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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네 커플이 있다. 1주년 기념일 여행길에 납치된 병태(이태재)와 지나(천희주), 현실에서 고통받는 최애 BJ(최민지)를 구하고 싶은 현수(차보성)와 이상해진 그가 답답한 예지(지연주), 고가의 생일 선물을 원하는 남친 스윙어(김환)와 그를 위해 급전을 마련하려는 여친 수미(수현), 반드시 완성해야 할 그림이 있는 예술가 성우(정이헌)와 홀로 외로이 길을 떠도는 지은(김예은)까지. 이들에게는 연애가 때론 피를 부르는 고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커플지옥>은 극한에서 사랑을 시험받는 연인들에 관한 호러 옴니버스다. 한명만 살아남는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민낯이 까발려지거나(<커플링>), 환상을 빌려 위계적 관계를 처단하는(<매직 포션 21>) 등 다양한 관계 실험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 실험들은 대체로 성공에 이르지 못한다. 극 중 커플들은 어색하며 특히 전체 여성 캐릭터는 동일 인물처럼 보인다. 그로 인해 호러영화다운 긴장감도 형성되지 못한다.
[리뷰] 커플처럼 보이는 게 더 시급하다, <커플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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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행성에는 한때 은하계를 지배했던 고대문명 이리디안의 정수가 깃든 볼트가 숨겨져 있다. 현상금 사냥꾼과 대기업 등 여러 세력이 그 볼트를 차지하고자 난전을 벌인다. 판도라 출신 현상금 사냥꾼인 릴리스(케이트 블란쳇)는 어느 날 대기업 회장인 아틀라스(에드가르 라미레스)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괴한에게 납치당한 딸 티나(아리아나 그린블랫)를 구해 달라는 것. 릴리스는 로봇 클랩트랩(잭 블랙)의 도움으로 판도라에서 티나를 만나지만 음모에 휘말리고 만다. <보더랜드>는 동명 게임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저예산 고어영화로 유명한 일라이 로스가 메가폰을 쥐었다. 대규모 예산과 케이트 블란쳇, 제이미 리 커티스, 잭 블랙 등 쟁쟁한 배우진이 붙었지만 기대가 무색할 정도로 완성도가 아쉽다. 분장과 CG, 액션신이 전체적으로 엉성하며 허점투성이인 각본과 연출도 몰입을 방해한다.
[리뷰] 그 어떤 연기도 살아남기가 불가능한 진정한 영화의 황무지, <보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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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인간 무리의 차기 리더 프레디(일라이 스윈델스)는 평소에 핑크 푸들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 그는 작은 데다가 별나기까지 한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많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을 사람이 그를 악당으로 오해한다. 프레디는 홧김에 달과 연결된 정령 바위에 가서 푸념을 마구 쏟아낸다. 그때 달에 있던 아기 정령 무푸가 지구에 불시착한다. 프레디는 무푸를 달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마녀 맥스(제니퍼 선더스)를 찾으러 간다. <200% 울프: 최강 푸들이 될 거야!>는 <100% 울프: 푸들이 될 순 없어>의 속편으로 전작의 감독 알렉스 슈타더만이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감독은 월트디즈니 애니메이터 출신답게 어린이 관객에게 최적화된 애니메이션을 선보인다. CGI는 무난한 편이며 슬랩스틱과 유머가 적당하게 어우러진 코믹한 연출과 무푸의 귀여운 캐릭터디자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만 후반 전개가 산만하게 다가온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리뷰] 귀여움으로도 감싸기 어려운 산만함, <200% 울프: 최강 푸들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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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모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등 이야기를 고운 빛의 형태로 담았던 미야케 쇼 감독의 기록물이 공개된다. 2018년 야마구치 아트센터(YCAM)는 야마구치 DNA 도감 워크숍을 진행한다. 이 워크숍의 목적은 지역에 자리한 식물이나 미생물을 채취하여 도감을 만드는 것. 지역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워크숍 참가자인 우메(이토 호노하나)는 다른 두 친구 타케(구리바야시 다이스케), 슌(야스미쓰 류타로)와 함께 새로운 종을 발견하기 위해 숲으로 모험을 떠난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중간 어딘가에 있는 <와일드 투어>는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싱그러운 풀잎처럼 어린 세대의 얼굴을 말갛게 비춘다. 숲에서 발견되길 기다리는 식물은 아마도 이제 막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세 친구의 얼굴을 닮아 있을 것 같다. 흔들리는 카메라워킹이 의외로 웃음 포인트.
