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판에서 때아닌 이념 전쟁이 한창이다. 진작부터 “좌파에 장악된” 영화계를 교정하기 위해 싸움을 걸어온 이들이 있고 영화 이름에서부터 ‘전쟁’을 집어넣었다. 대통령 등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이 거들기도 한다. 잘 몰랐던,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그 영화를 통해 배웠다는데, 영화가 다루었다는 사실이 역사학계가 이미 집적해놓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거나 이미 특정 집단 사이에 돌고 돌던 ‘의견’에 불과한 터라 헛웃음이 난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헌법적 책무’를 짊어진 그는 영화 이전에 알고 있었어야 할 ‘기초적인’ 역사를 대체 무엇으로 배우고 있었단 말일까?
애써 붙인 이념 다툼이 그럭저럭 효과적이라고 판단해서인지 최근 개봉한 ‘일제 쇠말뚝’ 영화를 두고 “좌파들이 보는 영화”라고 딱지를 붙인 감독. 그러나 꽤 비싸진 영화표를 사서 굳이 시간을 들여 영화관에 갈 여유가 있는 좌파가 우리나라에 너무 많아서인지, 이 영화는 또 한번의 ‘천만 관객 흥행사’를 써나갈 기세다. 몸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집단기억의 무덤 깨기
-
‘보이지 않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는 관객의 굳은 선입견을 점잖게 훈계하는 대사를 초반부에 배치하고 시작하는 <파묘>는 바로 그 전제에 고통받는 척하면서 뻔뻔스럽게 그 전제를 배반하고 심지어 거기에 고상한 명분을 칠하면서 영화적 자살과도 같은 과도한 장식의 전시로 나아가는데, 오컬트에 특화된 재능의 소유자로 주목받던 장재현 감독은 이로써 오컬트와 괴수물을 난폭하게 결합했는데도 상찬받으며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영광의 월계수를 쓰게 되었다. 내게는 얼빠진 소리처럼 들리는 이 영화에 대한 온갖 고급한 비평적 담론과 SNS를 통해 넘쳐나는 진영 논리에 기반한 (좌파 반일영화라는 모 다큐멘터리 감독의 비난에 대한 대중의 응징이라는 투의) 찬가를 존중하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보다 담백한 접근이 필요한 건 아닐까라는 의문에서 이 글을 쓴다.
싸움의 비장한 명분
<파묘>는 변칙이라고 지적해도 무방한 과격한 서사의 뒤틀림
[비평] 악의 존재를 전면화한 쾌락의 후유증, <파묘>가 내세우는 것들
-
장면 하나.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여자는 일본어로 안내하는 승무원에게 짧게 대답하고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장면 둘. 유년기를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에 이민 간 여자는 24년 만에 재회한 친구를 두고 “그 사람은 진짜 한국인(Korean-Korean)”이라는 표현을 쓴다. 한쪽에서는 일본어로, 다른 한쪽에선 영어로 한국인을 호명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국 사람과 진짜 한국인. 서로 다른 영화에서 흘러나온 두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굴절된 거울상을 형성한다. 누군가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한국인’이라고 불린다. 어떤 연관성도 없는 두 영화의 인물들은 이렇게 뜻밖의 장면에서 같은 단어를 공유한다. 그런데 그들이 공유하는 단어가 같은 의미를 전하고 있는 걸까?
‘한국인’을 가리키는 두 편의 영화가 한국 안팎에서 나란히 도착했다. 한 영화는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며 극장가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고, 다른 한 영화는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얻은 호
[비평] <패스트 라이브즈>와 <파묘>에서 호명되는 ‘한국(인)’에 관하여
-
인터뷰는 대개 인터뷰하는 대상과 관련이 있는 곳에서 진행한다. 직접 운영하는 식당이나 인터뷰이가 추억하는 요리가 있는 장소, 자주 찾는 공간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식이다. 인터뷰이 선정만큼 중요한 건 어디서 인터뷰를 할지다. 그에 대해 어디서 만나야 할지를 혼자 생각하고 몇 군데를 골라서 그와 내가 대화하는 상상을 하는 일은 인터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루틴이다. 이번 인터뷰이가 영화감독 A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연스럽게 떠올린 건 제주도였다. 그는 몇번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국에 오면 제주도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인터뷰를 하러 제주까지 갈 수도 없는 일이고…. A의 영화가 잘 어울리는 장면들을 떠올려보았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를 생각하면 독일 맥주가 유명한 맥줏집이나 영화에도 등장한 중식당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너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도 정하지 않고 고민만 길어지고 있으니 선배는 횟집이 어떠냐고 했다. 고급 일식당
[시네마 디스패치] 맛과 요리섹션 - 인터뷰
-
-
“당하는 나를 보는 눈들 말이야. 파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항상 상냥했던 하린이 전학생 수지(김지연) 앞에서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오디션 때도 연기했던 장면이다. 평소처럼 착한 모습은 아니지만 진심을 전부 보여주는 것도 아니어서 적정선을 찾는 게 중요했다.” 고심한 연기 덕에 배우 장다아는 “하린이 돌변할 때의 쎄한 이미지가 잘 표현됐다”는 평을 받으며 백하린 역에 캐스팅됐다. 인기투표로 등급을 나누는 백연여고 2학년5반에서 하린은 A등급을 놓쳐본 적이 없다. 그러나 물밑으로 남을 괴롭히는 영악함으로 인해 모두가 그를 두려워한다. 장다아에겐 “그 이중적인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하린을 들여다보면 외로움 등 여러 감정이 담겼다. 연민하진 않더라도 그런 하린의 복합적인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여 표현하려고 했다.” 주변에서 하린의 눈짓 하나에도 크게 반응하기 때문에 “대본의 지문에 적힌 표정, 손짓 등 비언어적인 표현 연구”에 공을 들였다. 와중에 재밌게 표현한
[WHO ARE YOU] ‘피라미드 게임’ 장다아
-
‘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훠궈
늘 빠져 있는 음식이다. 전세계의 훠궈를 다 먹어보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다. 몇달 전 뉴욕에서 인생 훠궈집을 발견했는데 한국엔 없는 체인점이더라. 진지하게 한국에 들여오고 싶다.
