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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대추리와 도두리 마을 주민들의 삶을 담은 만화전 ‘평화를 심는다’가 노동만화네트워크 ‘들꽃’의 주최로 열린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며 대추리 마을 담벼락에 벽화를 그렸던 ‘들꽃’ 소속 만화가들이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의 삶을 여러가지 표현기법과 캐릭터화를 통해 표현할 예정이다.
정재훈, 신성식, 김현숙, 황우 등 12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선전만화나 교육만화가 아닌,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주민들의 모습을 담는다.
원본 전시와 함께 만화책을 펴내고 18일에는 대추리, 도두리 마을 주민들과 함께 평화 마을 만들기를 기원하는 만화조형물도 만든다.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전시실에서 17일부터 20일까지 열린다.
‘대추리’사람들 삶 만화로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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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2일, 한-미 FTA를 반대하는 집회가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개최될 예정인 가운데 영화계 또한 이날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 ‘문화침략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에 따르면, 이날 집회에서는 “협상에서 미국이 보여준 쇠고기 수입요구 및 스크린쿼터 현행유보 등 오만방자한 개방 압력 요구를 폭로하고, 9월부터 진행한 한미FTA 서명 운동의 성과를 알려 국민들의 동참과 지지를 촉구할” 예정이다. 11월15일 현재 서명운동에 참여한 국민은 모두 110만명. 6천5백여명의 영화인들도 이번 서명 운동에 동참했다. 영화인대책위는 특히 지난 10월23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됐던 한미FTA 4차 협상 과정에서 한국정부가 다시 스크린쿼터를 늘릴 수 없도록 한 미국의 요구를 강도높게 비판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시행 이후에도 계속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한국영화인들에 대한 해외 영화인들의 지지서명도 잇따르고 있다. 일본의 영화발전 단체인 일본영화재건회의
영화인들, 한미FTA 저지를 위한 총궐기대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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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광고보다도 참신한 아이디어로, 때론 본 영화보다도 더 극적인 구성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예고편들.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올해의 영화 예고편 11을 소개합니다.
<애정 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메인 예고편
감독: 김성훈
배우: 백윤식, 봉태규
시놉시스: 자신만의 개똥철학 자기 합리화에 여념이 없는 짠돌이 동철동과, 홀아비 밑에서 별난 진화의 과정을 밟으며 자생력을 키운 동현. 어느 날, 중증 애정결핍 증세를 보이는 두 남자가 살고 있는 집에 묘령의 이혼녀 미미가 이사 오게 되는데… more
자고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란 용서하며 감싸주고, 존경하며 모시는 관계라며 부자유친의 덕목을 최고로 여겨온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도저히 부자관계라 할 수 없을 한 부자가 있었으니, 바로 <애정결핍 두 남자>. 영화 속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버무려놓은 이번 예고편을 통해 그들 부자의 부자유감 모습을 공개한다. [예고편 보기]
<플라이 대디>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올해의 영화 예고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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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썸니아> 11월19일(일) SBS 새벽 1시5분
죄책감은 불면의 밤이 되어 영혼을 잠식한다. 실수로 동료를 죽인 도머(알 파치노)에게 모든 사태의 발단을 제공한 것은 알래스카의 외딴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도머를 사건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프레드 역을 맡은 것은 니키 캣이다. 우직한 지방 경찰로 등장하는 그는 영화가 무거워질 때마다 무뚝뚝한 순박함으로 중량감을 덜어내는 재기를 발휘했다. 7살 때 연기를 시작한 캣은 TV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아역배우의 길을 걸었지만, 첫 고정 역할을 따낸 드라마가 조기종영되는 불운을 겪었다. 선이 굵고 다소 호전적으로 보이는 외모 탓이었을까. 성인이 된 뒤 그에게 안겨진 역할들은 대부분 두 가지였다. 건달이거나 흉악범이거나. 하지만 악역은 그에게 기회가 됐다. <베이비시터>의 교활한 10대, <서버비아>의 포악한 전직 공군, <타임 투 킬>에서 소녀를 처참하게 강간하는 건달 등 그는 모두가 마다할
[앗! 당신] 악역, 그 이상의 배우, 니키 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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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작가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영상은 어둑한 골방의 이미지다. 독방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채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는 고독한 예술가. 2005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 전세계 작가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그들이 모여 발산하는 이미지의 덩어리는 오히려 ‘고독한 전사’에 가까웠다. 특히 감동적인 강연을 들려주었던 오에 겐자부로, 응구기 와 시옹오, 조은 등은 더더욱 그랬다. 오에 겐자부로는 조국의 헌법에 새겨진 참혹한 역사의 문신과 싸우고 있었고, 응구기 와 시옹오는 영어를 중심으로 구축된 언어제국주의와, 조은은 가족의 삶에 뿌리박은 기억의 흔적과 투쟁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절실한 싸움의 기억으로 스스로의 몸을 자발적으로 결박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싸움의 필연으로 칭칭 휘감아야만 오히려 한껏 자유로울 수 있는 이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 역시 그러한 문학의 정치성을 작품 깊이 끌어안는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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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영화를 안 보다가 일주일새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귀향>과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에 부는 바람> 두편을 연거푸 봤다. 평소 ‘거장’으로 알려진 감독들답게 두 영화 모두 ‘베리굿’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두 감독을 동시에 떠올려본 적이 없다. 건조하고 진지한 켄 로치와 야하고 따뜻한 알모도바르는 착한 학교 선생과 유능한 바텐더만큼의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 영화를 나란히 본 탓인지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 같은 걸 느꼈다. 그건 바로 말하는 방식의 유사성인데, 나는 이게 ‘거장의 화법’이 아닐까 싶다.