[리뷰] 정말 봄이 오려나? 마음이 간지럽잖아!, <와일드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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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탄생의 순간부터 예정된 운명이다. 윤재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숨>은 이 만고불변의 순간을 탐구하기 위해 서로 다른 세 사람의 이야기를 교차한다.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장례지도사 유재철, 고독사와 범죄 현장을 정리하는 유품정리사 김새별, 고령의 몸을 이끌고 파지를 줍는 문인산씨가 그 주인공이다. 수많은 시신을 염했던 장례지도사는 직접 손으로 느낀 감각을 고백한다. 쓸쓸한 고독사의 현장을 청소하는 유품정리사는 고인이 남긴 삶의 흔적을 반추한다. 한편 육신의 쇠락을 체감하는 노인은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그려본다. 영화는 죽음의 세 가지 시제를 경험하는 세 사람의 인터뷰를 교차하며 사멸의 시간을 가늠하려 한다. 그러나 영화 구조가 죽음에 무력한 생자(生子)의 역설처럼 피상적인 현상을 나열하는 데 그쳐 아쉬움을 남긴다.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상영작이다.
[리뷰] 죽음 앞에 무지한 생자는 슬피 표면을 훑게 된다,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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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조선의 군대마저 해산시키며 침략을 본격화한다. 지식인들은 일제의 폭정에 맞서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립하지만, 항거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뜻을 모으는 데 실패한다. 망국의 기로에 선 정도(최민우)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중국 길림에 자급자족 공동체 ‘호조’를 건설한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프로젝트는 정도가 믿고 의지하던 안창호(장정식)의 체포 소식으로 난항을 겪는다. <호조>는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해석 손정도의 삶을 되돌아보는 뮤지컬 사극이다. 장정식과 최민우 등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해온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분장과 자연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촬영 방식은 비장한 서사에 걸맞은 몰입감을 끌어내지 못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을 조명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빈약한 전개가 장점을 가리며 아쉬움을 남긴다.
[리뷰] 상투도 없는 곱슬머리에 갓을 씌운다 한들, <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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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에 거점을 둔 대규모 갱단의 두목인 델 몬테는 유능한 변호사 리타(조이 살다나)를 고용해 한 가지 의뢰를 한다. 다름 아닌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수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라는 것이다. 능력에 비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리타는 고민 끝에 의뢰를 수락하고, 델 몬테는 에밀리아 페레즈(카를라 소피아 가스콘)라는 새 이름으로 여성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델 몬테는 부인 제시(설리나 고메즈)와 아이들까지 뒤로한 채 유럽으로 건너가 이전의 삶을 지우려 한다. 하지만 델 몬테 시절에 저질렀던 과오와 기억들이 에밀리아 페레즈, 그리고 그를 도왔던 리타를 자꾸만 붙잡는다. 결국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또 다른 삶의 문을 열기에 이른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자크 오디아르가 만든 뮤지컬영화다. 비정하고 진중한 서사의 배경에 충돌하며 엇박자로 등장하는 춤과 노래의 역동성이 흥미로운 조화를 일으킨다. 영화의 전반적인 판을 빠르게 짠 뒤 본격적인 드라마타이즈로 유장하게 들어서
