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一山一家.’
‘하나의 광산, 하나의 가족’이라고 영화는 해석한다. 광산촌 소녀들은 도쿄에서 온 선생님을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자신들을 하나의 가족이라고 부를 만큼 단단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반은 공동의 고립감. 그들을 오해하고 폄하하는 외부의 시선은 그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완성한다. 그런데 하나의 가족인 광산촌 사람들은 폐광으로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훌라걸스>는 거기서 시작한다.
열심히 살아온 탄광촌 사람들은 억울하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시대가 그들을 ‘뒤처진 사람들’로 만들었다. 석탄의 시대가 거하고, 석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역사적 소임을 다한 공동체는 흔들린다.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에 머무를 것이냐, 불확실한 변화에 미래를 걸어볼 것이냐, 공동체는 분열한다. 공동체는 하와이를 흉내낸 온천을 만들고 훌라춤을 추어서라도 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미래파’와 광산촌의 역사와 전통을 사수해야 한다는 ‘역사파’가 충돌한다. 그곳에도 청춘들이 있다. 한
[이창] 훌라걸스는 제2, 제3의 이상일이다
-
당신이 “완전 멋진데!”라는 만트라를 아무리 반복해봤자 영화 <엘 토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36년 전에 그곳에 있어야만 했다. 당신이 이른 아침 만취 상태로 8번가 아래에 위치한 황폐한 극장에 있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바로 그럴 때, 내 장담컨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대작이 신비의 대상에서 즐김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비록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영화가 극장주인 벤 바렌홀츠의 승리라 해도 말이다.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쉽게 정의내리기 힘든 멕시코영화를 1970년 현대미술관(MOMA)에서 발견한 사람이 바렌홀츠다. 그는 자정에 상영하는 영화표를 예매했다(주말엔 새벽 1시에 시작했다). <빌리지 보이스>에 실린 광고 문구와 마찬가지로, “다른 어떤 방식으로 상영되기엔 너무나 묵직했기” 때문에 그는 자정을 택한 것이다. 자정용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하게도 <엘 토포>는 일주일 동안 밤 내내 상영되었다. 놀라운 입소문을 타고 흥행을
[영화읽기] 당신은 거기에 있어야 했다
-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희극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종잡을 수 없는 괴물이 등장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오래된 <매드>(Mad) 잡지 더미에 비견할 만한 무정부적 난장판을 보여준다. B급 감성의 익살이 가득한 광대극으로서 봉 감독이 만들어낸 첨벙거림 자체가 일종의 괴물이라 하겠다. 이 영화는 한국 역사상 최고 수익을 거둔 영화이다. 지난 5월에 칸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관객은 마치 라면을 먹듯 이 영화를 후루룩 소리내며 마셔댔다.
<괴물>의 주요한 매력은 공중제비를 하는 육식성 돌연변이 점액질 덩어리에 있다. 잡지 <매드>가 한때 ‘더미’(Heap)라 불리는 쓰레기더미에 생명을 부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괴물>은 강탈당한 땅의 입속에서 끄집어져 나온 점액질 덩어리를 제시한다. 이 살인 올챙이는 물고기처럼 수영할 수 있고, 곤충처럼 겅중거릴 수 있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맹금류처럼 뛰어다닐 수도 있다. 1
[영화읽기] 살인 올챙이의 비릿한 공포
-
두번의 이별이다. 다른 이를 향한 남편의 마음을 인정하고 소리없이 등을 돌렸던 그가 이번에는 남편이 너무나 ‘FM’이라는 이유로 결별을 선언했다. <연애시대>에서 <쏜다>로, 브라운관에서 스크린으로, 문정희는 연거푸 감우성과 헤어짐의 만남을 가졌다. “그렇고 그런 공무원에, 반듯하게 살아온 남자의 부인이 가질 수 있는 답답함이 무엇일까, 그 입장이 돼서 고민해보려 노력했어요. 단지 삐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억눌러왔던 것이 비죽비죽 튀어나오는 느낌을 내고 싶었죠.” 숨막히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일탈을 꿈꾸었으되, 오히려 남편의 극단적 일탈에 뒤통수를 맞는 아내. 문정희가 <쏜다>의 경순이 된 데는 무엇보다도 인연이 강하게 작용했다. <바람의 전설>로 한솥밥을 먹은 박정우 감독과 김수로, <야수>로 낯을 익힌 강성진, 그리고 <연애시대>의 감우성까지. “타이밍이 운명”이라는 생각에 망설임은 없었지만, 사실 두
