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20일, 대전영화촬영스튜디오 세트장. <별빛 속으로>(제작 스폰지, 감독 황규덕)의 촬영이 한창이다. 70년대 말 배경에 어울리게 라디오에서는 언뜻 송승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소리를 귀기울여 들으며 뭔가 석연치 않아하는 교련복 차림의 대학생 수영(정경호). 뒤이어 촬영된 장면은 정신을 잃은 그를 사랑스럽게 안고 있는 일명 삐삐 소녀(김민선)와 ‘진지한’ 표정의 일명 노란샤쓰(김C). 청년은 지금 이것이 삶인지 죽음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다. “자기(정경호)는 이들이 사라지고 나면 정신을 차리는 거야. 경호씨 미치도록 숨을 쉬어야 돼.”
“미치도록 숨을 쉬어야 돼….” <별빛 속으로>는 70년대 말을 살았던 한국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같은 강의실에서 시작된 수영과 삐삐 소녀와의 인연은 잠시 연애 감정에 빠져든다. 그러나 삐삐 소녀는 집회장 옥상에서 구호를 외치다 떨어지고, 수영은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한
70년대에 내뱉는 거친 한숨, <별빛 속으로> 촬영현장
-
“잘 가세요, 잘 가세요.” 300여명이 목청이 찢어져라 노래를 불렀건만, 김지훈 감독은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골을 넣었을 때처럼 열정적으로 해주세요.” 김 감독의 가차없는 요구에 세트장은 한층 높아진 노랫소리로 출렁거렸다. “오늘은 적은 편이에요. 어제는 900명 정도 모아놓고 군중신을 찍었는데 장난 아니었어요.” 정신없는 와중에 지나가던 스탭이 한마디 던졌다. 5·18이라는 큰 사건을 소재로 삼은 까닭에 동원되는 보조출연자들이 무척 많은 모양이었다. 그 사이 금남로를 가득 채운 시민군이 공수부대를 향해 약을 올리는 장면의 촬영이 계속됐다. ‘광주여 영원하라’, ‘형제여 일어나라’ 등의 피켓을 나눠든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박철민과 박원상이 내지르는 고함에 맞춰 웃고 떠들며 분위기를 띄웠다. 행렬의 선두에 선 두 배우는 보조출연자들을 지휘하랴, 연기에 몰입하랴, 쉴 틈이 없어 보였다.
9월11일 오후, <화려한 휴가>의 촬영이 진행된 이곳은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화려한 휴가> 촬영현장
-
‘시네마 노보’(신 영화)의 나라 브라질은 세계영화의 역사에 한때 굵은 흔적을 새긴 남미의 대표적인 영화국가였다.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 글라우버 로샤 등의 감독들은 60년대 군사정권의 통치와 검열에 맞서 싸우면서 브라질 고유의 민중문화를 강조한 ‘시네마 노보’를 창조했는데, 이 영화들은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에 대항하면서 영화적으로는 픽션, 다큐멘터리에 상관없이 할리우드영화의 ‘웰메이드’를 거부하며 한계적인 상황에서 ‘열대주의’나 ‘카니발리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간의 원초적인 기쁨과 열망을 표현한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노출과다 영상만큼이나 이들의 영화에는 이미지의 순박함이 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브라질영화제’는 그런 낯선 영화와 만나는 기회다.
시네마 노보 대표작 <마꾸나이마>와 21세기 작품 5편 상영
총여섯편이 상영되는 이번 영화제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작품은 단연 조아킹 페드로 데 안드라데의 <마꾸나이마>(1969)다. 영화교
시네마 노보는 살아 있다, 브라질 영화제
-
스타일과 상상력, 실험적 내러티브의 맛
<파프리카> Paprika
곤 사토시/ 2006년/ 일본/ 90분/ 애니아시아!
