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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양산을 쓰고 다니는 내성적인 대학생 토오루(하기와라 리쿠). 야마네(구로사키 고다이)와 목욕탕 아르바이트를 함께하는 삿짱(이토 아오이)과만 어울려 다니는 그에게 큰 변화가 생긴다. 어느 날 매일 식당에서 혼자 메밀국수를 먹는 사쿠라다(가와이 유미)를 만난 것이다. 둘의 사이가 발전할 즈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오늘 하늘이 가장 좋아,라고 아직 말할 수 없는 나는>은 <제멋대로 떨고 있어>로 주목받은 오오쿠 아키코 감독의 신작이다. 후쿠토쿠 슈스케의 동명 원작을 각색했으며 일본의 청춘스타 가와이 유미가 주연을 맡았다. 일본 청춘 멜로의 컨벤션을 따르면서도 외톨이의 심리를 잘 그리는 감독의 개성이 깃들어 있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독개성이 깃들어 있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독특한 캐릭터와 화면비 조정, 점프컷 등 발칙한 연출로 그려내는 시선이 인상적이다. 제37회 도쿄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리뷰] 외톨이에게 선물하는 어둠의 <비포 선라이즈>, <오늘 하늘이 가장 좋아, 라고 아직 말할 수 없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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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인플루언서 미 띠엔(프옹 미 치)은 새로운 콘텐츠를 찾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다. 오랜만에 찾은 본가에서 그녀를 맞이한 이는 12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오빠 지아 민(후인 럽)의 영혼이다. 두 남매는 가문의 전통이 깃든 집을 지키려 하지만, 유산을 노리는 고모가 무당을 불러 퇴마를 시도하면서 예상치 못한 소동이 벌어진다. 호러 코미디 <조상님이 보고계셔>는 명절 영화 특유의 풍성한 볼거리와 빠른 전개를 앞세워 베트남 역대 흥행 7위에 오른 작품이다. 지긋지긋한 어른들 잔소리에 정면으로 맞서는 주인공의 태도는 통쾌하지만, 전형적인 가족 서사로 회귀하는 결말은 아쉬움을 남긴다. 400만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한 코미디 유튜버 후인 럽이 연출과 주연을 겸했다.
[리뷰] 타국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명절 한상’의 맛, <조상님이 보고계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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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속초의 게스트 하우스. 이곳을 살뜰히 돌보는 건 20대 매니저 수하(벨라 킴)다. 어떤 손님에게도 태연하던 그가 프랑스인 숙박객 케랑(로쉬디 젬) 앞에서는 감정이 격랑한다. 추운 계절에 더없이 어울리는 영화가 찾아왔다. <속초에서의 겨울>은 쌓인 눈과 두툼한 코트, 시린 입김과 뜨거운 주전자의 열기까지 시청각적으로 겨울의 감각을 오롯이 끌어올린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수하가 케랑을 탐색하며 자기 뿌리를 더듬어가는 과정은 천천히 내리는 눈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아 오래 남는다. 프랑스계 일본인 감독 가무라 고야를 비롯해 촬영과 음악 등 다국적 스태프가 참여해 이국적 분위기도 물씬 풍긴다. <기생충>이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바 있는 프랑스 세자르영화제에서 벨라 킴이 한국인 최초로 신인여배우상 후보에 오른 소식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더한다.
[리뷰] 주전자의 열기와 눈의 차가움 사이에서 기원을 응시하다, <속초에서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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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경찰의 발포로 제주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도민들의 저항과 함께 1948년,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난다. 무장대를 진압하려는 토벌대가 들어서면서 제주에 살던 아진(김향기)과 딸 해생(김민채)은 산으로 피신한다. 그 과정에서 아진은 해생과 생이별을 하고, 두 사람은 토벌대를 피해 서로를 찾아 헤매며 생존을 도모한다. 산으로 도피했던 도민들이 항복을 고심하고, 토벌대 내에서도 사살에 죄책감을 느끼는 군인이 생겨난다. <그녀의 취미생활>을 연출한 하명미 감독의 신작으로, 한 모녀를 중심으로 제주 4·3사건을 되짚는다. 무장대와 토벌대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인물들을 배치하는 대신 이념 논리로 인해 희생되어야만 했던 이들의 입장을 다각도로 살피고, 4·3사건과 피해자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의를 밝힌다. 모든 대사에 제주 방언을 적극 활용했으며 젊은 부모 역을 처음 맡은 김향기의 감정연기가 돋보인다.
