉스 없이 어여쁜 청춘, 상큼하다. 늘어지지 않는 산뜻한 문장들도 한몫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 단체로 무기력증에 빠진 모양이다. 꿈도 없고 야심도 없다. 사회질서에 편입되기 싫어하건만 바깥으로 탈주하고픈
[한국 소설 품는 밤] 이 상큼한 무기력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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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개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데 시범경기가 치러지는 야구경기장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 야구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딱 알맞은 때 <야구생활> 1호가 발간되었다. 각 팬덤을 대표하는 ‘야구생활자’들이 모여 만든 이 책은 잡지를 지향하는, 일단은 1호가 발간된 책인데, 시시각각 뜨거워지는 야구 팬덤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2009년을 결산하고 2010년을 내다보는 의미의 팀별 에세이들이 실려 있어, 감격적이었던 추억이나 울컥 속상했던 순간을 정리하게 해준다. <프로야구 카툰>을 연재하는 최훈과의 긴 인터뷰도 실렀다. MBC ESPN 박상언 PD와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을 쓴 김은식, <리더 김성근의 9회말 리더십>을 쓴 ‘이데일리’ 정철우 기자 등이 필진으로 힘을 보탰다. 한참 야구열기가 뜨겁던 80~90년대와 참 많이 달라진 팬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망한’
[도서] 야구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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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혹은 나뭇잎 한장. 장편소설(掌篇小說)이나 엽편소설(葉片小說)이라고 불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콩트 모음집이다. 작은 판형에 290여쪽, 그런데 68편이나 실려 있는 건 그래서다. 이야기 하나가 두세 페이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설국>으로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도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이다. 그가 젊은 날에 (이십대였던 1921년부터 1935년 사이) 쓴 이야기들이라 <설국>과 <잠자는 미녀> 같은 작품들에 이르는 단초가 되는 ‘발상’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롭다. 여자의 몸, 어린 여자의 몸, 생명, 삶, 죽음, 희생을 비롯한 죽음과 맞닿는 탐미주의적인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이야기도 있고, 예상외로 쿨한 연애담도 있고, 환상담도 꽤 있다.
이야기 내용 자체에 집중해 호불호를 가르는 일도 의미있겠으나, 그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있다. “많은 작가들이 젊은 시절에 시를 쓰지만, 나는 시 대
[도서] 거장의 젊은 손바닥에서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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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충전 지수 ★★★★★
셸 위 댄스 지수 ★★★★★
관능적이고 격정적인 댄스가 온다. 1999년 초연 이후 브로드웨이 등 세계 무대를 땀으로 흠뻑 적셔온 공연이다. 오는 4월2일부터 7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브로드웨이 오리지널팀이 선보이는 <번 더 플로어>는 제목처럼 무대를 불태워버릴 듯 현란하고 화려한 춤을 파노라마처럼 펼친다. 차차, 비엔나왈츠, 폭스트롯, 스윙, 린디, 자이브, 삼바, 룸바, 왈츠, 퀵스텝, 살사, 탱고, 파소도블레. 이 13가지의 춤을 각종 댄스대회를 석권한 세계 최고의 무용수들이 2시간 동안 흔든다.
그런데 춤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춤과 음악의 역사는 늘 함께였다. 미그 에이사와 레베카 타피아, 두 보컬이 볼룸 비트로부터 재즈나 라틴팝 로콘롤 R&B 팝에 이르기까지 25곡의 노래를 영어나 스페인어 등을 오가며 라이브로 들려준다. 25개의 곡은 1900년대 초부터 2000년대까지 세기를 거슬러 오른다. 마치 20세기와 21세기를 합
[공연] 더이상의 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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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링크에 아는 사람 없어?” 개막전 티켓을 구하지 못한 선배(기아팬)가 혹시 있을지 모를 요행을 얻으려고 분주하다. 시범경기에서 롯데자이언츠가 연승을 거둘 때마다 롯데 팬들은 불안해진다. 올해도 시범경기만 1등 하는 거 아닐까 하고. 아직 봄기운이 완연하지는 않지만 야구 시즌은 벌써 시작되었다. 그리고 2주 동안 부산에 출장간다던 블루엔젤스의 에이스 투수 오찬호가 무려 1년6개월 만에 돌아왔다. 장이의 <퍼펙트 게임 시즌2>가 시작된 것이다.
<퍼펙트 게임>은 생선가게 주인, 수제비집 사장, 빵집 사장 등 시장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인 야구를 소재로 삼은 웹툰이다. 아리랑볼 투수, 알까기 전문 유격수가 활약하는 이들의 야구는 생각보다 재밌다. 시즌2는 시즌1의 스토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2부리그 1위팀 블루엔젤스와 1부리그 1위팀 DM자이언츠의 라이벌 관계는 여전하다. 리그에서는 슈퍼서머야구대회가 개최되었다.