2004년 동시대 일본에서 PT라고 불리는 기계가 발명된다. 일명 ‘DC미니’라고도 하는 이 기계는 꿈을 통로로 인간의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의 산물이다. 젊은 여박사 치바는 자폐적인 천재 도키타와 함께 이 기술의 개발자. 그런데 정부로부터 정식 사용허가가 떨어지기 전에 기계가 도난되고 만다. 유력한 용의자는 개발에 참여했던 히무로라는 동료다. 치바는 이 기계를 테스트했던 고나가와 형사와 함께 히무로의 꿈에 들어가 도난범을 붙잡고자 한다. 문제는 DC미니의 결정적인 기술적 결함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 예상했던 대로 DC미니가 오작동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인간의 기술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다.
<파프리카>는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 <도쿄 갓파더스>로 이어지는 곤 사토시만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7] - 실험영화
-
-
노련한 연출력 선보이는 반가운 감독들과의 만남
<레퀴엠> Requiem
한스 크리스찬 슈미트/ 2006년/ 독일/ 93분/ 월드 시네마
1976년 독일의 한 시골마을. 21살의 미카엘라 클링거가 죽었다. 사인은 며칠간에 걸쳐 거행된 엑소시즘으로 인한 탈진이었다. <엑소시스트>를 연상케 하는 미카엘라 클링거 사건은 극적인 드라마로 인해 오랫동안 서구사회의 종교적 텍스트로 회자되어왔고, 2006년에는 두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나는 할리우드의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고, 다른 하나는 한스 크리스찬 슈미트의 비범한 장송곡 <레퀴엠>이다.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가 악마들림 현상을 모호하게 해석하는 할리우드 장사치들의 한철 상품이라면, <레퀴엠>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종교적 광신에 휩싸이는 순간 재림하는 마음속의 악마를 무시무시하게 그려낸 드라마다. 오랜 간질 병력을 가진 21살의 미카엘라 클링거(샌드라 휠러)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6] - 작가영화
-
세상을 향해 내디딘 큰 한 걸음
<내가 살던 키부츠> Sweet Mud
드로 샤울/ 2006년/ 이스라엘, 독일, 일본, 프랑스/ 100분/ 월드시네마
열세살은 십대가 시작되는 나이다. 어린아이처럼 무책임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지만, 잔인한 세계에 맞서기엔 너무 적은 나이. <내가 살던 키부츠>는 그 열세살을 통과하며 살 속 깊숙이 파고든 상처를 가지게 된 한 소년의 이야기다. 키부츠에 살고 있는 드비르는 일년 뒤에 성인식을 치르는 열세살 소년이다.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그의 엄마 미리는 몇년 전에 해변에서 만났던 스위스 남자 슈테판과 편지로 연애를 하다가 그를 키부츠로 초청한다. 슈테판이 나이가 많은 데 실망했던 드비르는 자상한 마음 씀씀이와 연을 만드는 실력, 엄마를 아껴주는 애정에 감복해 그를 정말 좋아하게 되지만, 슈테판은 드비르를 못살게 구는 이웃 남자의 팔을 비틀었다가 키부츠에서 쫓겨나고 만다. 유일한 희망을 놓친 미리는 몇년 전에 그랬듯이 술과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5] - 성장영화
-
때로는 벗어나고픈, 때로는 기대고픈
<럭셔리 카> Luxury Car
왕차오/ 2006년/ 중국, 프랑스/ 88분/ 아시아영화의 창
올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부문 시선상 수상작. 왕차오 감독은 이농현상과 천안문 사태 등 중국을 뒤흔든 시대적 움직임 속에 도시로 간 뒤 연락이 끊긴 자녀를 둔 부모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의 문제를 생각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시골 학교에서 평생을 교사로 일해온 나이 든 남자가 죽음을 앞둔 아내를 위해 도시로 간 아들을 찾아나선다. 그는 일단 도시에 살고 있는 딸 얀홍에게 찾아간다. 건실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것 같던 딸은 사실 가라오케 바에서 일하며 나이 든 고용주의 애인으로 살고 있으며, 아버지에게는 그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한다. 아버지는 은퇴를 앞둔 경찰의 도움을 받아 아들의 소재를 찾아다니지만 노력의 결실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희망은 없어 보인다. <럭셔리 카>는 사회적 비판의식보다는 빠른 속도로 변해가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4] - 가족영화