[리뷰] 4·3사건과 희생자들의 용기를 기리며, <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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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포 굿>은 뮤지컬 <위키드>의 2막을 다룬다. 엘파바(신시아 이리보)는 마담 모리블(양자경)의 언론 장악으로 ‘사악한 초록 마녀’라 호도되고,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는 마법사(제프 골드블럼)의 권력에 영합해 셀러브리티의 지위를 누린다. 다른 길을 걷는 두 마녀는 서로를 시기하다가도 이내 염려하며 모험의 종착지에서 재회한다. 영화는 원작 뮤지컬에 비해 두 주인공에게 상세한 서사를 부여하며 작품의 함의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엘파바는 투사로서의 면모가 강조된다. 스스로도 소수자 혐오에 노출됐지만, 자신만큼 차별받는 존재의 권리 신장을 위해 거대 세력과 맞선다. 글린다 역시 성장의 궤적이 두드러진다. 허영으로 인해 부조리를 눈감던 과거와 달리 진실 앞에서 끝내 침묵하지 않는다. 영화에 새로 추가된 두 솔로 넘버, 과 또한 두 마녀의 행적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리뷰] 보강된 서사는 확신, 추가된 넘버는 불신, <위키드: 포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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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 설희(여설희)와 화정(우화정)은 현실적인 고충을 안고 있는 20대 중반의 청춘들이다. 설희는 부상으로 육상선수의 길을 포기한 뒤 어떤 꿈을 가져야 할지 모르는 방황기에 있다. 화정은 취업에 매달리며 어엿한 사회인이 되길 원하지만 현실은 영 녹록지가 않다. 두 사람은 화정의 취업 성공을 일출에 빌기 위해 동해로 갑작스러운 당일치기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 계획이 점차 어긋나고 서로의 비밀스러운 속사정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둘은 싸운 뒤 각자의 길을 걷는다. 이 와중에 두 사람은 동해에서 또 다른 인연을 만나 이야기의 갈래를 넓힌다. 과거의 상처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지안(서지안)의 서사도 여기에 자연스레 엮인다.
이광국 감독이 단편영화 제작 워크숍에서 만난 신인배우들과 함께 소규모로 촬영한 작품이다. 간결한 촬영 방식 속에 드러나는 자연스럽고 소탈한 청춘들의 반짝임과 활기가 두드러지면서도, 코로나19 팬데믹을 등진 세대의 불안과 방황, 청년들의 공통적인 트라우마가 작
[리뷰] 아직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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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고 하던가. 영화 <넌센스>는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 남긴 경구를 넉넉히 흡수한 듯한 괴담을 들려준다. 미로에 빠져든 자의 이름은 유나(오아연). 그는 보험금을 공정하게 지급하기 위해 손해액을 산정하는 전문 손해사정사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효율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은 허위 사실을 지적하고, 사기 행각을 구별해야 하는 업무에 잘 맞아 보인다. 야근도 감수하며 잔업에 몰두하던 어느 밤, 일 처리가 능숙하지 못한 동료 보경(임현주)이 체념 섞인 한마디를 뱉어도 유나는 꿈쩍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보경이 의문스럽게 자취를 감추고, 유나가 보경이 매듭짓지 못한 사건을 넘겨받기 때문이다.
