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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운다’라는 말들을 흔히 쓴다. ‘멀쩡한 직장’이란 무슨 뜻인가? 짐작건대 당분간 망할 염려가 없고,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월급을 꼬박꼬박 주고, 금상첨화로 남보기에도 그럴듯한 일터라는 뜻일 게다. 좋다. 그 직장은 멀쩡하다고 해두자. 그런데 멀쩡한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멀쩡한가? 직장이 멀쩡한 한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재미없고, 아무리 스트레스 받고, 아무리 체질과 적성에 안 맞아도 절대로 때려치워서는 안되는가? 오히려 직장이 멀쩡할수록,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소모품일 가능성이 더 많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내가 일했던 회사들은 다 그런 의미에서 멀쩡했다. 그러나 내가 그랬듯이, 그 안에서 같이 일한 20대들은 40대보다 더 영악한 처세술 칩을 내장한 채 50대보다 더 겉늙은 표정 속에 은신해 있다가는, 하루하루 시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리 그렇게 해본들 내가 앉았던 자리가 그랬듯이, 그들이 비운 자리는, 몇초도 안되어 메워졌다.
20대 초반에 입사한
[최보은의 돈워리 비해피] 인생, 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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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맨>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던 한국형 슈퍼히어로 장르의 괴작이다. 그 처참한 실패를 이듬해 <영구와 땡칠이>(1989)로 만회하긴 했지만 <바이오맨>은 ‘SF 성인 액션 장르’라는 전대미문의 시도였다. 아버지와 공학박사인 형 영일(남성훈)은 비밀리에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만 그 반도체 설계도가 괴한들에게 탈취되고 만다. 껄렁껄렁한 말썽쟁이 차남 도일(박중훈)이 그것을 되찾으려 하다 괴한들의 총격에 쓰러진다. 영일은 죽기 직전의 도일을 최첨단 과학을 총동원하여 가공할 능력을 지닌 사이보그 인간으로 재생시킨다. 그때부터 도일은 인터폴 수사요원 석도(신우철)와 신비스러운 여자 수지(신미아)의 도움으로 악당들을 일망타진하러 나선다. 바로 <바이오맨>은 애니메이션 장르를 넘어 <우뢰매>와 <슈퍼 홍길동> 시리즈로 승승장구하던 김청기 사단의 야심작이었다. <터미네이터> <람보> <로보캅&
[박중훈 스토리 5] 악어꼬리에 맞고 지뢰에 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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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아카데미 시즌을 전후로 흥미로운 미국영화들이 많다. 그중에서 시간이 좀 지났지만 배우들의 황홀한 연기를 제외하곤 더 말해지지 않은 영화 <다우트>, 닉슨 연기로 호평을 받은 프랭크 란젤라에 대한 관심 이외에 다른 초점이 부가되지 않는 <프로스트 vs 닉슨> 두편에 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두 영화는 서로 의식하고 맞닿아 있지는 않지만 <프로스트 vs 닉슨>을 보면서 뒤늦게 <다우트>에 관해 더 깊게 생각해볼 계기를 얻었고 둘을 짝지어 어떤 문제를 말해도 좋겠다는 판단을 갖게 됐다.
<다우트>는 1964년 브롱크스 지구에 있는 성 니콜라우스 가톨릭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이 학교의 근엄한 원장 수녀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는 폴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라는 자유분방한 신부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때 젊은 제임스 수녀에게서 폴린이 도널드라는 흑인 소년을 추행한 것 같다는 보고를 받는다. 알로이시스는 폴린의 죄를
[전영객잔] 당신의 확신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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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레슬러>가 감흥을 일으킨다면 그건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의 내용에 미키 루크라는 배우의 지난한 삶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키 루크의 지나온 삶을 아는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 사이에는 반응에서 사실 큰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미키 루크가 아니라 니콜라스 케이지가 이 역할을 했을 때 영화의 감동이 덜했을 거라면 그런 이유에서다. <더 레슬러>는 미키 루크라는 배우의 일종의 자기반영적 영화라고 할 만하다.
우리가 자기반영성(reflexivity 또는 self-reflexivity)이라는 말을 깊이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이때 오래전에 국내 번역된 로버트 스탬의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은 든든한 참고서가 될 것 같다), ‘매체 혹은 배우 또는 그 무엇이라도 자기의 과정과 장치를 반영하고 돌아보는 성질’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자기반영성은 환영주의(illusionism)의 반대편에서 좀더 현대적
[정한석의 블랙박스] 그의 기이한 자기반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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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분노의 주먹>의 첫 장면을 떠올렸다. 사각의 링에서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다가 추락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주인공은 유사한 인물이지만 자신의 몰락에 대처하는 방식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더 레슬러>는 퇴물 레슬러 랜디 램(미키 루크)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램 잼’을 하기 위해 로프 위로 올라가 링 바닥을 향해 몸을 날려 공중에 뜬 순간 화면이 정지되고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이 낙하를 통한 비상의 순간을 포착한다면, <분노의 주먹>의 첫 장면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하락하는 삶의 한 국면을 도려낸다. 마틴 스코시즈는 복싱계를 은퇴한 중년의 제이크 라모타(로버트 드 니로)가 클럽 분장실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연습하는 장면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제이크는 자신의 전성기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다음 “그것이 엔터테인먼트다”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이들의 상반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에 ‘엔터테
[영화읽기] 호메로스의 영웅처럼 숭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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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작 <남자이야기> 가 티저 예고편을 공개하며 그 베일을 벗었다.
