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영화 <무단횡단>을 연출하고 소설 <슬로우 불릿>의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진행한 소설가 방현석이, 영화와 소설의 밀접하고도 까다로운 관계를 살폈다. 민중의 오락으로 출발한 비슷한 이력, 문자와 이미지의 이질적인 권능, 같은 서사예술로서 두 장르가 벌이는 경쟁, 누벨 바그나 누보 로망이 시도한 장르의 랑데부를 분석했다. 소설과 영화의 거리를 검토하는 장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영화 <프라하의 봄>, 구효서의<낯선 여름>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견주었다. [방현석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김혜리
문자와 이미지의 이질적인 권능,<소설의 길 영화의 길>
-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1999년부터 대학교지에 만화를 발표하다가 2002년 신문연재소설 삽화를 맡았고, 2003년부터 인터넷 뉴스사이트 프레시안에 <십자군 이야기>를 연재하더니 8개월 만에 프롤로그와 부록을 덧붙여 단행본을 묶었다. ‘유쾌한 지식만화’라는 카피가 이리도 잘 어울릴까. 단숨에 읽어나가는 <십자군 이야기>는 무지하고 완고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역사의 진실이라는 ‘지식’을 선사한다. ‘십자군’이라는 정의의 아이콘이 가장 추악하고 반문화적인 존재였으며, ‘아랍’이라는 ‘악의 축’이 문화적 관용의 존재였다는 점이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뽑아낸 듯한 독창적인 그래픽을 통해 전달된다.불편한 것은 중세의 이야기가 오늘의 현실과 유사하게 오버랩된다는 점이다. 군중십자군의 의미없는 학살이나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의 학살이나 무엇이 다를까? 전쟁의 광기에 집착하는 인간에 대해 회의하게 한다. <십자군 이야기>는 ‘반전’을 전면에 내세워 웅변하지 않지만
지식만화의 새로운 발걸음, <십자군 이야기>
-
<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소년탐정 김전일>이 무대에서 사라진 지 3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하게 짜여진 범죄를 명쾌하게 해결해온 소년 김전일의 명성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의 팬들은 괜스레 ‘김전일 음모론’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책가방 숫자보다 시체 숫자가 많아 보이는 학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연쇄 살인범의 밀집도, 탐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최대한의 배려를 한 것이 아니면 무의미할 정도로 복잡한 트릭. 혹시 이 범죄들의 배후에 김전일 자신이 개입되어 있는 게 아닐까? 왜 그가 가는 곳마다 살인이 줄을 잇는가? 물론 작품 내의 ‘김전일 배후론’은 시니컬한 가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품 바깥에서는 양상이 다르다. 우리는 ‘김전일 바이러스’라는 강력한 균이 수많은 만화가들을 감염시켜 살인의 양산체제를 가동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김전일의 신화를 함께 만든 창작자들 역시 바이러스의 항체를 만들지 못한 것 같다. 게다가 지금은 둘로 나뉘어져
김전일의 후계자는,바로 당신!<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
-
베르나르 포콩 지음 I 심민화 옮김 I 마음산책 펴냄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1950∼)에게는 순간을 포착한다는 말보다는 창조한다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그는 메이킹 포토 혹은 미장센 스타일, 그러니까 연출 사진 혹은 장면 만들기 스타일로 유명하다. 햇빛이 곱게 스며든 방에 개어진 옷가지들이 무지개색 층을 만들며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 예쁜 방 모습 옆에 포콩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언제나 이 생각, 눈만 감으면 될 것 같은, 그리고는 꿈속에서 사랑했던 사람들,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들, 그리고 젊음만 되찾으면 될 것 같은 생각.’포콩이 가장 사랑했던 시간이 유년과 청춘의 시기라는 점, 그러니까 이미 지나가버려 다시는 살 수 없는 부재의 시간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만든다. 앞서의 예쁜 방 외에도 활활 불타는 방, 어질러진 방, 빛이 가득한 방, 영상이 일렁이는 방 등, 다양하게 창조된 순간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그 공간을 통해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
흔적을 통해, 부재를 통해 이야기한다 <사랑의 방 : 베르나르 포콩 사진집>
-
-
탐정은 초능력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추리소설 속에서는 그렇다. 누군가가 밀실에서 죽었다면, 거기에는 트릭이 있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염동력이나 바늘을 온몸에 꽂은 인형의 주문에 의해 살인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원래 추리라는 장르는 기괴한 미스터리의 범죄를 ‘이성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의 수사관들은 이러한 신비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도 수사가 난관에 봉착하면,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이용해 범인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진다. 이러한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만화들도 없지 않다. <미스터리 극장 에지>는 범행 현장에 남은 물질에서 생각의 잔상을 읽어내는 사이코메트리로 범인을 유추한다.<심리수사관 아오이>에서는 범죄의 마음을 품은 자의 얼굴에서 괴물의 형상을 읽어내는 소년의 도움을 받는다. 이 초능력을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만들어내면 안 될까?시미즈 레이코의 새 연재작 <비밀>
