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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지방선거와 눈앞으로 다가온 5월 총선으로 델리의 극장 간판은 낯선 얼굴의 주인공들로 가득하다. 스타급 배우들 대부분이 정치유세 현장으로 달려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화려했던 지난 시절을 되찾기 위해 정부와 싸우는 지방 왕족 패밀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Gulaal>이 그나마 관객을 모은다기에 영화관을 찾았다. 3월16일 오후 1시10분 뉴델리의 프리야 시네마 매표소 앞은 비교적 한산했는데 같은 줄에 서서 기다리던 어느 대학생과 주고받은 가벼운 인사가 인터뷰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최근에 본 영화 중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두번이나 볼 만큼 괜찮았다는 얘기를 듣자 <Gulaal>을 위해 준비해간 예상 질문들은 머릿속에서 이미 지워지고 있었다. 영국인 감독이 인도인 스탭과 배우를 기용해서 만든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대해 과연 인도의 관객은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호기심이 일었다. 우리는 매표소 직원을 코앞에 두
[세계의 관객을 만나다-델리] 화장실 다이빙 해석의 여지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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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조승희 프로파일’이다.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과 그 사건의 범인인 조승희의 심리를 파악하고자 노력한 논픽션이다. 후안 고메스 후라도는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로, 사건 직후부터 현장취재를 통해 이 책을 완성했다.
2007년 4월16일 새벽 4시59분부터 오전 9시51분까지 조승희의 행적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 가장 눈에 띈다. 조승희의 첫 번째 살인을 일별한 뒤, 총기난사사건을 막을 수 있는 지점은 없었는지를 차근차근 짚어간다. 시종일관 강조되는 것은 조승희가 대화 상대가 없는 외톨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승희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버지니아공대 노리스홀에서 한 말은 단지 “안녕, 잘지내?”(Hi, how are you?)가 전부였다. 이 책의 말미에서는 그 한마디가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오싹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맞는다. 설명도 변명도 아닌, 일정한 거리를 지키는 르포타주 특유의 서술 방식은 이 책의 가장 돋보이는 매력 중 하나. 또한 이 책은 미국에서 사는
[도서] 조승희 사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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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연상시키는 <마담 보베리>는, 영국 작가 포지 시먼스가 그리고 쓴 ‘그래픽 노블’이다. 좀더 정확하게는 ‘그래픽+노블’이 맞겠다. 말풍선이 등장하는 만화와 줄글이 한 페이지 안에 뒤섞여 전개되기 때문이다. 제목이 말하듯 <마담 보베리>는 <보바리 부인>의 줄거리에 상당 부분 기대어 간다. 하지만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이야기라서 패러디나 각색, 그 어떤 말로도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패러디+각색+오리지널’이라고 하면 또 모를까.
이야기는 젬마 보베리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화자는 주베르라는 이웃 남자다. 평소 젬마를 흠모했던 주베르는 유품에서 일기장을 훔쳐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일기문, 주베르의 독백, 몹쓸 상상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얼핏 젬마의 삶은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엠마의 삶과 복사판이다. 영국인 젬마는 찰스 보베리라는 이혼남과 결혼해 프랑스 노르망디로 건너왔다. 노르망디에서 젬마는
[도서] 보바리 부인 아니죠, 보베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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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를 알면 더 재밌다 지수 ★★★★
하드보일드가 좋다 지수 ★★★★
요 몇년 새 재밌는 소설을 쓰는 미국 소설가들을 새로 꽤 발견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조너선 사프란 포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의 주노 디아즈, <사랑의 역사>의 니콜 크라우스… <유대인 경찰연합>의 마이클 셰이본도 그중 하나다.
대체역사소설인 <유대인 경찰연합>은 SF와 판타지 소설에 수상하는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알래스카에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었다는 가정 아래 이야기가 진행된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해 알래스카에 유대인 정착촌을 세운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런 계획에 따라 알래스카 싯카 특별구에 유대인들이 자리를 잡는데, 60년 뒤에 미국 본토에 땅을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 아래서다.
주인공인 형사 랜즈먼은 싯카 특별구에
[도서] 코언 형제의 차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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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한국 미술계의 화두는 ‘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694호 지면을 통해 소개한 <헨리 불 컬렉션: 손으로 말하다 전>을 비롯해 ‘손’을 주제로 한 17명 작가의 대형 그룹전이 4월5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The Great Hands: 손길의 흔적>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창작 도구로서의 작가의 손을 탐구하고 경외하는 전시다. 헨리 불의 컬렉션과 의도하는 바는 같지만, 접근 방식은 완전히 대칭을 이룬다는 점에서 이 전시는 흥미롭다. 불이 손이 처한 상황과 배경으로 창작의 과정을 유추하는 반면, 이번 전시는 노동의 흔적이 정직하게 드러난 작품들을 내걸어 손의 쓰임새를 강조한다.