[리뷰] 시원시원하게 노래하기 위해 구석으로 남겨지는 것들, <에밀리아 페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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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유대인인 사라(아리엘라 글레이저)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한쪽 다리를 쓸 수 없어 늘 놀림의 대상이었던 소년 줄리안(올랜도 슈워드)은 사라가 숨어 지낼 헛간을 내주고, 비비언(질리언 앤더슨)을 비롯한 줄리안의 가족은 어려운 처지에도 사라를 물심양면으로 돌본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라는 학교에 다녀온 줄리안으로부터 수학 등 교과를 배우며 세상 소식을 듣는다. 사라는 자신의 특기인 미술을 통해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줄리안 앞에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차별받던 소년과 소녀가 전쟁 속에서 그려내는 우정과 사랑 이야기. <화이트 버드>는 로그라인 그대로 동화적인 이야기 전개와 장면 묘사를 택하는 따뜻한 가족영화다. 이를테면 영화는 전체주의에 준동하는 청년의 최후나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집단학살 등을 적시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 속의 반복되는 대사처럼 “다정함의 큰 용기”가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어루만졌고 이 경험이 한 여성의 삶
[리뷰] 소년과 소녀, 다정함으로 상대와 세상의 상흔을 쓰다듬다, <화이트 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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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강사 영은(곽선영)에게 가장 큰 불안감을 안기는 존재는 뜻밖에도 7살 딸 소현(기소유)이다.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다가도 금세 착한 아이 흉내를 내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건지 희열을 느끼는 건지 알 수 없는 딸을 영은은 어떻게든 품으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다치는 사람까지 생기자 영은은 소현을 강하게 훈육하지만 결과는 참혹하다. 20년 뒤 특수청소업체에서 일하는 민(권유리)이 요즘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은 신입 해영(이설)이다.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랑둥이 해영에게서 미심쩍은 무언가를 발견한 민은 그의 정체를 캐기 시작한다. 모녀 중심의 과거 1부와 또래 여성 중심의 현재 2부로 구성된 <침범>은 공포영화처럼 보인다. 1부에서 공포의 존재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다. 소현은 죽은 반려동물 앞에서 울긴커녕 새로운 동물로 대체하면 그만이라는 듯 평온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한 첫 모습에서부터 감지된 섬뜩함은 엄마의 시점으로 진행되면서 갈수록 더 선명해진다. 친구의 손을
[리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남긴 뚝심, <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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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예비 영화인들이 모인 어느 행사장에서 봉준호 감독은 감독으로서 느끼는 극한의 공포에 대해 설명한다. “공포의 근원은 집착이다. 집착이 있기 때문에 공포가 생기는 거다. (집착이) 해소되지 않을까봐. 다들 머릿속에 맴도는 어떤 장면이 있을 거다. 그걸 찍기 위한 핑계로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다. 찍어서 그 화면을 소유하고 싶은 거지.” <미키 17>을 보면서 내내 떠올랐던 건 질문은 그가 이번에는 ‘어디에 집착하고 무엇을 소유하고 싶었을까’ 였다. 왜냐하면 주관적 판단에 <미키 17>은 봉준호의 전작들과 비교해서 지나치게 매끈하고 1차원적인 영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장의 신작이 으레 그렇듯이) <미키 17>은 ‘봉준호’ 세 글자에 축적된 위상 덕분에 과잉 해석되거나 과소평가받을 운명을 타고났다. 과소(혹은 부정적)평가를 모아보면 그의 전작들에 비해 대체로 ‘쉽고 친절하며 단순하다’는
왜 미키17은 뒤늦게 악몽을 꿔야 했을까 - 봉준호의 순한 맛에 깃든 섬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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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미래 배경의 SF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시대를 어디로 잡느냐다. 이건 교향곡 첫 악장의 조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이야기 속 사람들이 어느 구역에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정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 7>은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여러 행성에 정착한 먼 미래 를 배경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소설을 각색해 영화 <미키 17>을 만들면서 봉준호는 시대 배경을 21세기 중엽으로 잡는다.