죽은 자는 알고 있다,시미즈 레이코의 <비밀>
-
코믹스(www.comix.co.kr)코믹스가 또 한번 모습을 바꿨다. 1994년 신일섭, 강성수, 오영진이 주축이 되어 무크지 <만화실험 봄>을 펴낸 뒤 1997년 <히스테리>로, 1998년 <지하만화 바나나>로, 1999년 웹사이트 ‘코믹스’로 변신한 뒤 2001년 계간 <코믹스>를 펴내고, 다시 웹으로 돌아와 모습을 바꾼 것이다. 그들은 자존심과 깡으로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겨냈다. 그 중심에는 만화가이자 퍼포먼서인 신일섭이 있다. 나는 그와 그들이 앞으로 10년도 더 넘는 세월이 흘러도 그들이 하고 싶은 ‘코믹스’표 만화를 창작할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10년 동안 그와 그들이 보여준 에너지는 앞으로 10년을 보장하고도 남는다.코믹스는 한국 언더그라운드 만화, 독립만화, 비주류 만화의 ‘혼’이다. 그리고 신일섭은 그 혼을 지탱해온 불멸의 에너지다. <만화실험 봄>을 거쳐 <히스테리>로 진행될 쯤, 신일섭은 만화보
비주류의 혼
-
<세계를 매혹시킨 반항아 말론 브랜도>
전기처럼 깨지기 쉬운 장르도 드물다. 사실 정보와 작가의 주관 사이에서 외줄을 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생존 인물이라면 외줄은 더욱 가늘어진다. <세계를 매혹시킨 반항아 말론 브랜도>의 저자 패트리샤 보스워스는 그런 외줄에 올랐다.
대부분의 전기는 인물의 어린 시절 경험이 이후 삶에 끼친 심리적 영향을 거르지 않는다. 어머니를 학대하고 아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아버지. 젊은 말론 브랜도에게 배우의 길은 그런 아버지를 향해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걸 시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브랜도의 분장사로 40년을 함께한 필립 로즈가 거든다. “나는 말론에게 아버지를 향한 분노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을 가르쳐줬고, 그가 창조적으로 그 분노에 물꼬를 트도록 도와주었다.”
전기 읽는 재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시시콜콜한 일화들이다. 브랜도 특유의 툭툭 끊기는 웅얼거림까지 흉내내는 제임스 딘에게 브랜도는 엄한 표정
분노를 스크린에 옮기다,말론 브랜도
-
작가 이사벨 아옌데는 1973년 9월11일은 “내 삶을 도끼로 두 동강낸 것과 같았다”고 썼다. 그녀는 칠레 민중이 ‘동무 대통령’이라고 불렀던 아옌데의 조카였고, 9월11일 일어난 피노체트의 쿠데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날 이후, 이사벨 아옌데에게 “글쓰기란 항상 생존의 연습”이 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는, 잃어버린 것들을 되살리는, 생존으로서의 글쓰기. 아옌데 정부에 참여한 또 한명의 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도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에서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수치를 느끼며 달아난 그는 숨어 있던 은신처 서가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고 내면에 품고 있는 것들은 그렇게 쉽사리 지워질 수 없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과거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도르프만은 과거를 감당하지 못해 죽음으로 뛰어들거나 자살해버린 동지들과 달리 아직도 살아 있다.도르프만은 영화 <시고니 위버의
살아남은 자의 고통,그리고 글쓰기,<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
만화: 이미지 기반 대중문화의 차세대 콘텐츠지난 11월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코엑스 컨퍼런스센터 402호에서 대규모 국제세미나가 열렸다. 책임을 맡고 있는 연구소에서 몇 개월간 정성을 들인 행사였다. 가장 공을 들인 지점은 섹션의 구성이다. 1주제인 만화와 이미지는 만화의 미학적 특징을 고민해보는 자리였고, 2주제인 만화의 진화는 디지털과 만화가 만나는 만화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으며, 3주제인 만화산업의 세계화는 다양한 문화권의 만화교류에 대해 짚어보는 자리였다. 이 주제를 이틀에 걸쳐 각각 4시간씩 발제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이를 위해 벨기에, 프랑스, 미국, 일본, 한국의 연구자와 실무자들이 참여했다. 일본인 발제자 호소가야 아쓰시를 제외한 다른 외국인 발제자들은 모두 한국을 처음 찾았지만 만화에 대한 진지한 열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그들 역시 우리의 열기에 화답하듯 열정적으로 발제와 토론에 임해주었다. 주제별로 발제한 대략의 내용과 토론된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
만화를 읽다,제5회 청강문화산업세미나
-
