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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8일 오전 11시40분. 이른바 도색영화(桃色映畵) 사건의 첫 번째 공판이 열리던 서울재판소 4호 법정은 잠시 술렁거렸다. 방순원 심판관이 사실심리를 앞두고 일반 방청인의 퇴장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예끼! 니놈들이 사람이냐, 짐승이냐.” 독립촉성전국청년회 소속 젊은이들은 물러나면서 참았던 욕설을 퍼부었다. 도색영화 상영의 주범으로 법정에 선 피고 김재영과 김린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풍문에는 남녀가 홀라당 벗고서 몸을 합한다던디. 그걸 어떻게 찍었을까 당최 모르겄네.” 궁금증을 미처 해소하지 못한 수군거림도 들려왔다. 법정엔 입회 검찰관, 담당 변호사, 그리고 신문기자들만이 남았고, “추잡하고 에로틱한 남녀 나체 군상의 활극”에 관한 피고들의 진술이 시작됐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포르노 사건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도색영화회 사건. 도색영화회 사건은 당시 서울에서 첫손에 꼽히던 요정 명월관에서 터져나왔다. 수도경찰청은 1946년 12월
40년대에도 포르노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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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울머의 대표작 <우회>를 두고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영화학교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합격 점수를 받지 못할 정도로 불완전함으로 가득 찬 영화라고 썼다. 사실 <우회>는 극히 빈약한 제작비를 가지고 단 6일 만에 만들어진 영화였으니 그런 식의 평가와 맞닥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에 대한 에버트의 평가가 부정적이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영화가 가질 수밖에 없는 제한들을 파악하면서도 그것이 영화를 해하지 못함을 보았고 그래서 <우회>를 가리켜 “그 재료가 적절한 형식을 찾는 영화의 실례”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울머의 필모그래피에서 <우회>는 예외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절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등재한 120여편의 영화들 가운데 상당수는 겨우 2만달러밖에 되지 않는 예산을 가지고 6일 안에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들 가운데 다수는 울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B급 영화의 아버지, 에드거 울머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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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적인 식민분리주의가 씨를 뿌린 르완다 내전을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엔 불행히도 서구제국주의의 시선과 종족간의 편견이 그대로 녹아 있다. 영화는 르완다 사태의 뿌리를 간과한 채 ‘야만적 가해자-후투’ 대 ‘문명적 피해자-투치’, 그리고 ‘그들(투치)을 지켜주는 외국인’이라는 식민분리주의 도식을 반복한다. 이 영화가 서구인들에게 보여짐으로써 ‘외면하고 방관한 죄’(박평식)의식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르완다인들에겐 오래된 후투족의 계급적 분노와 권력을 재탈환한 투치족의 복수심을 자극해 현 투치 정권이 부르짖는 종족간의 화해를 저해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영화 속 호텔의 안과 밖은 르완다 사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식민모국이 세운 4성급 호텔의 사장은 백인이고, 지배인 이하는 현지인이다. 그곳엔 유엔평화유지군과 외신기자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많다. 내국인으로는 5성 장군과 ‘투치 부자들’ 그리고 외국 남자와 사귀는 투치 아가씨가 있다. 이곳은 특별하다. 전세계
편견은 오래 지속된다, <호텔 르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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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베니스의 떠오르는 별
유머는 만국공통어다. 에마누엘레 크리알레즈의 <황금의 문>(Golden Door/ 112분/ 이탈리아·프랑스/ 경쟁부문)은 이탈리아 민족 특유의 해학적 시선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영화다. <황금문>의 시대적 배경은 유럽인들의 미국 이주가 붐을 이루던 20세기 초반의 대이민 시대다. 이탈리아 촌구석 시실리섬의 만쿠소 가족은 노모까지 합세해 미국 이민을 감행한다. 만쿠소는 집채만한 양파와 닭, 은화들이 매달린 나무가 찍혀 있는 거짓말 같은 흑백사진을 본 뒤로 미국에서의 풍족한 삶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 그 길은 쉽지 않다. 전쟁통의 피난선 같은 배에 몸을 실어 미국에 도착해보니 각종 신체검사에 방역·위생검사, 심지어는 그림판을 맞추는 등의 지능검사가 기다리고 있다. <황금의 문>은 이 짜증스럽고 비합리적이며 인종차별적인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그 위에 만쿠소의 순박한 시선을 한겹 덮는다. 이로 인해 생기는 해학
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결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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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들의 식지 않은 열정을 엿보는 즐거움
관록의 거장들과 젊은 작가들이 고루 포섭된 영화제 중반까지는 후자들의 신작이 전자들의 것보다 영화적으로 훨씬 강하게 어필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블랙 달리아>는 원작의 방대하고 치밀한 세계 그리고 흑백 누아르 필름의 미학적 틀에 속박당한 채 감독 스스로 자유와 상상력을 잃어버린 작품이었고,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아래 깔렸다가 극적 구조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올리버 스톤의 <월드트레이드 센터>는 그 감동이 미국식 휴머니즘 안에 완벽히 갇혀 있었다. 독일 감독 폴 버호벤은 <블랙북>이란 영화에서 2차대전 당시 독일 장교와 유대계 여성의 실제 사랑 이야기를 평범한 독일어 멜로드라마로 바꾸었을 뿐 민족의 역사적 죄의식과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다. 알랭 레네의 유쾌한 소동극과 스티븐 프리어즈의 기품있는 대중영화, 가린 누그로호의 비장미 넘치는 인도네시아 전통 오페라극이 없었다면 베니스에서의 거장들과의 만
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결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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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를 묻는 퍼즐
올해 베니스가 남긴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는 데이비드 린치의 173분짜리 신작 <인랜드 엠파이어>다. 영화 제목으로 쓰인 ‘인랜드 엠파이어’는 미국 LA 동부지역의 산 베르디날도 카운티와 리버사이드 카운티를 함께 일컫는 지명이다. 인구 400만 규모의 이 상류층 거주지역이 영화 <인랜드 엠파이어>의 공간적 무대다. 유명 여배우 니키(로라 던)는 고대했던 새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엄청난 기대감에 부푼 그녀는 상대 남자배우(저스틴 테루)와 함께한 첫 촬영 자리에서 감독(제레미 아이언스)에게 “이 영화가 실은 리메이크작”이며 “원작에 출연했던 두 주연배우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꺼림칙하지만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니키와 상대 배우는 영화를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왠지 불길하다.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남자배우는 “여기 누군가 있다”며 세트장 안을 뒤지지만 허탕을 치고 만다.