<모래시계> 의 송지나 작가의 복귀작이자, 한류스타 박용하의 안방극장 컴백작으로 촬영전부터 큰 화제를 일으켰던 KBS 월화드라마 <남자이야기>의 첫번째 티저 예고편이 공개되었다.
첫번째 예고편의 주인공은 박용하가 맡은 ‘김신’이다.
김신은 세상과 돈에 관심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던 중 어느 한 순간 돈, 사랑, 가족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결국 살인미수죄로 교도소에 수감된 김신은 그 곳에서 세상에 대해 눈뜨고 거대한 진실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교도소 안에서 돈이 지배하는 세상과 맞짱 뜨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기존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벗고 진짜 남자로 돌아온 박용하는 예고편 속에서 강렬한 눈빛과 거친 액션 장면을 선보여 극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앞서 제작보고회 현장에서 송지나 작가는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에 이어 이번 &
<남자이야기>티저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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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일지매> 후속으로 오는 4월 15일(수) 첫방송 예정인 MBC 수목 미니시리즈 <신데렐라 맨>(극본 조윤영, 연출 유정준)의 두 주인공 권상우와 윤아의 극중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공개된 사진은 큰 가방을 메고 동대문 시장에서 일하는 오대산(권상우)의 모습과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가게 '이스턴'에 홀로 앉아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슬픔에 잠긴 서유진(윤아)의 모습이다. 극중 유진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스친 적이 있는 대산과 유진은 이스턴에서 재회하고, 대산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 유진을 도와주려 하면서 두 사람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된다.
실제 나이 14세차인 권상우와 윤아는 다정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며 드라마 속에서 보여줄 커플 호흡을 기대하게 했다. 권상우는 "1인 2역이라 몸은 힘들겠지만 재밌는 드라마가 될 거 같다"고 첫 촬영 소감을 전했다. 미니시리즈 첫 도전인 윤아는 "좋은 분들과 만나게 돼서 기쁘고, 많이 배우려는 자세로 열심히
<신데렐라 맨> 권상우-윤아, 잘 어울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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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출연 중인 배우 구혜선이 소설 <탱고>를 출간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탱고’라는 음악을 듣고 구상을 시작했다는 소설 <탱고>는 두 번의 사랑을 통해 여인으로 성숙해가는 여주인공의 성장통을 그린 작품. 구혜선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진하고 감미로운 이야기가 탱고를 복선으로 리드미컬하게 펼쳐지는 소설을 읽다보면 이제껏 알지 못했던 배우 구혜선의 색다른 모습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탱고>는 소설과 일러스트를 결합한 ‘일러스트 픽션’으로, 구혜선이 직접 그린 일러스트 40여 컷이 수록되어 있다. 4월 1일 정식 출간되며, 3월 17일부터 예약 판매를 시작한다.
구혜선 작가 데뷔, 일러스트 픽션 <탱고>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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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남녀>는 음식을 매개로 가족간의 사랑, 우정,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팔보채처럼 버무려놓은 리안 감독의 영화다. 마지막에는 유쾌한 깜짝 반전까지 양념처럼 얹어놓은 리안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 나는 ‘요리가 나오는 최고의 영화’로 <바베트의 만찬>과 이 영화를 꼽는다. 드라마도 완벽하게 볼 만하지만, 중국 음식사의 사료로 써도 될 만큼 의미있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오프닝부터 심하게 위를 자극하는 장면이 쏟아진다. 아버지 ‘주사부’가 세딸들과의 만찬을 위해 요리를 한다. 나는 이 장면들이 중국 요리 칼질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넓적한 중화칼 하나로 섬세한 온갖 칼질의 세리모니가 펼쳐진다. 여기다 치이익 하는 기름 요리의 폭발적인 음향이 더해져 넋을 빼놓는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영화처럼 ‘5.1채널로 봐야 할 영화’라고 주석을 다는 이유다. 이 영화의 출현 이후 쏟아진 아시아의 수많은 음식영화와 드라마가 이 영화의 ‘아류’라는 주장은 바로 이
[그 요리] 중국 요리 칼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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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홍 감독은 처음에 많이 쑥스러워했다. 그럴 만도 하다. 2001년에 <세이 예스>를 완성하고 그 뒤로 소식이 없었으니 근 8년 만에 매체를 접촉하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잘됐으면 <스턴트맨>을 2005년쯤 개봉하고 또 다른 전환점을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촬영을 80%나 해놓고 결국 개봉하지 못했다. 그때는 “솔직히 영화를 안 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김성홍 감독은 <실종>으로 조용히 돌아와 있다. 시간은 확실히 많이 흘렀고 영화판도 많이 바뀌었다. 그의 이름을 거꾸로 쓰는 이가 있는가 하면 누구냐고 과거를 묻는 기자도 있단다. 그는 <투캅스>의 각본을 썼고 <손톱> <올가미> 등 90년대 개성있는 호러 및 스릴러 장르영화의 길을 개척했던 사람 중 하나다. 한번 입이 터지자 지나간 시간을 묻어버리겠다는 듯 그의 말은 봇물같이 쏟아졌다.