미국 루이빌 출신의 인디 뮤지션인 제이슨 노블과 줄리아드 출신의 비올라 주자 크리스천 프레데릭슨이 피아노를 치는 레이첼 그라임스를 만나 결성된 레이첼스는 기본적으로 피아노와 첼로, 비올라의 3중주에 기타, 베이스, 드럼, 신시사이저 등 밴드 중심의 음악에서 흔히 쓰이는 악기들을 뒤섞어 운용한다. 레이첼스의 음악을 들으면 토토이즈나 바도 폰드 같은 포스트록 계열의 감수성으로 에릭 사티풍의 선율을 다시 써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쨌든 그들의 음악 역시 일종의 ‘퓨전’이다. ‘일종의’ 퓨전이라고 말한 이유는, 글 끝에 나온다.이들의 음악은 두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는 로큰롤 자체의 해체이다. 1990년대 들어 미국 록의 가장 진보적인 사명의 하나는 바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확고해진 록이라는 개념 자체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해체하는 일이었다. 이를 수행한 뮤지션들이 바로 포스트 록 계열의 음악을 구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음악은 해면체 같은 리듬의 이완과 미니멀리즘적인 단
균열이 낳은 퓨전,레이첼스 내한공연
-
막시밀리언 헤커의 <Infinite Love Songs>와 다음 앨범인 <Rose>우울의 예술적 힘을 발견한 것은 낭만주의이다.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이 ‘안으로 타들어가는 불’은 근대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는 데 가장 중요한 붓의 하나가 된다. 유배당한 알바트로스의 날갯짓으로 근대 예술의 존재이유를 자리매김한 보들레르도 우울을 노래했지만, 역시 우울의 고향은 낭만주의의 땅 독일이다. 우울의 끝은 자살이다. 슈만과 베르테르. 자살은 시궁창에서 사는 고귀한 영혼의 상승에 불을 붙이는 로켓연료다. 음유시인의 전통과 사회와 화합하지 못하는 우울한 낭만주의 예술가의 그림자가 오늘 탈현대의 포크 가수들에게까지 드리워진다. 근조 엘리엇 스미스.우울의 메카 독일 땅에서 우울한 청년 가수 하나가 음반을 낸 것이 눈에 띈다. 이름은 막시밀리언 헤커(Maximilian Hecker). 스물네살의 꽃다운 나이인 그의 음반 두장이 거의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라이선
독일에서 온 우울청년,막시밀리언 헤커의 새 앨범
-
내가 `에이전트` 역할을 한다고?지난 6월 말 전세계 <스타워즈> 팬들은 경이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스타워즈>의 온라인 게임판인 <스타워즈 갤럭시즈>의 서비스가 시작되었던 것. 한국을 중심으로 해서 전세계적으로 이른바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가 선풍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스타워즈>라는 차별화된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MMORPG의 출시는 비단 <스타워즈>의 팬들뿐만 아니라 게임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조지 루카스가 이끄는 루카스 아츠사와 소니 온라인엔터테인먼트가 2000년부터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통해 개발을 진행해왔고, 그 과정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생중계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기다리던 이들의 기대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분열된 제국>(An Empire Divided)이라는 부제를 가진 <스
롤플레잉 게임 개발중인 <매트릭스>
-
만화는 아이들과 친하다. 상상력이 고갈되고 사고의 체계가 굳어버린 어른들에게 만화는 읽히지 않는 난독의 텍스트이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어떤 만화라도(설령 그 만화의 수준이 조악하다 해도) 놀라운 상상력의 바다다. 어린이들의 상상력, 특히 이미지 언어에 대한 열려 있는 독해력은 만화의 칸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유영한다. 자유롭게 열려 있는 그래픽, 특정한 이야기를 분할된 화면에 나누는 연출, 말풍선이라는 매우 독특한 대화표현방법, 효과선이나 효과음처럼 기호의 힘을 활용한 표현방식은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왼쪽부터) <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 와 <곰>레이먼드 브릭스의 <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와 <곰>은 오랜만에 만난 어린이 만화다. <곰>은 곰돌이와 함께 잠이 든 틸리에게 거대한 곰이 찾아오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효율적으로 나뉜 칸 속의 세밀한 파스텔 작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거대한 곰이 창문으로 들어오
`그림책`이 아니라 만화다,<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와 <곰>
-
그렉 이건의 <쿼런틴>은 사립탐정일을 하고 있는 은퇴한 테러 전담 경관 닉이 병원에서 갑자기 실종된 여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으며 시작된다. 어떻게 보면 뻔하디 뻔하다고 할 수 있는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도입부이고 이건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우선 쓰기가 쉽고 진짜 추리소설에서는 굉장히 뻔한 장르 공식이라도 SF와 같은 다른 장르와 결합하면 그 진부함이 쉽게 감소되기 때문이다.그런 걸 생각해보면 이건의 안전한 선택은 오히려 최선이다. <쿼런틴>에서 이야기의 독창성이나 힘, 캐릭터의 개성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닉의 캐릭터나 그의 고민, 실종된 여인을 찾아나서는 그의 수색은 점점 무게를 잃고 독자들 역시 그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이 소설이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다른 데 있는데, 만약 정말로 독창적인 스토리 라인이 이 소설에 따라주었다면 오히려 독자들의 시선은 엉뚱한 데로 분산되었을 것
미래사회에 대한 예언 혹은 숙고,그렉 이건의 SF스릴러 <쿼런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