처음에 유나는 그 건을 해결하기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암환자였던 남자가 저수지에서 실족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으니, 이것이 자살인지 아닌지만 명백히 밝히면 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사망보험금 수령자로
[리뷰] 썩은 동아줄마저 없이 부조리를 견디기란 얼마나 괴로운가, <넌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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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개최만 남았다.” 문제없는영화제를 2주 앞두고 만난 권오중 총괄 디렉터는 긴 장정의 끝에서 비로소 숨을 고르는 듯했다. 지난 1년간 그는 영화제 사무실로 출퇴근하며 수백편의 출품작을 보고 긴 회의를 거듭하며 카메라 뒤에서 빽빽한 일정을 소화했다. 선례가 없는 제1회 영화제였기에 운영부터 심사, 홍보까지 모든 영역을 기초부터 세워야 했으나 그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오히려 제한 없이 꿈꿀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무엇보다 그를 버티게 한 건 작품들로부터 발견한 작은 희망이었다. “보내주신 영화를 보면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관심이 있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존재한다는 걸.” 그와 마주 앉아 총괄 디렉터로서 첫 영화제를 어떻게 구축해나갔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 11월20일 개봉을 앞둔 주연작 <마사이 크로스>에 대한 대화도 이어갔다. ‘차별과 격차, 침묵 속에서 외면된 이야기’를 다루는 이 작품은 그가 영화제를 통
[커버]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에겐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 권오중 문제없는영화제 총괄 디렉터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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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 영화관에 가면 언제든 조시 오코너를 만날 수 있다. 지난 9월과 10월, 조시 오코너는 올리버 허머너스의 <히스토리 오브 사운드>와 켈리 라이카트의 <마스터마인드>의 주연배우로 극장을 찾았다. 이어 오코너는 맥스 워커실버먼의 <리빌딩>으로 관객과 만나는 중이고, 연말엔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속 앙상블 캐스트로 등장할 예정이다. 예술영화부터 넷플릭스 스트리밍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서로 다른 얼굴을 선보이는 오코너는 지금이 단연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이중 한국에서 소개된 적 없는 <리빌딩>을 소개한다. 4편의 출연작 중 가장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리빌딩>은 자연재해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 재난에 굴하지 않고 서로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이야기다. 오코너는 이 영화에서 콜로라도주에서 대대로 운영하던 목장을 물려받은 카우보이 더스티로 분한다. 산불로 모든 것을 잃은 후 어
[뉴욕] 조시 오코너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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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한장의 이미지, 한 소절의 음악이 영화 전체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본 뒤 계속 떠오른 이미지는 태권도장 벽의 그을음이다. 관장님(이대연)은 미도(고민시)가 태권도장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사고 친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얼핏 상처와 흔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도식적인 상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내내 잊히지 않은 이유는 관장님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마도 관장님은 미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일인 양 호들갑 떨지 않고 덤덤히 기다린다. 참 좋은 어른이다. 대개 이해와 공감은 실과 바늘처럼 세트로 따라오지만 실은 꼭 연결되어야 할 필요조건도, 인과관계도 아니다. 상대의 사정을 꼭 다 알지 않아도 마음을 나누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일일이 캐묻지 않고, 입을 닫고, 그저 그럴 수 있다고 기다려주는 걸로도 충분하다. 때론 침묵하는 다정함이 느리지만 더 은근한 온기로 우리를 감싼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다정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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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
새벽 2시, 비 오는 홍콩 거리를 레커차에 실린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달린다. 예상에 없던 비가 부슬부슬 내린 탓에 제작부 스태프 한명이 레커차에 올라타서 몸을 낮추고 숨어 있다가, 컷 소리가 나면 일어나 손걸레로 부리나케 차창을 닦는다. 잠시라도 비가 잦아드는 틈을 타 바로 슛을 가기 위해, 적당한 타이밍을 노리는 수완 없이 그냥 컷과 다음 레디 사이 동안 우직하게 계속해서 비를 닦는다.
“컷! ○○ 야, 안되겠다. 잠깐 쉴게. 잠깐 닦지 말고 대기.”