다양한 크기의 삼각형 조각들을 일일이 한지로 감싸 빈틈없는 공간감을 연출해낸 전광영 작가의 작품, 비틀고 구부린 못들로 독특한 풍경을 만드는 이재효 작가의 작품, 싸리나무를 깎고 다듬는 심수구 작가와 돌을 직접 자르고 가공하고 색을 덧입히는 정광식 작가의
[전시] 엄마 도시락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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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애니 레녹스란 이름은 70년대생들에게 작동하는 향수다. 유리스믹스를 떠나 솔로로 활동한 90년대의 그녀를 동시대적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앨범, ≪The Annie Lennox Collection≫이란 제목이 겨냥하는 대로 그때 그 시절의 감수성이 울컥, 역류하게 된다. ‘솔로 17년 만의 첫 베스트 콜렉션’이라는 홍보문구도 한몫한다.
그런데 그건, 일종의 오해다. 수록된 14곡 중 12곡은 이미 발표된 싱글이고 나머지 2곡은 새로운 커버곡이다. 애쉬의 <Shining Light>와 킨의 <Closer>(제목은 가사인 ‘Pattern of My Life’로 바뀌었다)인데, 이걸 듣노라면 그녀가 과거지향적인 이 앨범에 어떻게든 지금 여기의 동시대성을 부여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귀에 먼저 들리는 건 <Little Bird>나 <Why> <A Whiter Shade Of Pale> <Lo
[음반] 현재진행형 그녀, 애니 레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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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아이돌>의 8번째 시즌이 시청률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의 질문은 이거다. 언제쯤 시즌1 우승자 켈리 클락슨에 비견할 만한 스타가 탄생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낮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힘찬 목소리와 전형적인 옆집 아가씨 이미지를 지닌 클락슨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역사를 만들었다. 클락슨은 지난 세장의 앨범을 5600만장이나 팔아치우고 두개의 그래미도 휩쓸었다(이만하면 리얼리티쇼 우승자의 아우라는 이미 벗은 거나 마찬가지다). ≪All I Ever Wanted≫는 최고 히트작인 2집 ≪Breakaway≫로의 복귀다. 가창력으로 힘있게 밀어붙이는 틴 팝/모던락 계열의 곡들이 많다. 듣기좋고 어울린다. 첫 싱글 <My Life Would Suck Without You>는 발매 2주 만에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빌보드 역사상 최고의 신기록이다.
[음반] 리얼리티쇼의 아이돌은 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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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숨기고픈 과거는 있을 거다. 상대가 사랑스럽지만 까탈스러운 연인이라면 더더욱.
뮤지컬 <마이 스케어리 걸>을 보면서 비로소 이 공연이, 아니, 원작인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부터 사랑하는 이에게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 한 조각, 그 엽기적이면서도 예민한 정수를 다룬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생애 처음 사랑을 느낀 상대가 황대우처럼 쪼잔하고 의기소침하다면 허벅지의 반점 하나라도 철저하게 숨기고 싶지 않을까. 게다가 그 나이에 키스 한번 못해본 남자라니. 우리의 과오가 이미나의 그것만큼 살벌하지 않더라도 그에겐 비소보다 치명적인 독극물이 될 게 분명하다. 예컨대 옛 남자와 우연히 만나 술이라도 한잔 꺾었다면, 괜한 신경전이 될까 얼버무리려던 기색을 그가 눈치라도 챘다면.
소심한 애인을 둔 여자들이여, 그 어떤 비밀이라도 트렁크에 싣고 야산에 올라 깊숙이 파묻어버리라.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권하는 이 뮤지컬은 엇박의 리듬감을 타고났다. 키스할
[공연이 끝난 뒤] 달콤 살벌한 그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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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병은 어쩔 수 없군 지수 ★★★★
평론가의 사생활 노출 지수 ★★★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감독 데뷔 선언은 2008년 한국영화계의 흥미로운 화젯거리였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그의 날카로운 필치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영화감독들이 많았기에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고, 대한민국 대표 영화평론가가 만든다는 영화는 도대체 어떤 작품일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2009년 한국미술계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들이 들려올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중견 미술평론가 10명이 직접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을 출품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3월13일 시작한 따끈따끈한 전시로, 5월17일까지 계속된다. 이름하여 <비평의 지평 전>이다.