단아한 그녀의 ‘별짓’, <쏜다>의 문정희
-
-
오늘 신문을 보니 경찰이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에 대해 ‘방화’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단다. 확실한 증거는 없단다. “증거는 없지만 방화임에 틀림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문장인가! 있지도 않은 작가의 있지도 않은 인용하며 천연덕스레 그럴듯하게 말하는 보르헤스의 소설에 버금가는 놀라운 문장이다. 사실 이를 누가 반박할 수 있으랴! 화재현장도 감추어놓고, 감시카메라 테이프도 공개하지 않으며 하는 말이니, 우리는 그저 믿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바로 가해자였다는 이 놀라운 역설은, 미리 알려지지 않아 반전의 묘미를 살릴 수만 있었다면, 정말 훌륭한 보르헤스풍의 소설이 될 뻔했다.
그런데 그는 왜 방화했을까? 왜 자신의 죽음을 야기할 사태를 ‘저질렀을까?’ “그는 원래 또라이였다”는 식의, 훌륭한 소설을 망칠 발상을 끌어들이진 말자. “그는 왜 범죄자가 되었나? 범죄자가 될 성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동어반복적인 답은 맹구 같은 봉숭아학당의 학생들에게나 어울릴 것이
[영화읽기] 개 같은 나라, 개 같은 경우
-
“삶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닙니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영화 <씨 인사이드>의 샘 페드로는 조용히 외친다. 사지가 마비된 채 침대 속에 갇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위해 세상과 맞선다. 어린 시절 바다에 몸을 던졌고, 수심이 깊지 않았던 관계로 몸에 충격을 받은 남자. 하지만 그 외침은 결코 선동적이지 않다. 잔잔한 바다에 물결이 일듯, 그는 “사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삶”을 생각할 뿐이다. 안락사라는 논쟁적인 문제를, 샘 페드로라는 실존 인물의 삶에 녹여낸 영화. 그 속에서 바다의 정적을 연기한 배우는 스페인의 국민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출세작인 <하몽하몽>의 종마 같았던 모습을 생각하면, 55살의 중년 남성 샘 페드로는 결코 ‘바르뎀적’(bardemic)이지 않다. 짙은 흙빛의 머리카락은 숱이 많이 없어졌고, 넓은 이마와 강한 얼굴은 부드러운 윤곽으로 새 자리를 잡았다. ‘못생겼지만 멋지다(feo-quapo)’는 그만의 수식어도 이제는 바뀌어야
겸손함과 지혜를 겸비한 배우, <씨 인사이드>의 하비에르 바르뎀
-
<씬 시티>의 원작자이자 공동 감독인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각색한 <300>은, 자칫 논란을 불러올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일단 서구인이 아니라면, 페르시아 왕과 병사들을 잔인한 야만인으로 그린 것에 불쾌할 수 있다. <300>의 그리스 세계는 ‘이성과 정의의 유일한 희망’이지만, 페르시아는 타국을 침략하고 노예를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전제국가이다. 하지만 고대의 페르시아는 그리스 이상으로 이성적일뿐 아니라, 너그러운 국가였다. 또한 페르시아를 따지기 이전에, 스파르타가 과연 칭찬받을 만한 법과 질서를 가지고 있었는가, 도 생각해야 한다. 스파르타는 노예에게 가장 가혹한 노동과 형벌을 가한 나라였다. 잭 스나이더 감독 역시 “영화는 스파르타인의 시각에서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들의 문화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말한다. ‘작거나 약하거나 병색이 있거나 기형이면 버려’지고, ‘굳세고 강한 자만이 스파르타인으로 불’리는 스파르타의 사회체제는 명백
[영화읽기] 너무도 황홀한 하드보일드의 껍데기
-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요새 내가 사는 유일한 낙인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과 한때 열광했던 애니메이션 <심슨네 가족들>, 영화 <좋지 아니한가>는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작품들이다. 전통적으로 가족영화가 걸어왔던 기치인 ‘희생과 헌신’을 신발장 앞 발매트로도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좋지 아니한가>는 이 연관성을 숨기지 않는다. 영어 제목은 <심슨네 가족들>(원제 더 심슨스)을 연상시키는 <심스 패밀리>이고, 거리 홍보 포스터에서는 <거침없이 하이킥>의 캐릭터와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짝짓기했다. 그러니 나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대가 높아서였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허전했다. 실망하거나 지루한 것도 아닌데 허전한 느낌. 아무것도 안 보고 나온 것 같은.