먼저 켄 로치의 화법. 그는 영화 포스터에 ‘왼쪽에 서서 세상을 보는 시네아스트’라고 소개돼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는 ‘왼쪽에 남아서 사람을 응시하는 사람’이다. 이 차이는 이런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왼쪽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 세상이 오른쪽으로 기울고, 기운 만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거장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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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11월19일(일) 오후 2시20분
윌리엄 마치의 소설을 영화화한 <나쁜 씨>는 1956년 개봉 당시는 물론이고 여전히 논쟁적인 소재를 다룬다. 소설과 영화는 인간의 나쁜 씨가 세대를 걸쳐 유전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건 그리 단순하게 다룰 문제가 아니다. 나쁜 씨는 반드시 나쁜 수확으로 이어질까? 나쁜 씨란 무엇을 기준으로 할까? 어쩌면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분석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장 이면의 사회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함의를 밝히는 것이다. 어쨌든 <나쁜 씨>는 충격적인 소재 덕분에 85년에 리메이크된 이래, 2007년 리메이크를 앞두고 있다.
크리스틴(낸시 켈리)에게는 8살 된 딸 로다(패티 매코맥)가 있다. 군 대령이던 남편 케네스(윌리엄 호퍼)가 워싱턴으로 잠시 떠난 뒤, 크리스틴은 로다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챈다. 로다는 친구 클로드가 자신을 제치고 상을 탄 것에 대해 심한 질투심을 표현하는데, 때마침 클로
악은 피를 타고 흐른다, <나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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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자리에서 몸을 빼기 전에 천장은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가을은 온데간데없이 다짜고짜 겨울이니, 출근준비를 하기 위해 이불을 들추는 일이 이렇게 고될 수가 없다. 목도리와 아주 얇지 않은 점퍼를 걸치고 집을 나서면 코가 싸하게 식는 느낌이 든다. 내가 개였다면 젖은 코는 진작에 얼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옷깃을 여미고, 필요 이상으로 어깨를 웅크리면, 지나친 컴퓨터 사용으로 인한 통증이 목 뒤부터 시작해 척추를 압박한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낙엽이 얼굴을 냅다 몇대 친다. 정신이 들기는커녕 더욱 몽롱해진다. 여기는 어디더라, 갑자기 눈앞의 장소가 낯설게 느껴진다. 이곳이 아닌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몇 년째다. 날이 싸해지는 11월이면 언제나 집을 나서면서 외국의 어느 낯선 도시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외국에 나가는 일이 주로 이 계절의 행사였기 때문이다. 성수기인 여름이 지나고 부산영화제도 끝나고서야 여름 휴가를 쓰곤 했기 때문에 늘
[오픈칼럼] 어디라도, 여기가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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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명동에 나갔다가 흥미로운 행렬을 보았다. ‘청소년 자유선언’ 페스티벌에 나온 중고생들의 퍼레이드였다. 피부도 뽀송뽀송하고 골격도 채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이 <스크림>에 나오는 살인귀의 탈, 일제식 교복, 유관순을 흉내낸 듯한 치마저고리 등을 걸친 채, ‘조삼모사’를 패러디한 피켓을 들고 있었다. 피켓에 적힌 내용은 진부했다. 체벌금지, 성적에 따른 차별금지, 두발제한 철폐…. 내가 학교를 다니던 10년 전과 아무것도 바뀐 게 없잖아? 하지만 이내 부끄러움이 들었다. 적어도 이 아이들은 ‘발언할 권리’를 갖고 사회를 향해 말하고 있잖은가? 나는 무엇을 했지? 난, 아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울한 세대다. 98년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98학번임을 내세운다는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우리 세대엔 별다른 특징이 없다. 우린 어떤 혁명이나 사회적 동요를 거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기 2년 전에 연대 사태가 일어났지만, 학업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이창] 사라진 세대를 위한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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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노이 알비노이>를 봤다. 시사회날은 갑자기 일이 생겨 극장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고 2주 전에는 15분 늦었다는 이유로 매표소에서 거부당했다가- 12분 늦게 갔는데 매표소는 비어 있었고 3분 뒤에 나타난 한 남자가 영화 시작 15분 뒤 입장불가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감독이 좋아한다는 <심슨가족>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결국 지난주에 해내고야 말았다. 므흣.
