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2년 전, 하명미 감독은 제주도로 이주했다. 휴가차 올레길을 걷다가 들어간 물회 식당 주인과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2001년 하명미 감독이 처음 연출한 단편에 출연한 배우였다고 한다. 우연한 재회는 기획영화 시나리오를 쓰며 매너리즘에 빠진 창작자에게 새 숨을 불어넣었다. “그분이 사는 여유롭고 느긋한 마을에서라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뚝배기 하나 싸들고 비행기를 다시 탔다. 하도리에 딱 8개월 세들 수 있는 방을 빌렸는데, 웬걸. 마음에 드는 글 한편 쓰고 서울에 돌아가려 한 계획은 밀물에 지워져버렸다. 해녀의 늦사랑을 그린 <빛나는 순간>을 명필름과 공동제작한 데 이어 모녀 서사로 4·3사건을 재구성한 <한란>을 완성하기까지, 하명미 감독의 시선은 수년째 제주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대화는 그 애착 형성 과정을 묻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 책 <빛나는 순간: 영화 편지>에 로케이션과 관련해 고민한 사연을 적었더라. 소준문 감독의 부탁대로 하도리에서 <빛나는 순간>을 찍었더라면 “제주에서 어렵게 찾은 내 평화로운 삶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었으리라고.
처음 하도리로 이주했을 때 주민들에게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를 찍어버리면 다시 쌓은 일상이 깨질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섬이 받아주는 사람만 제주에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지어도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거나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는 분들을 10년간 많이 봐왔다. 그런 가운데 어느 순간부터 제주 땅이 나를 받아주고 있다고 느꼈다. <빛나는 순간>촬영지가 삼달리로 정해진 것도 그런 맥락에서 운명이었다. 덕분에 하도리에서 계속 평화롭게 살 수 있었으니까.
- <빛나는 순간>에도 주인공 진옥(고두심)이 4·3의 상흔을 절절히 토해내는 신이 있다. 거기서 확장해 <한란>을 구상하기까지 어떤 경로를 거쳤나.
제주에 오기 전까지는 4·3을 잘 몰랐다. 제주에 온 후 매년 4월3일이 돌아올 때마다 슬퍼하는 이웃들을 보면서 역사를 배웠다. <빛나는 순간>의 독백 신에 대한 제주 관객의 반응도 큰 자극이 되었다. 멜로영화에서 주인공의 상처를 표현하기 위해 나온 작은 장면이었을지라도 귀하게 여겨주시며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때 언젠가 4·3 이야기를 제대로 영화화하겠다고 다짐했다.
- 그 주인공으로 아진(김향기)과 해생(김민채)이라는 어린 모녀를 세웠다.
원래 역사물은 나이 많은 중견 감독이 만드는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나 또한 60대쯤 4·3 영화를 만들 줄 알았다. 하지만 첫 장편 연출작 <그녀의 취미생활>을 마치고 문득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스치더라. 더군다나 과거에 써둔 장르물 아이템 중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모녀 서사가 있었는데, 이를 4·3사건과 접목하면 시나리오를 잘 풀어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캐릭터들을 1948년으로 데려오기로 하자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 모든 대사를 제주어로 썼고, 이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을 위해 자막까지 준비했다. 제주 토박이가 아닌 감독 입장에서도 쉽지 않았을 텐데.
성별, 연령, 성격, 출신 지역에 따른 제주어 고증이 매우 까다로웠다. 감수자만 10명이었다. 표현 하나 때문에 위경련이 올 정도로 끙끙 앓기도 했다. 딸이 엄마에게 ‘어멍’이라 부르는 대사를 꼭 살리고 싶었는데, 엄마가 스스로를 어멍이라 부르는 것은 괜찮아도 자식이 엄마를 어멍이라 호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감수자의 조언을 받은 것이다. 촬영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수정했다. 제주 시사 후 제주어 고증이 완벽에 가깝다는 평을 듣고서야 안심했다.
- 제주의 자연을 화면에 고스란히 옮기기 위한 고생도 엿보였다.
실제 한라산 내부로 들어가 찍을 수 없어서 한라산 자락에서 촬영했다. 중산간 깊은 곳의 수종과 지형이 적합하게 보여야 해서 연출부와 한라산 해발 600m 이하의 식생을 조사했다. 태풍이 와서 야외 세트가 떠내려가고, 큰 바위가 갈라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배우와 스태프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 어두운 동굴 신도 여럿 등장한다. 조명 컨셉은 무엇이었나.
실제로 학살터였던 볏바른궤와 함덕 서우봉에 있는 진지동굴에서 찍었다. 동굴 안에서 촛불이 비칠 때마다 인물들의 얼굴이 공포스럽지 않고 따뜻하게 그려지길 원했다. 흑백으로 4·3을 다룬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가 명암으로 동굴을 표현했다면, 우리 영화는 빛이 동굴 벽에 닿아 얼굴들이 일렁이면서 렘브란트 그림처럼 보이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빛이 감자처럼 투박하게 인물들을 감싸주게끔 찍었다. 신태섭 조명감독이 빛을 예술적으로 설계한 덕분에 내가 원한 바가 영화에 잘 담겼다.
- 온기를 나누던 도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충돌한다. 그럼에도 아진은 가족의 행복만 바랄 뿐이라며 “똑같은 사람”이 되는 복수는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내 성향과 영화의 주제 의식이 그 대목에서 드러난 것 같다.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 당원 350여명과 일반 주민들은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빨갱이’로 몰렸고, 국가는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로 낙인찍으며 학살을 정당화했다. 희생자들은 그렇게 꿈과 희망을 박탈당한 채 제주 땅에 묻혔다. 이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힘주어 말해야만 했다.
- 학살에 가담한 군인 중 고뇌하는 문 일병(김원준)을 공들여 묘사한 것도 그 때문인가.
4·3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문 일병이라는 이름을 이해할 것이다. 문 일병은 독립군의 자식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조선 국방 경비대에 들어온 캐릭터로 설정했다. 그러니 자신이 정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생존 군인들의 증언집에도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그들도 피해자였다. 그들이 받은 고통을 대변하는 캐릭터도 필요하다고 여겼다.
- 마지막에 4·3평화공원의 묘석들을 찍겠다는 결심도 자연스럽게 따라온 걸까.
처음 시나리오에는 다양한 결말이 있었다. 지금의 엔딩은 촬영본을 편집하면서 만났다. 이 장소로 1948년과 2025년을 연결해야 할 것 같았다. 김향기 배우를 캐스팅한 까닭도 두 시간대를 잇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모든 스태프가 제주를 떠난 뒤 나와 프로듀서, 드론 기사님 셋이서 묘석을 찍으러 갔다. <한란>이 4·3이라는 역사에 가닿게 하는 매개가 되어 관객이 직접 이 결말의 의미를 찾아보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