-
잔인한 현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카불 익스프레스> Kabul Express
카비르 칸/ 2006년/ 인도/ 106분/ 아시아영화의 창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의 은거지로 아프가니스탄을 지목하자 파키스탄은 그동안 지원해온 탈레반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가미한 <카불 익스프레스>는 그즈음인 2001년 11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다섯명이 지프 ‘카불 익스프레스’를 타고 국경으로 향하는 로드무비다. 인도 저널리스트 슈엘과 카메라맨 제이는 가이드 겸 운전사로 고용한 카비르의 안내로 탈레반을 인터뷰하려고 하지만 성과를 얻지 못한다. 카불을 배회하던 그들은 낙오된 파키스탄인 탈레반 임란에게 납치되어 파키스탄 국경으로 향하게 된다. 도중에 세 사람은 임란을 제압할 뻔도 하지만 카불에서 만나 뒤를 따라온 미국인 저널리스트 제시카까지 덩달아 포로가 되고 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몇편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감독 카비르 칸은 극영화로는 데뷔작인 &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3] - 리얼리즘영화
-
흥미진진한 긴장감, 유쾌한 웃음보따리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Memories of Matsuko
나카시마 데쓰야/2006년/일본/129분/아시아영화의 창
<불량공주 모모코>를 만든 나카시마 데쓰야의 신작.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을 받은 화사하고 몽상적인 이미지가 TV광고처럼 흠없는 뮤지컬 장면들과 어우러져 추락만을 거듭했던 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다. 이야기는 20살의 청년 쇼우에서 시작한다. 18살에 가출해 고향을 떠난 그의 앞에 어느 날 아버지가 찾아온다. 30년 전 집을 나가 연락이 끊긴 고모 마츠코가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말과 함께, 아버지는 고모의 집을 정리하라고 말한다. 쇼우는 고모의 짐을 정리하다가 고모의 삶에 대해 하나씩 알아간다. 중학교 선생님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마츠코에게 인생은 핑크빛이었다. 하지만 문제아 학생이 일으킨 절도사건을 수습하려다 오히려 범인으로 몰린 마츠코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집에서도 뛰쳐나온다. 이후 마츠코는 동거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2] - 대중영화
-
한가을의 영화축제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12일 개막작 <가을로>를 시작으로 10월20일까지 아흐레 동안 열린다. 전세계 63개국에서 온 245편의 영화가 선보이는 이번 부산영화제의 가장 큰 특징은 월드 프리미어 작품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대니얼 고든 감독의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을 비롯해 린킨 파크의 조 한이 만든 단편영화 <시드>, 한국영화 <열혈남아> <폭력서클> <경의선>까지 모두 64편이 부산에서 첫 상영을 맞게 된다. 프리미어 작품이 아니더라도 바흐만 고바디, 고레에다 히로카즈, 차이밍량, 왕차오, 가린 누그로호, 모흐센 마흐말바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마뇰 드 올리베이라, 라스 폰 트리에, 난니 모레티, 브루노 뒤몽, 아키 카우리스마키, 마이클 윈터보텀 같은 감독들의 신작을 만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시네필들은 즐거움에 겨울 것이다. 심사위원장인 이스트반 자보, 브루노 뒤몽, 유덕화, 아오이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1] - 거장들의 신작
-