지금 여기와 모든 면에서 가까운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이치에 맞는 건 원작이다. 지금 당장 초광속 비행과 인공중력의 생성이 가능한 우주선을 만들 수 있는 이론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2050년대까지 수백명의 사람들을 싣고 다른 항성계로 갈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드는 건 그냥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류가 미래에 우주식민지를 건설한 2019년이 배경인 <블레이드 러너> 같은 선례가 있지
왜 그 설정들은 원작과 달라져야 했나 - SF적 상상력의 다른 가능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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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에는 파시스트를 표방한 인물이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가 외국 자본과 결합한 작품을 만들 때면 등장하는 인물 유형인 까닭이다. 그게 미키(로버트 패틴슨)가 아님은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는 터, <설국열차>의 메이슨(틸다 스윈턴)과 <옥자>의 루시(틸다 스윈턴)를 잇는 인물은 케네스(마크 러펄로)와 일파(토니 콜레트)다. 그들 부부는 과장된 연기로 부산한 톤을 만들어내며 스윈턴이 선점했던 캐릭터를 양분해 자기화한다. 봉준호의 파시스트적 인물은 공포감을 안기는 대신 희화화되어 있다. <위대한 독재자>(1940)에서 채플린이 연기한 인물을 더 우스꽝스럽게 만든 식인데, 배우들도 덩달아 떠들썩한 인물을 만드는 데 전력하기를 즐긴다. 특히 입 주변의 변형을 통한 안면 근육의 뒤틀림은 그들의 추잡한 인상을 부풀린다.
썩은 지도자의 심장을 찔러 피를 흘리려
왜 미키 17이 살고, 미키 18이 죽어야 하는가 - 혁명에 대해 말하지만 혁명적이지는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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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이 개봉한 지 일주일쯤 지난 지금, <미키 17>을 두고 세명의 비평가가 세개의 질문을 던졌다. 듀나 평론가는 SF 장르의 관점에서 <미키 17>이 택한 갖가지 설정의 이유를 고민했고, 이용철 평론가는 영화의 결말이 혁명이란 주제를 어떻게 다뤘는지 살폈으며, 송경원 편집장은 <미키 17>이 보여주는 사회·정치적 문화의 의미를 훑었다. 기실 혁명, SF, 정치란 키워드는 봉준호 감독이 데뷔작부터 꾸준히 보여준 고유의 스타일과 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기생충> 이후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거장 반열에 오른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궤적을 어떻게 <미키 17>에 흘려놓았는지, 이것이 작금의 사회에서 어떤 함의를 파생하는지, 과연 봉준호란 이름의 방향은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세개의 질문을 통해 한번에 엿볼 수 있는 셈이다. 봉준호
[기획] 혁명, SF, 정치의 교차점에서 - <미키 17>에 던지는 세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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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고양이였을까. “내가 어릴 적에 짙은 회색 고양이를 키운 적 있다. 주변으로부터 고양이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많이 듣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강아지파에 가깝다. (웃음) 고양이들은 낯선 것을 경계하는 타고난 불안이 눈에 띈다. 그래서 표정과 몸동작이 두드러지는데 고양이의 그런 보디랭귀지를 영화적 언어로 활용해보고 싶었다. 애니메이터로서는 무척 어려운 작업이었다. 고양이들이 특정 규칙이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무엇보다 현실적인 몸동작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면 고양이 집사님들한테 바로 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다만 이들의 모습을 굳이 과장하고 싶지 않았다. 동물들의 현실적인 동작에도 농담, 슬픔, 분노가 있다.”
대홍수와 동물들. 애니메이션 장르에서 두 키워드가 만날 때 보통은 협심해가는 ‘동물 친구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플로우>에는 인간처럼 두발로 걷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하는 동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
고양이의 작은 움직임마저 자연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