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아직 투표 도장 찍는 감각이 남아 있는 대한민국에 학교 선거 이야기가 찾아왔다. 6월19일 전편 공개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러닝메이트>는 학생회장 선거를 앞둔 영진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인기와 자본력을 갖춘 1번 곽상현 후보(이정식)와 현직 전교 부회장으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진 2번 양원대 후보(최우성)가 모두 원하는 건 소중한 한표뿐만 아니라 1학년 노세훈(윤현수)이다. 눈에 띄지 않는 모범생이었으나 추문으로 전교생이 다 아는 비운의 스타가 된 세훈은 회장 후보들의 관심과 감투의 힘으로 명예 회복을 노린다. <기생충> 공동 각본 이후 첫 각본·연출 시리즈인 <러닝메이트>를 완성한 한진원 감독을 만나 드라마 못지않게 속도감 넘치는 대화를 나눴다. 자신감과 좌절, 흥분과 재미의 롤러코스터였던 제작 과정을 전하는 그에게서 극 중 열성적으로 선거를 치르는 영진고 학생들의 모습이 엿보였다.
- 지난해 초 <씨네21>과 만났을 때는 작품을 9부작으로 소개했는데 최종적으로 8부작이 됐다. 어떠한 판단과 고민이 있었나.
전체적으로 더 흡인력 있고 빠른 전개를 만들기 위한 결정이었다.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다 보니 본격적인 선거가 중반 이후에야 시작되는 구조가 되었고 그 시점을 앞당길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원래 9부작 기준으로 나뉘어 있던 3부와 4부를 하나로 묶어 현재의 3부로 구성했다. 전체적인 분량 조정도 있었다. 회당 50분가량이었던 러닝타임을 40분으로 압축했다.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인 만큼 조금만 느슨해져도 시청자가 이탈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덜어낸 장면들은 <러닝메이트> 가 많은 사랑을 받아 블루레이 스페셜 영상으로 선보였으면 좋겠다. (웃음)
- 그럼에도 3화 ‘스타 탄생’까지는 주인공 세훈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세훈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가 주변 인물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초반부를 한 사람에게 집중해 구성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원안인 소설 <소라게>를 쓸 때부터 이 이야기는 세훈의 1인칭 시점으로 풀어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작품의 방향성과도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게 나와 제작 구성원들의 판단이었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객관적인 시선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결국 각자의 주관적 감각과 해석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러닝메이트>는 이런 생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섣불리 객관화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한 사람의 불완전한 시야와 그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함께 포착하고 싶었다. 어리숙한 주인공이 자기 세계를 해석하고 반응하는 리듬 자체가 드라마의 구조이자 톤이기도 했다.
- 세훈이 원대에게서 상현의 러닝메이트가 되는 계기가 중요해 보인다. 자신이 원대의 열두 번째쯤 전교 부회장 후보였다는 걸 안 세훈은 원대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고 상현의 손을 잡는다. 왜 이 사실이 세훈에게 그토록 분노를 일으킨 걸까,
‘발기남 사건’으로 자존감이 마이너스 20점까지 내려갔던 세훈은 원대의 러닝메이트 제안으로 50점까지 회복한다. 이미 인정욕구가 극도로 커진 상태에서 자신이 원대에게 대체 가능한 존재였다는 걸 알자 더 큰 공허함을 느낀다. 그 거대한 허기를 상현이 채워주려고 하니 그에게 마음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세훈은 겉으로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사실 내면에선 끊임없이 올라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던 셈이다.
- 2화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세훈은 “노력만으로 칭찬받지 않겠다”면서 애착하던 합창부를 떠나는 큰 결정을 내린다. 세훈의 탈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개상 반드시 필요했던 기능적인 이유도 있지만 동시에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세훈이 탈퇴서를 쓰는 2화의 엔딩 장면은 그가 과거의 자신과 작별하고 백지 같던 자아에 처음으로 때가 묻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래서 음악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쓰일 법한 동화 같은 합창곡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몇초간은 오케스트라가 확 몰아치며 끝난다. 그렇게 순수의 시절이 끝났다는 걸 암시하고 싶었다. 이전까지의 세훈은 소속감을 위안으로 삼고 음치니 청소라도 열심히 하자며 다른 사람들을 조용히 따라갔다. 하지만 점차 수동적인 팔로워가 아닌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주체적인 인물로 나아간다.
- 양원대 캠프와 곽상현 캠프, 양 진영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어느 한쪽이 대단히 정의롭거나 저열하지 않아서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 정치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다. 양쪽의 성격을 구축하는 과정은 어떠했나.
양원대 캠프는 협력과 단합을 중시하는 집단으로 설정했다. 그래서 원대가 소속된 동아리도 합창부다. 원대는 전면에 나서 캠프를 이끌고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적이고 강한 리더십의 소유자다. 반면 곽상현 캠프는 개성과 자유를 중시한다. 상현은 직접 나서기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특기를 활용해 목표를 달성하는 지능형 리더에 가깝다. 두 리더십의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공간, 조명, 활동 시간대 같은 요소도 세심하게 구분했다. 예컨대 양원대 캠프는 햇빛이 잘 드는 음악실처럼 개방된 장소에서 모이지만 곽상현 캠프는 연극부실 같은 어둡고 폐쇄적 공간을 베이스캠프로 삼는다. 원대는 한낮에 햇살 가득한 레스토랑에서 세훈에게 러닝메이트를 제안하는 반면 상현이 세훈을 처음 만나는 시점은 저녁 시간의 편의점이다. 이런 차이는 배우 캐스팅 과정에서도 중요하게 고려했다. 두 인물을 모두 포식자라고 했을 때 원대는 정면 돌파하는 육식동물이고 상현은 은근하고 미끄럽게 파고드는 뱀의 이미지였다.
- 다시 1화 ‘낭중지추’로 돌아가자면 세훈은 “학교는 비정한 현실 세계의 축소판이다.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각자의 역할과 파벌이 정확하게 나눠져 있다”라고 말한다. 감독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한 정의일까.
내 학창 시절은 그리 비정하지도 특별히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지도 않았다. 난 친구들과 두루두루 지내면서 싸우기도 하고 가끔 학원 가는 척하며 놀기도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작품과 창작자의 개인사가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묻는 거라면 그 연결고리는 매우 약하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지 몇년 됐고 작품과 나 사이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 중 학교는 현실 고등학교를 재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은유이고 설정일 뿐이다. 이 정글 안에서 누가 1인자인가를 겨루는 자존심 싸움, 권력 다툼에 초점을 맞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겨야 하는 이유보다 지면 안되는 이유가 더 커진다. 그리고 ‘지면 정말 큰일 난다’까지 가는데 작가적 관점에서 본 현실 정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