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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만화’의 고루함을 돌파하다학습만화라 불리는 상당수의 만화들은 4×6배판의 큼지막한 크기에 좋은 종이를 쓰고 컬러로 인쇄한 모양새를 갖고 있다. 이 학습만화들은 ‘학습’이라는 강박증에 시달려 만화의 재미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어린이들이 좋아하고 잘 본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어린이들은 이미지 언어에 대해 우호적이기 때문에 잘 보는 것이지 어정쩡한 학습만화가 재미있어서 보는 것은 아니다. 학습 강박증은 만화의 완성도를 곧잘 무시하곤 하는데, 몇 페이지에 한번씩 학습코너를 집어넣으면 만화 자체의 완성도를 대거 상쇄할 수 있다는 완곡한 믿음, 혹은 뻔뻔스러움을 발견할 때는 당혹스럽기도 하다.만화에 학습만화란 있을 수 없다. 만화는 그냥 만화다. ‘학습’이라는 당혹스러운 접두사가 어울리지 않는다. 학습소설? 학습영화? 학습노래? 어울리는가? 당연히 어울리지 않고, 이런 발상을 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만화에만 학습만화라는 용어가 자연스러울 정도로 확산된 것
박시백 <만화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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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 내 방식, 나의 인생, 나의 운명, 어차피 내가 갈길 뒷걸음질은 싫어. 내 운명 죽음이라도 상관없어, 상관없어. 카르멘의 길을 갈 뿐.”(뮤지컬 <카르멘> 중 ‘내 길을 갈 뿐’) 이 여인, 참으로 대담하고 거침없다. 살아가기 위해 사랑하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고, 미친 듯이 사랑하지만 그 틀에 얽매이는 법없이 사랑하고 싶은 만큼만 사랑하다 마지막 감정의 방울까지 말라붙는 순간 가차없이 다른 사랑을 찾아 날아가버리는 여자 카르멘. 1845년,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중편소설 <카르멘>에서 태어난 집시 여인 카르멘은 15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대담하고 치명적인 열정의 또 다른 이름이다. 빌표 당시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소설 속의 카르멘을 기억하게 만든 것은,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일 것이다.1875년에 나온 이 오페라는 스페인 세비야 지방을 무대로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매혹적인 집시
설레는 음악과의 동침,창작 뮤지컬 <카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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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노래, 새로운 질감한영애는 참 천연덕스럽다. 물론 청중과 마주한 채 음악과 실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공연 무대에서 뮤지션들은 어떤 형태로든 천연덕스러워지겠지만, 그는 유난히 그래 보인다. 지난 7월11일과 12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Full Moon’ 콘서트에서도 그는 여전했다. 담양에서 공수해왔다는 대나무와 달을 배경으로, 청록과 보랏빛 조명 아래 만월의 숲을 연상시키는 무대를 ‘사뿐히 즈려 밟고’ 걸어나온 한영애. 그가 신묘한 의식을 치르는 샤먼처럼 요령을 흔들며 서서히 객석을 향해 몸을 틀고 “아름답고 소중해 단 한번 열고 닫는 무대/너와 나 둘이는 멋진 주인공이네” 하는 <감사의 마음>을 부르는 순간부터, 그의 목소리는 주술을 걸어온다. 몸 속 어딘가의 심연에서 길어올린 양 깊고, 허스키하면서 시원스레 뻗어나오곤 하는 음색. 그래서 드럼 비트를 반주삼아 마임 같은 몸짓을 해도, 그 흔한 안녕하세요, 한마디 없이 7∼8곡을 내리 불러도, 객석의 눈과
한영애의 트로트 리메이크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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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전사가 아니고, 소녀는 천사가 아니야만화에서 배우고 만화로 그리는 작가들이 있다. 그 만화들은 편안하고 익숙하다. 장르의 규칙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반면에 인생에서 배우고 만화로 그리는 작가들이 있다. 그 만화들은 거칠고 낯설다. 우리를 만화 속에 빠뜨리지 않는다. 잠깐 적셨다가 인생으로 돌아가게 한다. 나는 어느 쪽이 좋다고 단정짓지 않는다. 다만 그 앞쪽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말한다. 후쿠시마 사토시의 단편 연작집 <소년 소녀>(북박스 펴냄)는 둘의 경계에 서 있다. 그리고 압도적이지 않은 쪽에 조금 기울어 있다.<소년 소녀>는 여름방학과도 같은 만화다. 거친 연필선이 느껴지는 목차의 오프닝에서부터 분명하다. 여름 어느 날 자전거를 탄 소년들이 버려진 저택을 찾아온다. 가위바위보를 하고 서로의 등을 떠밀며 안으로 들어간다. 깨진 창으로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정체불명의 엔진, 인체의 해부도를 보여주는 책, 그리고
후쿠시마 사토시의 <소년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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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히긴스 트리오 <Dear Old Stockholm>에디 히긴스 쿼텟 <My Foolish Heart>눅진하게 들러붙는 장마철 밤 공기를 위한 처방전. 1) 샤워를 하고 깨끗한 면옷으로 갈아입는다. 2) 서늘한 음악을 틀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눕는다. 이 글은 바로 그 서늘한 음악을 고르는 하나의 가이드이다.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쉽게 즐길 수 있는.주로 일본의 비너스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해온,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Dear Old Stockholm>과 에디 히긴스 쿼텟(리드 피아니스트인 에디 히긴스를 제외하면 나머지 멤버가 모두 다르다)의 <My Foolish Heart>가 강앤뮤직에서 발매되었다. 피아니스트이자 트리오와 쿼텟을 리드하는 에디 히긴스는 1932년생 할아버지로, 오래 71살이 되었다. 에디 히긴스는 50∼60년대의 런던에서 전성기를 보냈는데, 당시 ‘런던 하우스’에서 하우스 트리오를 1
