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초기 무성영화를 둘러싼 논의에 뒤늦게 동참한 영화학자 토마스 엘제서가 꺼내 든 비장의 카드는 ‘루브의 귀환’(the return of rube)이었다. 사전적으로 교양 없는 시골 사람을 뜻하는 루브는 영화가 발명된 직후 스크린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였다. 로버트 폴의 <활동사진을 처음 본 시골 사람>(The Countryman’s First Sight of the Animated Pictures, 1901)과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 에드윈 S. 포터의 <활동사진 쇼에 간 조시 삼촌>(Uncle Josh At the Moving Picture Show, 1902)은 소위 말하는 루브 필름의 대표작에 해당한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크린 속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열차가 다가오고, 커플이 애정 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경련에 가까운 몸짓을 짓는다. 급기야 그들은 스크린 속으로 뛰어든다. 이렇듯 루브 필름은 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한 관객의 순진한 믿음이 곧 영화의 작동 원리라는 것을 말한다.
루브의 귀환은 영화사적으로 내러티브 중심적인 영화에 의해 주변화되었던 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한 경험의 복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1980년대 이후 노엘 버치, 찰스 머서, 앙드레 고드로, 톰 거닝과 같은 연구자들이 영화사에서 내러티브 통합적인 양식만이 유일하지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신영화사(new film history)를 위한 담론의 장을 열었다. 이 초기 무성영화에 관한 연구들은 톰 거닝과 앙드레 고드로가 따로 또 같이 제안한 어트랙션 영화로 통합되는 것처럼 보였다. 어트랙션 영화는 영화의 매체적 특징이 이야기하기보다는 보여주기, 즉 무언가를 관객 앞에 드러내는 전시적인 특성에 있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국적이고, 충격적이며, 선정적인 이미지를 통해 관객의 호기심과 관음증적 욕망을 자극한다. 관객은 어트랙션의 속성을 가진 이미지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신체적, 정동적으로 반응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루브 필름은 영화 속 이미지의 움직임이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신체적 움직임으로 전이된 상황, 즉 관객이 스크린 속 이미지에 몸짓으로 화답하는 상황을 다룬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영화사적 사례는 영화의 발명을 둘러싼 신화적 이야기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6)을 보고 관객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나 <도버의 거친 바다>(Rough Sea At Dove, 1895)를 본 여성 관객들이 스크린 속의 파도가 자신들의 발 앞에 떨어질 것으로 착각하여 치마를 들어 올렸다는 이야기 등등. 문헌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파악할 수 없는 그 이야기들은 엘제서가 말한 “사건과 경험으로서의 영화”에 관한 현상에 부합한다.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고 발작적으로 춤을 추는 루브 필름 속 한 남성의 모습이 말해주듯이 영화는 이미지가 관객 앞에 다가가는 사건인 동시에 관객이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이다. 영화는 수행성의 예술인 것이다.
한편 루브의 귀환은 근대성의 귀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루브 필름의 무대는 근대라는 역사적 시기에 새로운 기술적, 산업적, 문화적 현상이 발흥하는 여러 장소에 해당한다. 여기서 근대는 볼거리를 쫓아 군중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고, 그리고 그런 군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주의 경제가 발흥하던 시대를 지칭한다. 루브 필름을 포함한 초기 무성영화의 소재만으로도 영화와 근대성이 밀접한 관계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마차, 전차, 열차와 같은 각종 새로운 운송수단과 군중들로 혼잡한 대도시의 거리, 상품의 매력으로 산보객들을 유인하는 아케이드, 스릴이 넘치는 탈것과 볼거리로 넘쳐나는 놀이공원, 전세계 각국의 기술적, 산업적, 문화적 비전을 엿볼 수 있는 박람회, 영화를 포함하는 기괴한 볼거리들을 쉴 새 없이 제공하는 보드빌 등은 초기 무성영화의 소재인 동시에 무대로 쓰인 것들이다. 시인 보들레르가 <어떤 희롱꾼>이라는 시에서 요지경에 가까운 근대의 풍경을 “가장 투철한 고독한 자의 머리조차 혼란케 하는 대도시의 이 공공연한 광란”으로 표현한 부분에 비추어 말하자면, 영화는 관객이 이성의 끈을 놓고 흥분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각적 볼거리를 제공하는 기술적 장치였다.