서로 다른 장르를 수평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화법의 세련됨이나 가족을 바라보는 태도의 참신함에서 분명히 &
[투덜군 투덜양] 21세기형 모범가정의 사례
-
책은, 특히 문학은 더이상 읽지 않는다는 한국에서도 파올로 코엘류의 소설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간다. 그의 작품은 기독교에 입각한 종교적 성찰을 현대인의 삶에 쏙쏙 대입할 수 있는 경구 같은 문체로 매력적인 고통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멋진 그림과 함께 한 구절쯤 인용해 블로그에 올리기 좋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삶에 지친 영혼에 신경안정제 역할을 해주는 그의 98년작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가 일본 감독 호리에 게이에 의해 영화화됐다. 영화는 원작이 있던 곳으로부터 먼 거리를 이동했지만, 전 인류의 보편적인 관심사인 ‘자살’이라는 소재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적 배경인 유럽풍의 인테리어로 국적을 탈색시킨 정신병동 덕에 둘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원작에서 스물네살이었던 베로니카는 영화에서 스물여덟의 토와(마키 요코)가 된다.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으니까’라는 이유로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 그녀는 정신병동에서 깨
삶을 달래주는 달콤한 위안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
지적 스릴러도 좋지만 내공보다 욕심이 앞서면 곤란하다. <푸코의 진자> 중엔 디오탈레비와 아르덴티 대령이 수의 신비를 논하며 성당기사단에 관해 추론하는 장면이 있다. 성당기사단원 수인 36을 분해하고 더하고 곱하며 역사를 관장하는 신의 조화를 짜맞춰내는 이 대목에서 이들은 순수한 지적 쾌감을 넘어서는 신성한 황홀경에 빠진다. <푸코의 진자>의 기지는 기기묘묘한 숫자놀음을 절묘한 지적 감동으로 받아들일지 썰렁한 궤변으로 넘길지를 독자의 몫으로 남기지만, 짐 캐리의 심각한 스릴러 <넘버 23>은 줄곧 “이거 봐, 정말 교묘하지?”라는 믿음을 강요하다 썰렁하게 끝난다.
월터 스패로우(짐 캐리)의 평온한 일상은 부인 아가사(버지니아 매드슨)가 사온 한권의 책으로 무너진다. 저자도 출판사도 불확실한 극중 소설 <넘버 23>은 “숫자 23의 법칙이 만물에 들어 있다”는 기묘한 망상 이야기다. 월터는 주인공 핑거링에 대한 묘사에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
수 논리의 융단폭격 <넘버 23>
-
북극곰 ‘빼꼼’은 EBS와 투니버스에서 방영된 TV시리즈 <빼꼼>으로 이미 스타덤에 오른 ‘코믹 배우’다. 2~3분 내외의 단편인 <빼꼼> 시리즈에서 주연한 이 백곰 캐릭터는 쇼핑몰 회전문에 끼거나 러닝머신 위에 올라 허둥대며 웃음을 자아낸다. 논버벌 애니메이션(non-verbal animation)이라 대사는 “웅? 웅? 우어어~”가 전부. 100% 국내 기술의 3D그래픽으로 창조된 백곰의 실수연발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빼꼼> 시리즈는 2002년 프랑스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주목받은 단편 <아이 러브 피크닉>을 TV시리즈화한 작품으로, 이미 영국 <BBC>, 미국 카툰네트워크, 프랑스 M6 등 20개국에 수출 계약을 체결한 ‘성공한’ 상품이기도 하다. <빼꼼의 머그잔 여행>은 임아론 감독의 RG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TV 시리즈 공개 이전인 2002년부터 준비해온 장편 프로젝트다.