-사진 찍으니 쑥스러운가.
=사실 어떤 경우가 있느냐
[김성홍] “이건 난도질 영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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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진흥위원회의 시네마테크 공모제 전환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한 관객이 1천명을 넘어섰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기간 동안 시작된 이 서명운동은 시네마테크 운영진이 아닌 관객의 자발적인 참여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추계예술대학교 미술학부 동양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강민영씨는 이 서명운동을 이끌었던 관객 중 한 사람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네마테크를 찾았던 그녀는 “지금처럼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운 마음에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 영화학을 전공하는 줄 알았다.
= 미대에 다닌다고 하면 다들 의외라고 한다. 미술을 어렸을 때부터 했는데, 대학에 들어오면서 영화감독이 꿈이 됐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면서 영화 관련 공부도 하는 중이다.
- 시네마테크는 언제부터 찾게 됐나.
= 소격동에 있을 때부터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갤러리를 찾아다니다가 그 동네에 가게 됐는데, 극장이 있더라. 여기에도 극장
[spot] “잡지는 벌써 지원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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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몽족은 처음 들어봤어요. 인류학에 대한 제 무지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뭘요. 우리는 소수민족이어서 아는 사람들이 사실 별로 없어요. 지금부터 배워나가시면 되죠 뭐. 그리고 흐몽족이 아니라 몽족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영어로는 Hmong이라고 쓰기에 ‘흐몽족’으로 읽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프랑스 애들은 제일 앞에 오는 H를 묵음으로 하던데. 제 친구 중에 프랑스 애가 하나 있는데 걔는 아침에 만나면 만날 ‘알로! 알로!’ 그랬죠. 킥킥.
=아… 네.
-제가 시답잖은 소리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몽족은 어디서 온 민족인가요?
=몽족은 주로 중국 남서부와 동남아시아 북부의 산악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민족이에요.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타이 북부 지방에서 모두 우리 몽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백몽족과 청몽족이 따로 있는데 언어는 좀 다르지만 의사소통은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몽족의 역사는 꽤 깊습니다. 한(漢)족이 들이닥치기 이전부터
[가상 인터뷰] <그랜 토리노>의 몽족 소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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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저명한 문학교수 데이빗(벤 킹슬리)은 오래전 한번의 결혼 실패 끝에 독신이 되었고, 지금껏 완전한 자유라 여기며 많은 여자들을 만나왔다. 그중에는 자신의 수업을 들은 여학생들과의 관계도 있다. 그런데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를 만나자 데이빗의 모든 것이 바뀐다. 둘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그녀에게 느끼는 데이빗의 감정은 집착이 된다. 콘수엘라는 그런 데이빗의 태도를 견디지 못한다. 결국 헤어지게 되는 두 사람. 하지만 2년 뒤 콘수엘라가 문득 돌아온다. 그녀는 왜 돌아왔을까.
<엘레지>는 필립 로스의 단편소설 <죽어가는 동물>을 원작으로 했다. 우선, 니콜 키드먼이 출연했던 <휴먼스테인> 등 이미 영화화된 필립 로스의 세계와 비교해보는 방식이 있을 것 같다. 각본 역시 <휴먼스테인>을 작업했던 니콜라스 메이어가 맡았다. 한편 “필립 로스의 작품은 누구나 감추고 싶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수많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불가항력의 덫들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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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 남자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포드 자동차에서 일하다 은퇴한 그는 요즘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편 좀 참회시키라는 죽은 아내의 유언 때문에 어린 신부(크리스토퍼 칼리)가 매일 성가시게 찾아오고 버릇없는 손녀는 월터의 보물인 72년형 ‘그랜 토리노’를 노린다. 이웃들은 슬럼화되는 동네를 못 견디고 교외로 이주했다. 빈집을 채우는 건 시끄럽고 말도 안 통하는 몽족 이민자들이다. 그런데 이웃집 소년 타오(비 방)를 갱단의 협박으로부터 구해준 것을 계기로 몽족 이웃과 월터는 별난 우정을 쌓아간다. 문제는 여전히 타오의 가족과 월터를 노리는 갱단들이다.
그랜 토리노는 1972년도에 포드가 생산한 자동차다. 크다. 시끄럽다. 기름도 많이 든다. 미국의 도로를 점유한 일본과 독일의 날씬한 자동차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랜 토리노는 미국적인 자동차다.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 과거의 영화다. 월터 코왈스키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인간을 구원해야 한다 <그랜 토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