근대는 영화를 사건의 형태로 낳았고, 영화는 근대를 경험의 형태로 담아냈다. 익히 잘 알려진 것처럼 영화는 너무 많은 부모와 형제자매의 보살핌과 간섭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 복잡한 혈통과 배경은 카메라 옵스큐라, 매직 랜턴, 시각 장난감, 카메라 등과 같이 이미지의 환영을 생산하는 광학 미디어의 계보 속에서, 전통적인 시공간의 개념을 뒤흔든 각종 교통통신 수단의 발전 속에서, 상품의 효율적 생산, 유통, 소비를 촉진하는 산업 체계 속에서 구축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일부 영화인들은 영화라는 장치가 근대적 삶의 복잡다단한 현상을 포착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숙고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믿었다. 예를 들어 영화는 열차가 다가오는 것을 찍었고, 열차 위에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봤다. 더 나아가 열차를 움직이게 만드는 기계장치의 움직임을 율동적으로 담아냈다. 영화는 근대를 구조화하는 동시에 해부할 수 있었다. 영화는 열차가 그러했던 것처럼 근대성의 은유를 자처했다. 이외에도 마차, 자동차, 배 등과 같은 근대적인 탈것 위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비인간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팬텀 라이드(phantom ride),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관광영화, 약간의 눈속임으로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트릭영화(trick film), 실제 사건과 장소를 기록한 액얼리티 필름(actuality film) 등이 근대의 삶을 담음으로써 하나의 볼거리로 거듭났다. 영화는 기술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근대라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나고 자라났다.
영화와 근대성의 관계는 두개의 서로 다른 영화사적 흐름을 분기시켰다. 1905년 전후 영화가 기술적으로 발명된 것을 기준으로 약 10년이 지났을 무렵에 영화산업은 큰 위기를 맞이했다. 관객들 사이에서 영화가 익숙하고 오래된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에는 이미 유행이 지나간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났고, 그 앞에 선 관객들의 눈은 흐리멍덩했다. 관객의 몸은 전과 달리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멸시에 가까운 그런 반응은 영화인들에게 전화위복의 계기를 제공했다. 영화산업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던 영화인들은 단순히 무엇을 보여주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놓고 고심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영화를 위한 기술, 형식, 양식, 장르가 나타났다. 그 일련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의 흐름을 형성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기존 영화의 어트랙션에 지루함을 느끼는 관객들을 위해 어트랙션의 연쇄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등장했다. 과거의 어트랙션 영화가 1분 내외의 지속 시간 동안 일회적인 충격 효과를 주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영화들은 관객들이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시각적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따랐다. 대표적인 경우는 후일 슬랩스틱코미디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추격영화(chase film)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부류의 작품들은 대도시의 거리를 배경으로 달아나는 자와 쫓는 자가 벌이는 좌충우돌의 상황을 원인과 결과의 느슨한 구조 속에서 보여준다. 하나의 이미지와 그것의 매력에 싫증을 느낀 관객을 위해 이미지를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다양하게 제시하여 관객의 지각 경험에 혼란을 초래하는 영화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어트랙션의 연쇄를 목표로 삼아 이미지의 배열과 효과에 의존한 결과 내러티브의 연속성의 구축이 긴요하게 쓰일 수 있는 편집, 트릭, 카메라 움직임에 관한 관습이 구축되었다. 이 일련의 역사적 흐름은 초기 무성영화의 산업적 위기와 쇄신 속에서 시각적 스펙터클이 내러티브에 종속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초기 무성영화의 보여주기에서 영화의 순수성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1911년 영화평론가 리초토 카뉘도가 영화를 새로운 예술로 선언하면서 그것이 근대적인 정신과 에너지의 본질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던 바로 그즈음에 영화의 창의성에 관해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학, 산업, 기계로 대표되는 근대 합리성을 직간접적으로 의식하는 동시에 모더니즘 예술운동에 고무되었다. 