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에 의해 발표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갈한 도덕적 태도와 높은 명망을 지닌 한 남자가 어떤 약품의 도움으로 억눌려 있던 악의 자아로 변신하게 된다는 테마는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새로운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다채로운 재능의 그래픽 아티스트 로렌초 마토티와 시나리오 작가 제리 크람스키가 함께 만든 만화 <지킬과 하이드>가 그 훌륭한 예다.
세기말 태생으로 어마어마한 신분과 재산을 상속받은 ‘나’에겐 찬란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다만 내 안의 지칠 줄 모르는 활기와 쾌활한 성격은 대중 앞에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또 다른 욕구와 맞서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기쁨을 감추기 시작한 나는 어느 순간 스스로가 심각한 이중생활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서로 다른 두 자아를 분리시킬 약품을 만들어내게 된다. 나의 욕망은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 강했던 것이다.
고풍스러운 말투와 세세한 감상을 요구하는 풍만한 이미지들. 유럽적인 태도가 매우 강한 이 작품을 화장실에서 읽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표현주의 미술이나 무조의 음악을 차가운 태도로 곱씹으며 감상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독해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몇번씩 되씹어 읽을수록 입체파의 그림 같은 분열된 이미지들이 새로운 형상으로 재조립되고, 폭풍처럼 내몰아치는 두려운 음조가 귓속에 생생히 메아리친다. 불과 60여쪽의 짧은 이야기지만 싸움의 양상은 실로 격렬하다. 선과 악, 이성과 감정, 창조주 아버지와 말썽꾼 아들, 귀족적 허위와 뒷골목의 활력과 같은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 모두 그 안에 있다.
하이드씨로 변해가는 지킬 박사의 내면을 보랏빛과 주홍빛을 주조로 한 불투명 색연필의 질감으로 표현하고 있는 마토티는 이미 <뉴요커> <코스모폴리탄> 등의 매체들을 통해 이름을 떨치고 있는 다채로운 경력의 아티스트다. 그의 오랜 파트너인 시나리오 작가 크람스키는 이 고전의 배경을 1930년대 나치 시대의 유럽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인종주의적 혈통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독일 대사와 뇌쇄적인 눈으로 충동질해오는 그 부인을 통해 현대적인 의미를 추구해간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manamana@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