린치의 여느 작품들처럼 범상
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결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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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보편적 울림
<스틸 라이프>의 이야기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다. 양쯔강이 관통하는 중국 펑제(奉節)현 싼샤(三峽)지역을 무대로 삼은 이 영화는 16년 전 집을 나간 아내를 찾는 남자의 여정과 2년간 헤어졌던 남편을 찾으러 가는 여자의 여정을 평행으로 겹쳐놓고 있다. 이야기의 큰 분량은 아내를 찾아나선 남자에 관한 것이다. 남자는 아내가 보낸 엽서 하나를 손에 쥐고 싼샤지역에 들어선다. 마을 주민들에게 엽서에 찍힌 사진을 보여주며 “이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부탁해보지만 다른 억양 때문에 의사소통이 쉽지 않을뿐더러 무관심인지 불친절인지 주민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남자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담배를 나눠주면서 환심을 사고 정보를 얻는다. 아내를 겨우 찾아냈는데,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부인이 돼 있다. 오빠가 진 빚 때문에 팔려가다시피 한 그녀를 되찾아오기 위해서는 3만위안이 필요하다. 남자는 일당 40위안의 막노동을 그만두고, 비록 목숨은 위험해
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결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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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지난 9월9일 폐막했다. 올해의 베니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깜짝 상영작’으로 영화제 기간 중 뒤늦게 공개된 경쟁작 <스틸 라이프>의 황금사자상 수상,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미국영화 <할리우드랜드>의 벤 애플렉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사실, ‘은사자발견상’이라는 없던 상을 급조하여 이탈리아영화 <황금문>에 트로피를 안긴 것. 이런 것들은 하나의 이벤트로서 베니스영화제를 흥미롭게 만든 부분이다. 전세계의 동시대 영화들을 아우르는 시사회장으로서는 브라이언 드 팔마와 올리버 스톤, 스티븐 프리어즈와 알폰소 쿠아론, 차이밍량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오시이 마모루와 대런 애로노프스키를 모두 아울렀다는 점에서 당분간 기억될 만한 영화제다.
흥미로웠던 11일간의 영화축제를 결산하며, 우선 지아장커의 황금사자상 수상작 <스틸 라이프>와 평생공로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린치의 3시간짜리 판타지극 <
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결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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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30일까지 ㅣ 대안공간 루프, 쌈지스페이스, 갤러리 꽃, 갤러리 숲 외 야외공간(서울시 서교동 소재) ㅣ 02-396-9636
대안공간에서 전시되는 작품의 분위기는 일반 갤러리의 것과는 뭔가 좀 다르다. 국내 곳곳의 주요 대안공간들이 색깔있는 기획전으로 관객을 향한 ‘특별한 구애’에 나섰다. ‘공공의 순간’이라는 주제로 지난 9월5일 개막한 이번 행사들은 서울 시내 대안공간에서 열리는 제1회 국제작가포럼을 비롯해 부산, 광주, 안양, 인천 등 국내 주요 도시에서 연이어 개최되는 연합전시다. 대안공간은 일반 갤러리와 무엇이 다를까?