우연히 마법의 펜던트
착한 애니메이션 <빼꼼의 머그잔 여행>
-
제니퍼 애니스톤이 브래드 피트와 갈라서지 않았더라도 이 결별 스토리에 캐스팅됐을까, 제니퍼 애니스톤이 빈스 본과 달아오르지 않았다면 이 엇박자 애정극이 그렇게 화제가 됐을까, 하는 1차원적 눈초리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개인 누구에게나 사랑의 발견은 100만볼트짜리 아드레날린 주사이며, 이별의 확인은 전 우주의 죽음을 알리는 선고다. 무수히 변주를 반복하는 사건의 디테일이 문제일 뿐이다. <브레이크 업: 이별후애(愛)>는 짜릿한 연애 발생사를 최대한 간략하게 처리한 채 애정의 데드맨 워킹을 길게 주시하는 남녀상통지사다. 물론 사도마조히즘 로맨스는 아니다. 바람나거나, 불치병에 걸리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별예방 참고서로 삼을 만한 드라마다.
게리(빈스 본)는 시카고 거리를 누비는 관광 가이드답게 지칠 줄 모르는 유쾌한 입담과 에너지의 소유자다. 브룩(제니퍼 애니스톤)이 게리의 당찬 작업 스타일에 반한 배경에는 청담동 스타일의 갤러리에서 성질죽이고 봉급쟁이 큐레이터
이별예방 참고서 <브레이크 업: 이별후애(愛)>
-
소년 태수는 마약조직의 보스 구양원(문성근)의 돈을 강탈해 용케 도망친다. 태수를 쫓던 조직은 그 대신 일란성 쌍둥이 동생 태진을 붙들어간다. 그렇게 동생과 헤어진 태수(지진희)는 19년이 흐른 뒤에야 태진의 행방을 알게 돼 만날 약속을 정한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동생을 기다리던 태수는 누군가가 쏜 총에 의해 태진의 머리가 관통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어릴 적부터 싸움을 잘했고 성인이 된 뒤에도 ‘수’라는 이름의 특급 해결사로 활약해온 태수는 태진의 신분으로 위장한 채 철저한 복수를 노린다.
신영우의 만화 <더블 캐스팅>을 바탕으로 한 최양일 감독의 영화 <수>는 쌍둥이 동생 행세를 하는 태수가 태진의 죽음 뒤에 가려진 비밀을 파헤치고 응징하는 과정을 담는다. 태수는 태진이 다니던 경찰서 강력팀에 들어가게 되고, 동료 형사인 미나(강성연)가 태진의 애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태수는 또한 ‘수’를 뒤쫓고 있는 강력팀 형사(이기영)의
복수심 그 자체의 잔인성과 무한성 <수>
-
향을 갖지 못한 자의 집착, 그리고 살인.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코로만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한 남자의 굴곡 많은 일대기다.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프랑스의 한 시장 골목. 장 바티스트(벤 위쇼)는 생선이 토막째 잘려나가듯 탯줄이 잘려 버려진다. 하지만 지독한 생선 냄새는 바티스트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하고, 바티스트는 ‘진드기’ 같은 생명력으로 자신의 출생을 알린다. 아기를 버리다 걸린 여인은 시장 사람들에 의해 사형대로 보내지고, 죽음을 맞는다.
향이 결핍된 남자의 발달된 후각, 어머니의 죽음을 뒤로한 채 이어간 목숨. <향수…>의 주인공 바티스트의 삶은 결핍에서 시작한다. 식성이 좋고 인간의 향이 없다며 구박받던 고아원 생활에서도 그가 세상 모든 물건의 향을 맡으며 소통을 시도할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꽃에서 나는 향, 죽은 쥐에서 나는 향, 나뭇조각과 돌맹이에서 나
소설 내용에 충실한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