뮤지컬
해외여행 중에 <위키드> <라이언 킹> 같은 유명한 뮤지컬을 몰아 봤는데 행복했다. 무대 위 배우들처럼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자극을 받았다. 영감을 위해서라도 좋은 무대를 많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여행
워낙 집순이인 데다가 늘 바쁜 스케줄에 쫓겨 여행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작품 하나 끝내면 여행을 다녀오기 시작했다. 미국, 유럽, 발리 등에 머물렀는데 좋은 에너지를 받았다. 앞으로 나 자신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기회를 주고 싶다.
수영
수영은 어렸을 때 하고 오랫동
[LIST] 김지연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
김홍 지음 / 문학동네 펴냄
망각과 불안은 팔기 쉬워도 라면은 팔기 어렵다. 손님의 대다수를 돌려보내는 마트, “무엇이든 팔지만 아무거나 팔지 않는” 킹 프라이스 마트는 어딘가 범상치 않다. 이 기묘한 장소의 주인인 배치 크라우드는 “최고의 장사꾼 혹은 최악의 사기꾼”이라 불린다. 남다른 사업 수완으로 한때 ‘배치의 천원 숍’ 점포를 전세계 2만여개까지 확장 개업했으나 돌연 모든 것을 처분하고 모습을 숨긴다. 그로부터 몇년 후 서울에 ‘킹 프라이스 마트’를 새롭게 개장하면서 다시금 이목을 끈다. 이곳의 유일한 직원은 소설의 화자이자 27살 청년인 구천구다. 유명 무당 억조창생 여사의 셋째 아들로, 킹 프라이스 마트에 일하게 된 것도 어머니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억조창생 여사는 출근길에 오른 천구에게 마트에서 ‘베드로의 어구’를 구해올 것을 부탁한다. 어떤 선거도 53%의 승률로 승리하게 해주는 베드로의 어구로 대통령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천구의 눈앞에 배치 크라우드
씨네21 추천도서 - <프라이스 킹!!!>
-
정재민 지음 / 창비 펴냄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에 출연했던 정재민이 쓴 한국의 범죄 이야기. 판사로서 형사재판을 담당했던 이력과 우리 사회의 범죄대책을 마련하는 법무부 법무심의관으로 일했던 이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저작이다.
우리는 안전한 사회에 살고 있을까? 뉴스를 통해 접하는 범죄 소식은 어쩐지 점점 늘어나고, 또한 잔혹해지는 듯 느껴진다. 그런데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2012~21) 우리나라의 전체 범죄 건수는 약 193만건에서 약 153만건으로 줄었다고 한다. 절대적인 범죄량이 줄어들고 있음에도 시민의 불안감이 심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정재민은 범죄의 “무차별성”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통계상 급증하는 범죄는 사기, 마약, 성범죄로, 지난 10년간 24% 이상 늘었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를 잘 관리하고 갈등과 원한을 만들지 않는다고 예방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과학수사의 발전상에 대한 글로 시작해 수사, 재판, 교정
씨네21 추천도서 - <범죄사회>
-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지음 / 김태환, 이경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펴냄
영화 매체 고유의 힘과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영화이론의 고전. 정성일 평론가의 말마따나 “영화이론의 고전주의 시대가 있다면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이 책은 그 마지막 위대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에 따르면 영화는 본질적으로 사진의 연장선에 존재하기 때문에 영화와 사진은 동일한 매체적 특성을 공유한다. 하지만 영화감독에게는 사진작가보다 조형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폭넓게 열려 있다. 영화의 가능성이 사진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차원까지 아우르므로. 그렇다면 사진이나 소설이나 연극과는 구분되는 특징으로서의 ‘영화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통찰과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 이 책은 영화와 다른 매체를 구분 짓는 가느다란,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선에 대한 분석이다. 읽기 쉽지는 않지만 읽기가 괴롭지만은 않은 이유다. <
씨네21 추천도서 - <영화의 이론>
-
셀린 송 지음 / 황석희, 조은정, 임지윤 옮김 / 을유문화사 펴냄
셀린 송 감독이 쓴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12살 때 토론토로 이민 간 나영과 서울에 남은 해성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이야기다. 12살 때 헤어지고, 12년 후에 온라인으로 재회했다 다시 소원해지고, 다시 12년이 흘러 두 사람은 뉴욕에서 비로소 만나게 된다. 그런데 나영은 그사이 아서와 결혼한 상태. 나영과 해성의 재회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전생’을 뜻하는 제목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인연’이다. 인연이라는 말은 꼭 해피엔딩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악연도 인연이며, 헤어짐 역시 연이 다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이 복잡한 마음의 행로를, <패스트 라이브즈>는 차분하게 따라간다.