현대미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실험성과 다양성이다. 편협한 사고에 얽매이지 않고 열린 감성을 좇는 작가적 성향은 이젠 보편화된 현대미술의 키워드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이러한 ‘자유로운 작가들의 창작의지’를 받아주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전시공간은 이미 시행착오나 실험단계가 지나고 어느 정도 완성된 작품을 선호하기 때문이
대안공간의 특별한 유혹, <2006 AFI “Public 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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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은 인간의 어둠을 묘사하는 데 거침이 없는 작가다. 루헤인은 이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화한 <미스틱 리버>나 인상적인 반전으로 한국에서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살인자들의 섬>에서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입고 황폐해진 인간의 내면을 동정없이 그려낸 바 있다. ‘사립탐정 켄지 & 제나로 시리즈’인 <가라, 아이야, 가라>와 <비를 바라는 기도> 또한 ‘현대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결정판’이라는 광고 문구가 과하지 않은 수작들로, 정당함이나 규칙에 아랑곳하지 않는 폭력적인 사립탐정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악에 맞서는 이야기들이다. 사립탐정인 패트릭 켄지의 일인칭시점에서 진행되는데 그에게는 앤지 제나로라는 동료 여탐정이 있다.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두 사람의 파트너십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긴밀하다. 30년 만에 나타난 보스턴 연쇄살인범을 잡은 공로로 유명세를 탄 지 2년이 지나, 두 사람은 자기 방 안에서
폭력적인 두 사립탐정, 악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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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9월24일(일) 밤 12시30분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간호사다. 이 남자는 평소 짝사랑하던 여인이 식물인간이 되자, 그녀를 돌보기 시작한다. 식물인간이 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그에게 더 없는 행운이다. 그는 가만히 누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여자와 일상을 나눈다. 그는 자신이 그녀와 진짜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다. 또 다른 남자가 있다. 투우사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녀 역시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다. 한 병원의 두 남자와 식물인간이 된 두 여자. 그리고 사랑.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얇은 실로 연결된 이들의 인연을 촘촘하게 엮어 기이한 멜로(?)를 만들어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영화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상을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녀에게>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을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이 영화는 그저 독특한 멜로 혹은 지극히 감상적인 남성 판타지 수준
얇은 실로 촘촘하게 엮은 멜로드라마,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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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에, MT 기분으로 오래서 합류했지~”
경북 문경에서 철길 폭격 장면을 찍고난 이대연은 “이제야 전쟁영화를 찍는 기분이 난다. 그동안 놀러오는 것 같았는데”라고 말했다. 이상우 감독에게 강제징용을 당했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배우들은 한여름에 시작된 촬영인데도 힘들어하지 않고 나뭇가지로 윷을 만들어 놀거나 하며 MT 비슷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계급은 있다고 했다. 하루만 특별출연하는 사람은 신의 아들, 다른 마을로 피난을 가거나 하여 촬영이 5회 이하인 사람은 귀족, 철길에서 폭격을 당해 죽는 사람은 평민, 살아남은 이들이 사흘 동안 총격을 받으며 버티다 쌍굴까지 들어가는 사람은 노예. 50년대 농민들의 허름한 저고리를 입고 느긋한 손길로 날벌레를 쫓으며 노는 듯 일하는 듯 촬영장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배우들을 계급 불문하고 한명한명 담아보았다.
강신일/
영화 <공공의 적> <한반도>, 드라마 <부활>
강씨_어
이상우 데뷔작 <작은 연못>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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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말 충청북도 노근리에서 피난민 수백명이 미군에 사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실개천이 터져나온 핏줄처럼 붉게 변했다는 쌍굴과 철로는 남아 있었지만, 사건 자체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무덤이 되었다. 그러나 노근리뿐이었을까. 여수와 순천, 제주도, 이라크, 르완다, 산티아고…. 숱한 지역전과 내전과 국제전은 타의에 의해 총을 들어야 했던 군인들과 맨몸으로 총알에 노출된 민간인들을 제물로 삼아 국경선을 다시 그리고 집안을 평정해왔다. 연극연출가로서는 부동의 지위에 오른 이상우 감독이 “이 촬영장에서 나는 할아버지”라고 말할 만한 나이에 처음으로 만드는 영화 <작은 연못>은 그런 이야기다. 세월이 흐르고 땅이 바뀌어도, 하나같이 침묵하며 죽어가야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56년이 지나서야 그때처럼 무더운 여름에 촬영을 시작한 <작은 연못>은 감을 거두어 곶감으로 말리는 가을에 촬영을 마치고, 그때처럼 무더울 내년 여름에 개봉한다. 마르케스가
이상우 데뷔작 <작은 연못>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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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얍∼!” 단단한 기합 소리와 함께 날선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의 사나운 몸짓이 서늘한 세트장의 공기를 후끈 달궈놓는다. 이곳은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에 자리한 <해바라기> 촬영현장. 오페라 하우스를 연상시키는 나이트클럽의 화려한 경관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그보다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땀방울을 흩뿌리며 종횡무진 상대를 제압하는 김래원이다. 몸이 채 풀리지 않은 듯 슬슬 허리를 돌리다가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테이블을 훌쩍 뛰어넘는 그의 동작에는 거침이 없다.
<해바라기>는 조직의 전설로 군림하던 남자 태식(김래원)이 10년간의 수감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뒤, 자신을 보듬어주는 한 가족을 만나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으로 주목받았던 강석범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이날 촬영분은 태식이 자신을 보살펴주던 덕자(김해숙)와 희주(허이재)를 해친 조직
가슴으로 우는 남자의 마지막 주먹, <해바라기> 촬영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