시즌1이 끝나고 시즌2가 시작되기까지
[스크롤잇] 플레이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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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자이그너는 (최근 30여년 전 성추행 사건으로 체포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부인이자 배우다. 영화광들이라면 폴란스키의 <비터문>에서 온몸으로 색정을 발산하던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다. 1985년 장 뤽 고다르의 <탐정>(Detective)으로 데뷔한 그녀는 솔직히, 연기력이 좀 엉망이긴 하다. 최근작인 다리오 아르젠토의 <지알로>에서 그녀의 연기는 정말로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다만 그녀의 가냘프고 새된 목소리는 참 묘한 데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 불어 음반인 ≪Dingue(Crazy)≫를 내놨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인 버킨의 후예’. 가창력이 아니라 프랑스적인 섹시함을 떨리는 목소리에 실어서 듣는 이를 유혹한다(특히 자신의 이름을 딴 <Emmanuelle>은 딱 제인 버킨 희대의 히트곡 <Yesterday Yes A Day>다!). 로만 폴란스키가 직접 피처링에 참여했다. 이
[음반] 떨리는 목소리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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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즈는 일종의 농담이었다. 블러의 데이먼 알반과 카투니스트 제이미 휴렛이 만들어낸 이 가상밴드는 데이먼 알반의 다소 괴상한 사이드 프로젝트이면서도 완전히 독립적인 밴드처럼 보였다. 중요한 건 어쨌든 이 농담 같은 밴드가 팝과 하위문화, 테크놀로지와 장르적 하이브리드에 한획을 그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5년 만의 앨범 <<Plastic Beach>>는 가상현실 속 밴드를 위한 일종의 사운드트랙이다.
고릴라즈의 리더(이자 깡패)인 머독이 빚더미에 깔렸다는 설정에서 출발해 구글어스에도 나오지 않는 쓰레기 섬 ‘플라스틱 비치’ 지하실에 2D를 감금해 녹음했다고 주장하는 이 앨범은 나른함과 신비함, 멜랑콜리함과 위기감이 공존하는 사운드로 가득하다. 루 리드, 스눕 독, 드 라 솔, 그리고 클래시의 믹 존스와 폴 시모논 등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트랙 중에서 <Stylo>의 뮤직비디오가 먼저 공개되었는데 여기선 브루스 윌리스가 출연해 고릴라즈의 3D 멤버들과
[음반] 점점 발전하는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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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하면 생각나는 아티스트들을 떠올려보자. 데미언 허스트, 줄리언 오피, 트레이시 에민. 모두 짓궂거나 위트있거나 도발적인 예술가들이다. 팝적인 감수성으로 똘똘 뭉친 이들 영국 화단을 보고 있자면, 가끔 제인 오스틴과 영국식 정원의 미덕은 어디로 가버렸나 하는 의문이 든다. 현대와 고전을 잇는 연결고리가 없는 느낌이랄까.
대런 아몬드는 최첨단 미술의 홍수 속에서 영국의 고전적인 미덕을 꿋꿋이 지켜오고 있는 아티스트다. 은근하고 고요하고, 기품있는 그의 작품은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닮았다. 여백의 미를 살린다는 점에서 동양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2005년 <If I Had You>로 영국의 권위있는 미술상인 터너 프라이즈 후보에 오른 대런 아몬드는 확실히 도발과 파격으로 점철된 영국 화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첫 한국 개인전인 이번 행사에서는 사진과 영상, 설치 등 30여점의 작품이 소개된다.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사
[전시] 19세기 낭만주의를 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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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먼트> The Informant!
2009년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상영시간 108분
화면포맷 1.85:1 아나모픽 음성포맷 DD 5.1 영어
자막 한글, 영어 출시사 워너브러더스
화질 ★★★★ 음질 ★★★★ 부록 ★☆
스티븐 소더버그 영화의 지형도를 그리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근래 사기꾼들의 모험담, 흑백 전쟁드라마, 후기 자본주의사회 변방의 비극, 실존 혁명가의 기록 사이를 숨가쁘게 오갔던 그는 2009년 한해에만 두편의 영화 <인포먼트> <애인 경력>을 내놓았고, 다른 두 영화의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대기업의 내부고발자에 관한 코미디인 <인포먼트>와 다큐멘터리 형식의 고급 콜걸 이야기인 <애인 경력>은 얼핏 아주 다른 영화처럼 보이지만, 자본주의사회를 이죽거리고 익숙한 장르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소더버그 스타일의 영화다. 그뿐인가. 두 영화의 ‘위대한 위선자’가 다른 인물들을 배반할 동
[dvd] 소더버그와 맷 데이먼의 경쾌한 지적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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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할리우드 연기파 배우의 목록을 짜면 앞줄에서 빠질 수 없는 더스틴 호프먼, 메릴 스트립을 세트로 볼 수 있는 영화다. 개봉 당시 한국인의 정서로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로 사회적 반향까지 불러일으켰다. 물론 개봉 시점의 미국에서는 붕괴되는 가정, 여성의 권리 같은 예민하고도 보편적인 문제를 다뤄 큰 사회적 격론에 부쳐지기도 했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테드(더스틴 호프먼)는 워커홀릭으로 가정에 소홀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 조안나(메릴 스트립)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겠노라 하며 독립한다. 갑자기 아들 빌리를 떠맡고 살림을 하게 된 테드는 황당할 뿐이다. 테드의 일상은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결국 회사까지 쫓겨나지만, 빌리를 기르는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조안나가 나타나 빌리를 달라고 하고, 재판까지 간 끝에 테드는 빌리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만다.
테드가 막 빌리를 떠맡아 엉터리 살림을 꾸리는 장면은 혼란의 연속이다. 빌리는 아
[그 요리] 프렌치토스트도 못 굽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