그리고 영화가 다른 매체나 예술 장르와 구별되는 고유의 운동성, 서정성, 조형성, 추상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영화인들은 영화의 시선과 그것이 구축한 세계의 독자성을 믿는 쪽이었다. 기계적 장치로서의 카메라가 사물의 표면만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은 포토제니와 같은 비평적 용어로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순수주의나 독일의 절대주의로 분류되는 영화들이 카메라의 움직임, 편집의 리듬, 애니메이션을 활용하여 환각, 빈혈, 현기증에 가까운 관객의 지각 경험을 끌어냈다. 1910년대 이후 실험적인 영화들은 리얼리즘적 관점이 아닌 조형적 관점을 추구했다. 세계에 대한 충실한 재현과 모방보다는 세계에 대한 충실한 표현과 해석에 더 무게를 두었다. 심지어 현실에 기초한 경우라도 구체적인 것을 가공하고, 변형하고, 제거하여 추상적인 것을 끌어내는 방식을 따랐다. 그 결과 삼각형, 사각형, 원과 같은 기하학적 형상들이 문자 그대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도 등장할 수 있었다. 관객은 그런 작품을 통해서 영화가 세계에 관해 그릴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하고, 절대적인 모습과 마주할 수 있었다.
초기 무성영화에서 분기된 두개의 흐름은 서로 다른 소재, 주제, 양식을 추구했지만 그 영화들 모두 관객을 스크린 앞에 붙잡아두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시절의 영화 만들기에 있어서 마지막 퍼즐은 관객이었다. 그 영화들은 근대의 기술적 성취를 과시적으로 전시하기 위해서든, 너무 일찍 찾아온 영화산업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든, 그도 아니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영화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서든 간에 관객과의 공모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스크린 앞에 있는 관객이 잠들지 않고, 스크린에 등을 돌리지 않고, 영화 속 세계에 몰입하기를 바란 것이다. 스크린 속 이미지에 열광적으로 반응하거나 필요하다면 주변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고 춤이라도 출 수 있는 그런 관객. 영화에 대한 불신을 중단하고 영화 속 세계에 침잠하는 그런 관람 경험은 현실의 이편과 저편의 경계가 무너지는 유사 종교적 체험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인 것과 환영적인 것, 대중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그리고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오로지 작품 속 세계에 몰입하여 그것을 순수하게 믿는 그런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장르 구분과 같은 분류학적인 접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편의 영화가 구축한 세계와 그 세계의 진실에 눈을 뜬 관객의 상태이다. 일찍이 발터 베냐민은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코미디영화, 디즈니 애니메이션, 아방가르드 실험영화 등을 아우르는 영화 일반의 사회적 기능이 영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기계장치를 통해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의 술집과 대도시의 거리, 사무실과 가구가 있는 방, 정거장과 공장들은 우리를 절망적으로 가두어놓은 듯이 보였다. 그러던 것이 영화가 등장하여 이러한 감옥의 세계를 10분의 1초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함으로써 우리는 사방으로 흩어진 감옥 세계의 파편들 사이에서 유유자적하게 모험에 가득 찬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영화가 세계를 분해한 다음에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서 세계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그런 과정을 거쳐 영화 속에서는 근대 자본주의 세계가 합리성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하에 인간을 구속하거나 소외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는 세계를 파괴하면서 재건한다. 그렇게 영화가 잠들어 있던 세계를 깨우면 관객은 영화가 거둔 승리에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환희의 춤을 추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