흔히 무당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인 샤먼은, 신비로운 어감과는 달리 좀 싱거운 유래를 가졌다고 한다. 17세기 끝 무렵에 러시아를 여행하던 어느 네덜란드 상인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듣도 보도 못했던 종교의식을 목격한다. 퉁구스족 박수무당이 벌이던 일종의 굿이라 짐작되는 의식이 서구 기독교도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 것이다. 상인의 ‘저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현지인들은 ‘저 사람이 누구냐?’는 말로 착각해 ‘샤먼’이라 답했다고 한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원래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느니 만주어에서 시작했느니 유사한 단어를 증거로 여러 주장이 아직까지 엇갈리고 있지만, 한낱 일개 무당의 이름이 아시아 곳곳에서 수천년을 내려오는 거대한 종교현상을 대표하는 말인 샤머니즘의 어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해프닝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가진 무당에 대한 평소의 생각과 시선은 어떨까. 퍼포먼스 공연장에서 느끼는 것처럼 신기하고 재미있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게 바라보다가, 결
<사이에서>, 인간과 신,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의 존재론
-
섹시함이라는 형용사에 팔다리가 있다면 박시연의 몸매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얼굴은 작고 이목구비는 시원시원하다. 누가 미스코리아에 CF 모델 출신 아니랄까봐, 카메라 셔터 소리에 맞춰 능숙하게 포즈를 취한다. 얼굴 표정도 몸짓도 거침이 없다. 외모가 주는 인상을 조합해보면 새침함과 까탈스러움이 마땅한 결론인데, 박시연이 입을 여는 순간 그런 생각은 자취를 감춘다. 고생을 했을 법한 상황들을 떠올리면서도 너털웃음을 곧잘 터뜨리고는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게 다다. 딱히 뭘 감추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수도 적다. 차분한 성격이라서? “차분한 게 아니라 말투가 느리다. 사실 <마이걸>에서 감정 기복이 심하고 대찬 역할을 맡았는데 내 성격과 너무 달라서 힘들었다.” 그리고 다시 너털웃음.
박시연은 얼마 전 영화 데뷔작 <구미호가족>을 찍었다. <구미호가족>이 개봉하기도 전에 박시연이 다음 영화 <일편단심 양다리>에 재희와 함께 주인
아이 예뻐라, 구미호, <구미호가족>의 박시연
-
“대륙이 할리우드로 보낸 최고의 선물.” <타임>은 장쯔이를 그렇게 평했다. 장쯔이가 신작 <야연>과 함께 9월18일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그를 숙소 W호텔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 고된 무용 수업을 견디다 못해 베이징댄스아카데미를 도망치기도 했던 소녀는 할리우드를 놀라게 한 배우로 성장했고, 지금은 아시아 스크린을 호령하는 여신으로 거듭났다. 쿠키를 오물거리며 쾌활하게 웃는 장쯔이의 얼굴은 스물일곱살의 8년차 여배우보다는 <와호장룡>의 완을 연상시키는 소녀의 풋풋함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야연>의 화면에 나타난 그는 어느 때보다 고혹적이고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자아낸다. 장이모, 리안, 왕가위, 로우예, 스즈키 세이준 등 당대의 거장들과 작업한 장쯔이는 대륙의 대표 흥행감독 펑샤오강의 영화에서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궁금했다.
-오랜만에 중국에서 촬영했다. 펑샤오강 감독과도 처음 작업인데 수많은 시나리오 중에
<야연>의 장쯔이
-
‘중국의 스필버그’ 펑샤오강이 한국에 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대륙 인민을 웃고 울리던 흥행감독 펑샤오강은 <야연>으로 처음 국내 관객과 만난다. <야연>은 중국에서 개봉 4일 만에 700만달러를 벌어들였고, 최종적으로 2500만달러 이상의 박스오피스 성적을 거둘 전망이다. 장이모와 첸카이거가 무협대작으로 깜짝흥행을 선보였다면 펑샤오강은 <갑방을방> <몰완몰료> <수기> <따완> <천하무적>을 비롯한 히트작을 양산하며 근 10년 가까이 중국을 대표하는 인기감독으로 군림했다. ‘설영화, 블랙코미디의 일인자’였던 펑샤오강이 웃음기를 지워버린 비극 <야연>을 만든 심경이 궁금했다. W호텔에서 만난 펑샤오강은 처음 만든 비극 <야연>과 서민적인 영화의 중요성에 대해 느릿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2000년대 초반 무협대작은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게다가 주특기인 코미디를 배제하고 고전 비
<야연> 감독 펑샤오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