게으른 내가 ‘삼고초려’로 노이군을 모시게 된 건 아이슬란드에 대한 동경 때문이다. 시규어 로스, 아키 카우리스마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등등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느낌, 살얼음이 깔린 듯 냉담하면서도 잔뜩 움츠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생기(그 정도의 생기는 적도 근처 사람들에게는 결코 감지될 수 없는 것이다) 같은게 좋았고 그래서 북유럽의 집결판 아이슬란드는 근래 들어 나에게 가장 큰 로망이 됐다.
사실 <노이 알비노이>가 대단히 재미있는 영화는 아
투덜양, <노이 알비노이>를 보고 가슴에 막막함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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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군인이었던 저희 아버지는 마흔아홉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아주 오랫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병에 대한 공포보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미 잊혀진, 전쟁에 대한 공포가 더 컸습니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것은 전쟁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저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온 적이 없습니다. 저는 병들어 신음하는 아버지가 창피했습니다. 저는 그런 불효자였습니다. 불효자인 제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못한 효도를 이제 시작하려 합니다. 저희 집에, 아버지의 집에 제 친구들을 마음껏 초대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람마다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듯이 사회에 봉사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를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곧 현실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신동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방문자>는 4분여의 롱테이크로 여호와의 증인인 청년이 법정에서 진술하는 장면을
[편집장이 독자에게] 총을 잡지 않을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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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문장으로 말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배우 김혜수는 그중 하나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마침표에 깃발을 꽂을 때까지. 지저귀듯 김혜수가 쏟아내는 단어들은 고른 리듬으로 방울져 떨어지다가 이따금 따르릉 꾸밈음을 섞는다. 바흐 평균율 피아노 조곡을 한 옥타브 올려서 듣는다면 비슷할 것이다. 영화 <타짜>의 형식은 김혜수가 분한 정 마담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다. “3년 동안 모은 돈을 잃었을 때 고니는 문득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대요.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모두 겪는 일인데.” 유들유들한 김혜수의 구연(口演) 속에서 영웅 고니(조승우)는 어쩐지 동화 속 ‘빨간 모자’처럼 작고 미숙해진다. <타짜>는 정 마담의 ‘무대’ 위 모습만 보여준다. 번민과 망설임은 어디까지나 막후의 일이다. 정마담은 말하자면 세상이라는 관객을 속여 넘기려는 무모한 배우다. 극중에서 그녀의 시간은 조각나 있다. 고니를 잃어버리고 재회하기까지 가장 괴로웠을 시기의 정 마담은 슬쩍
천생 홍일점, <타짜> 배우 김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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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사냥>의 아버지 버전
이 이상한 광경을 보면서 나는 문득 이것이 배창호의 영화라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은 이 영화가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여기서 배창호가 다루는 남성들이 한국영화 안에서 이상할 정도로 유약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는 한국영화가 1970년대에 호스티스 에로물과 하이틴 로맨스로 거의 쑥밭이 된 다음에 데뷔한 1980년대의 첫 번째 감독이다. 그때 그는 남성성의 정체성이 위기에 빠졌을 때 등장한 뒤 거의 보잘것없는 남자주인공들을 내세워서 그 안에서 남성성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세 번째 영화 <적도의 꽃> 이후 배창호의 남자들은 우유부단하거나, 수줍거나, 용기가 없거나, 정신지체이거나, 가난하다. 배창호에게 여자는 숭배받아야 할 성모마리아거나, 아니면 버림받아야 할 창녀거나 둘 다이다. 그가 <황진이>를 찍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 다음 그는 1990년대에
배창호는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 <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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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글의 다짐에 대한 고백부터. 나는 이 글을 배창호를 구하기 위해서 쓴다. 배창호의 새로운 영화 <길>이 개봉했다. 그렇다. 그런데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것은 이 영화가 아니라 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였다. 이상할 정도로 대부분의 글들이 마치 이 영화를 시네마테크에 가서 본 고전영화처럼 어색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런 다음 배창호와의 인터뷰는 회고전을 치르는 감독에게나 던져야 할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길>은 1976년이 아니라 2006년에 개봉한 영화다. 그리고 배창호는 올해 (개봉된 영화를 만든 감독들을 그냥 떠오르는 대로 열거하자면) 조창호, 김대우, 김지운, 류승완, 홍상수, 김기덕, 봉준호, 송해성, 박찬욱과 함께 우리 시대에 지금 활동하고 있는 감독이다. <길>은 <괴물>이 개봉된 해 가을에 개봉한 영화이다. 그에게 오마주를 바치려는 것은 이상한 태도이다. 그는 이제까지 만든 영화들보다
배창호는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