이번 전시에 참가하는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다. 강수미, 류병학, 고충환, 반이정, 장동광, 최금수, 서진석, 임근준, 유진상, 심상용. 이들은 한국미술계의 다양한 흐름을 포착하고 쟁점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전시의 메
그들은 미술계의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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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마법의 휴대폰이 배달됐다. 방콕 출장 도중 휴대폰을 받은 맥스(셰인 웨스트)는 귀국을 하루만 연기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받는다. 호텔값도 반값으로 해준다기에 연기했더니, 맥스가 처음 예약한 비행기가 공중폭파해버린다. 결국 메시지를 신봉하게 된 맥스는 메시지의 내용에 따라 프라하의 어느 호텔로 떠난다. 다음에 날아온 문자메시지가 일러준 것은 잭팟을 터트릴 수 있는 슬롯머신. 맥스는 휴대폰 덕분에 거액의 돈을 갖게 되지만, 이 때문에 표적이 된다. 비슷한 휴대폰이 일으킨 또 다른 사건을 추적하던 FBI와 맥스의 잭팟으로 경영난을 겪게 된 카지노 보안책임자들은 맥스를 둘러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기프트>의 휴대폰은 <클릭>의 리모컨이 아니다.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의 시계 정도는 될까? 아니, 그것도 아니다. 이 휴대폰은 신비의 능력을 지녔거나, 복잡다단한 첨단기능이 농축된 물건이 아니라 그저 출시를 앞둔 ‘신상’이다. <기프트>에서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다 <기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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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1958년, 서독의 노이슈타트. 전차에서 내린 소년이 구토를 한다.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울던 소년(데이비드 크로스)을 지나가던 여인(케이트 윈슬럿)이 집까지 바래다준다. 성홍열에 걸려 3개월을 누워지낸 소년은 감사를 표하러 여인을 찾아간다. 둘은 곧 연인 관계가 된다. 성숙한 손에 이끌려 첫 경험을 한 15살 소년은 36살 여인에게 의식처럼 책을 읽어준다. 그러나 찬란한 여름 한철을 뜨겁게 사랑한 소년을, 여인은 말없이 떠난다. 이유를 모른 채 버림받은 소년은 법대에 진학하고, 전범을 다루는 법정에서 피고로 선 여인을 다시 만난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불친절하다. 시간은 뒤섞였고 역사는 개인사 속에 종종 자취를 감춘다. 영화는 실마리를 주는 것도 주저한다. 마이클과 한나라는 둘의 이름도 몇번의 섹스 뒤에야 알려준다. 한나가 떠난 이유와 마이클이 법정에서 중요한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 역시 서서히 드러난다. 스티븐 달드리, 데이비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행동의 결과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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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스(제이슨 스타뎀)는 정직을 당한 형사다. 과거 인질범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동료와 함께 쏜 총이 범인과 인질을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 얼마 뒤, 시애틀의 한 은행에 무장강도가 출현한다. 40명의 인질을 잡은 강도단의 두목은 코너스를 협상자로 데려오라고 말한다. 결국 경찰당국은 신참경찰인 데커(라이언 필립)와 붙어다니는 조건으로 코너스를 복직시킨다. 하지만 코너스의 협상에도 로렌조 일당은 은행을 폭파시킨 뒤, 은행예금이 아닌 다른 곳에서 10억달러를 훔쳐 달아나버린다. 데커는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는다”는 로렌조의 말에서 ‘카오스 이론’의 단서를 발견하고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간다.
<카오스>의 포스터에는 제이슨 스타뎀이 전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사실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라이언 필립이 연기한 신참형사 데커다. 영화는 은행강도 사건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 신참형사와 고참형사가 티격태격하는 모습들을 담아냈다. <리쎌 웨폰>이나
무리한 시도로 평범해진 범죄영화 <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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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패션지 기자를 꿈꾸는 쇼핑광 레베카(아일라 피셔), 그녀에게 쇼핑은 행복이고 생활이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하다. 갚을 길이 막막한 신용카드 결제일이 다가왔는데,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다. 돈벌이를 하려고 면접도 봤지만 모두 낙방. 우연히 경제지 에디터로 일하게 되지만 경제의 ‘ㄱ’도 몰라 실수 연발이다. 그러나 패션을 소재로 한 경제 칼럼을 쓰면서 인기를 얻고, 훈남 편집장 루크(휴 댄시)의 사랑도 받게 된다. 그런 레베카의 발목을 잡는 남자가 있었으니, 카드값 갚으라며 스토커처럼 따라붙는 수금원 데릭이다.
이 여자 한심하다. 능력도 안되면서 물욕 앞에 번번이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대책없는 씀씀이에 눈살을 찌푸릴 누군가도 이 ‘쇼퍼홀릭’이 말하는 쇼핑의 위안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쇼핑한 뒤 레베카는 “말랑한 버터가 따뜻한 토스트 위에서 녹아내리는” 행복을 느낀다. 세상이 다 아름답다. 그녀에게 쇼핑이란 지긋지긋한 현실의 달콤한 도피처다. 영
꽃가루 반짝이는 비현실의 세계 <쇼퍼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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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어머니 엘렌은 뛰어난 화가 폴 베르티에를 친척으로 두었고, 그로부터 물려받은 뛰어난 예술 감각으로 카미유 코로, 오딜로 르동, 루이 마조렐 등의 19세기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엘렌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여름날, 그녀는 맏아들 프레데릭(샤를 베를랭)에게 자신의 사후 이 집과 예술품들의 처리문제를 근심하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갑작스레 엘렌이 사망한 다음 프레데릭과 둘째 아드리엔(줄리엣 비노쉬), 막내 제레미(제레미 레니에)는 유산 처리를 놓고 이견을 보인다.
<여름의 조각들>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 중 가장 아름답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풍경화처럼, <여름의 조각들>은 조용한 시골 마을의 빛과 소리와 색채를 그대로 필름 안에 끌고 들어온다. 도식적인 비교일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파리 시내 풍경들은 삭막하고 어둡고 축축하다. 무엇보다 최고의 아름
조용한 시골 마을의 빛과 소리 <여름의 조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