영화를 본 관객에게 추천하는,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영화에서 배우의 행동을 통해 유추해야 했던 인물들의 속마음과
씨네21 추천도서 -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
-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 - 셀린 송 지음
<영화의 이론> -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지음
<범죄사회> - 정재민 지음
<프라이스 킹!!!> - 김홍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3월의 책
-
백연여고 2학년5반 학생들은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5교시 HR 시간이면 ‘피라미드 게임’을 한다. 인기투표를 표방하지만 사실 A등급부터 F등급까지 반 학생들의 등급을 매기는 잔혹한 게임이다. 자신보다 낮은 등급인 학생을 괴롭힐 수 있으며 F등급이 된 학생에게는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게 이 게임의 기본 규칙이다. 누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 백연그룹 손녀이자 백연여고 이사장 딸로서 반의 절대 권력자인 백하린(장다아)이다. 티빙 시리즈 <피라미드 게임>은 “사회의 축소판”과 같은 백연여고 2학년5반을 통해 계급화한 사회, 차별과 폭력에 무기력하게 침묵하는 사회를 은유한다. ‘사회’는 절대 권력자 한 사람에 의해 굴러갈 수 없듯 피라미드 게임이 1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구조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방관자와 가해자들 때문이다. 드라마는 반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폭력이 그저 백하린으로 상징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학교와 어른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구조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오수경의 TVIEW] ‘피라미드 게임’
-
<젠틀맨: 더 시리즈>
넷플릭스 | 8부작 / 연출 가이 리치 / 출연 테오 제임스, 카야 스코델라리오,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다니엘 잉스 / 공개 3월 7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야성과 교양의 역설적인 조화
귀족 가문의 차남 에디(테오 제임스)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다. 평화롭던 분위기는 변호사가 들고 온 유언장 하나로 순식간에 뒤흔들린다. 아버지가 600년 만에 처음으로 전통을 깨고 모든 재산과 작위를 차남에게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마약상에 큰 빚을 져 누구보다 돈이 필요했던 장남 프레디(대니얼 잉스)가 분노에 차서 폭주하고 에디는 미안한 마음에 온 힘을 다해 형을 도우려 한다. 급하게 재산 매각을 준비하던 그의 앞에 매력적인 한 여성이 나타난다. 자신의 이름을 글라스(카야 스코델라리오)라고 밝힌 여성은 에디의 아버지와 오랜 기간 거래해온 사이다. 뜻밖의 사실은 그 거래가 마약과 연관되었다는 것. 가문의 저택이 대마초
[OTT 추천작] ‘젠틀맨: 더 시리즈’ ‘댐즐’
-
넷플릭스 | 10부작 / 연출 이병헌 / 출연 류승룡, 안재홍, 김유정 / 공개 3월15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희귀종 웃음의 출현.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어이없다
이병헌식 웃음에 익숙한 이들도 <닭강정>은 도전적으로 느낄지 모르겠다. 일찍이 웹툰 <닭강정>을 보며 웃은 이들도 넷플릭스 시리즈 <닭강정>에는 종종 당황할 수 있다. 감독, 배우, C급 코미디, 그리고 OTT 플랫폼이기에 가능한 시리즈 구성이 적역의 시너지효과를 낸 덕택이다. 사장 한명, 직원 둘. 전 직원 세명인 ‘모든기계’ 사무실에 의문의 기계가 배달되면서 사태는 시작된다. 인근의 유서 깊은 맛집에서 닭강정을 사들고 온 사장 최선만(류승룡)의 딸 최민아(김유정)가 하필이면 그 기계 안에 들어가 닭강정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주요 목격자는 민아를 흠모하던 인턴 직원 고백중(안재홍)으로, 선만과 백중은 곧 힘을 합쳐 변신에 얽힌 황당무계한 비밀을 파헤쳐나간다.
<
[OTT 리뷰] ‘닭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