비가 좀처럼 잦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무전기를 타고 감독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는 걸레질을 멈추지 않는다. 앞 유리, 옆 유리, 뒤 유리, 다시 앞 유리… 나는 괜히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운전석 창문을 열고,
“○○씨, 해외 촬영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니요, 세 번째요.”
“와! 뭐 뭐 했는데요?”
“<중증외상센터>랑 <당신의 맛>삿포로 분량이랑 이거요.”
“<중증외
[김신록의 정화의 순간들] 레디, 액션, 컷,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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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건을 3번 반복하여 3개의 다른 시점을 소환한다. 성실한 영화 관객이라면 진실의 다면성을 탐구한 <라쇼몽>식 서사를 언뜻 상상할 것이다. 이때 형식이 믿는 것은 관점이다. 관점은 곧 가능성이 되어, 복잡한 이야기의 실체가 의외의 윤곽을 조금씩 드러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같은 양태를 취하는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신작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투박하게 말해 정반대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인다. 현대 미국은 누가 보아도, 어떻게 재구성해도 분명한 경로에 진입했다. 그 과오를 감각하기 위해 영화는 세번 재실행된다.
시카고를 포함한 미국 주요 대도시를 노린 정체불명의 핵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 배경에서 시계는 째깍거리는데 매뉴얼화된 단계별 제재는 보기 좋게 차례로 실패 중이다. 종국에는 그저 핵폭발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온다. 모두 약 20분간의 일이다.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의 이 암울한 타임라인을 통과하는 첫 주자는 최전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끝으로 향하는 긴 시간,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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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서수빈)은 동급생 수호(김정식)가 아동 성범죄자 출소를 반대하는 서명문을 들이밀자 책상에 엎드린 채 심드렁하기만 하다. 수호의 거듭된 다그침에 그는 서명문 속 한 문장이 사실과 다르다며 사인을 거부한다. “피해자의 삶을 완전히 파괴한다. 이게 맞아?” 수호는 주인의 반문에 담긴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주인이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 외친다. “나도 성폭행 피해자야. 내 인생이 망가진 것 같냐?” 왁자지껄하던 교실에 침묵이 내려앉는 순간, 주인은 농담이었다고 멋쩍게 웃으며 자리를 뜬다. 씩씩함과 연약함이 한몸으로 출렁이는 이 대목에서, 우리 중 누구도 주인의 말에 눌러 담긴 사실과 진실을 거짓으로 흘려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장면이 교실에 불러올 여진에 머물 틈 없이 어느 가을날의 한적한 풍경으로 성큼 이동해버린다. 카메라는 어느새 땅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공중에서 테니스 코트를 명랑하게 가로지르는 여고생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후 영화가 반복 소환할 <양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세계의 주인, 세계의 역동성, <세계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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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도 품위를 지킬 수 있을까? 임진왜란에서 팔을 다친 왕실 화가가 검은 비단에 금으로 그린 댓잎들을 보며 생각했다. 앞서 걷던 남자는 “이게 군자의 기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하며 감탄했지만, 달빛 같은 조명과 서늘한 댓바람 소리에 둘러싸인 이정의 <묵죽도>엔 형용할 수 없는 비참함이 서려 있었다. 미술관 로비의 탁 트인 풍경을 보며 혼자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 했지만 이미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을 되돌릴 순 없었다. 상설 전시 관람을 포기하고 주차장으로 가려던 그때, 광장에서 뛰놀던 한 아이의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앙! 기모링! 앙! 기모링! 앙! 앙! 앙! 앙!” 지사들의 삼청을 기리는 자리에 그보다 더 불경한 외침이 또 있을까. 농담 같은 풍경에 모두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이는 근심 하나 없는 행복한 얼굴로 보호자의 추격을 따돌렸다. 그래, 여기까지가 전시겠구나. 어쩌면 품위란 고독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두가 품위에 대한 문제를 갖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네가 있는 시간에서 죽어갈 거야, < OHAYO MY NIGH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