스탠더드가 주는 감동,에디 히긴스 트리오·에디 히긴스 쿼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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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출판사에 침을 뱉으마<나인>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여자만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사, 평론, 패션화보에 폭넓은 스타일의 만화까지를 보여주었던 그야말로 ‘잡지’였다. 젊고 새로운 시도는 빛이 났었다. 상업적 만화의 독법에서 벗어난 만화들도 대거 소개했다. 그런데 이 잡지가 너무 빨리 시장에 나왔었을까, 독자들이 점차 잡지를 외면했다. 결국 <나인>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좋은 친구를 잃는 기분. 한달의 즐거움을 빼앗기는 기분. 그보다 더 큰 앞으로의 희망을 차압당하는 기분이었다.하나의 잡지가 시장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낯익은 연재작들에 대한 기대가 사리지고, 완결을 보지 못하는 서운함과 이 잡지를 통해 ‘만화’를 그릴 수 있었던 많은 작가들의 앞날에 대한 당혹감이 매우 복합적으로 작용해 생체리듬을 떨어뜨린다. 그깟 잡지쯤을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타박을 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잡지는 다양한 만화가
<영점프> 종간과 한국 만화시장 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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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도 없다. 종횡무진하며 인물과 공간의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비춰주는 카메라워크도 없다. 시신경이 느슨해질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장면과 장면 사이를 매끄럽게 건너뛰는 현란한 편집도, 록시의 허름한 방에서 벨마의 쇼 무대, 어두운 감옥, 변호사 빌리의 고급스런 사무실과 법정으로 자유자재로 바뀌는 세트도 없다. 하나의 세트에서 라이브로 펼쳐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카고>와 시공간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영화 <시카고>는, 같고 또 다르다. <시카고>는 1920년대의 시카고, 각각 다른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 보드빌 스타 벨마 켈리와 스타 지망생인 록시 하트, 두 여성의 재판과정을 통해 쾌락과 욕망의 베일에 쌓인 당시 미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풍자를 화려한 재즈 선율과 역동적인 춤의 언어로 풀어낸 쇼. 7월2일부터 8월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는, 런던 투어팀의 내한공연으로 뮤지컬 <시카고>가 무대에 오른다.알려져 있다시피 뮤지컬 <
올 댓 시카고,뮤지컬 <시카고> 런던팀 내한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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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였지만, 경마와 도박에 빠져 있었죠. 할머니댁 앞이 스트립 극장이었고, 어머니가 파트 타임으로 유곽청소를 하는데 저도 곧잘 따라가곤 했습니다. 동네는 절반이 철공소, 절반이 유곽이었습니다. 인더스트리얼 뮤직 같은 곳이었죠. 프레스 기계 때문인지 손가락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옆집 아주머니는 한쪽 눈이 의안이었는데 가끔 컵에 담가두더군요. 중학교 때는 끔찍하게도 이지메를 당했고, 고등학교 때도 가장 친한 친구가 앞장서 무시하기 시작해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습니다. 학교는 중퇴하고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고 말았죠. 음악을 하던 남편은 애를 무릎에 앉혀본 적도 없고, 한번은 애를 봐달라니까 귀에 대고 기타를 친 적도 있습니다. 둘이서 정신과에 간 적도 있고, 더러워지고 싶지 않았지만 제 팔에 자해를 하기도 했죠. 결국 속여서 이혼 서류를 만들었습니다.어쩐지 눈물 짜는 <오싱>류의 스토리를 읊어댄 듯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픽션이 아니다. 만화가 다다 유미
태양 따위는 뜨지 않아도 좋다니까,다다 유미 걸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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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의 미증유의 명반 에 <줄리아>라는 노래가 있다. 존 레넌은 “줄리아, 줄리아, 대양의 아이(…), 조가비 눈, 바람 같은 미소가 나를 부르네…”라고 노래한다. 이 아름다운 사랑노래의 주인공이 바로 대양의 아이(한자로는 洋子), 다시 말해 오노 요코다. 아무나 이런 사랑 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나? 아니지. 오노 요코니까 주인공이지.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오노 요코는 그동안 이상하리만치 일종의 ‘점지된 공주’ 취급을 받아왔다. 이 점지 설화에는 서양 사람들의 의심과 오만이 깃들어 있다. 존 레넌의 애인이 동양 여인? 설마. 언젠가 꿈에서 깨어나 헌신짝처럼 버릴 거야….오노 요코는 사실 이런 분위기를 존 레넌의 애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참아야 했다는 것을 최근에 발행된 그녀에 대한 평전 <마녀에서 예술가로, 오노 요코>(클라우스 휘브너 지음/ 장혜경 옮김/ 솔 출판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요코는 말한다. “나에 대한 반감은 적어도 세 종류입니다. 반아
그리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마녀에서 예술가로, 오노 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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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한국 만화가 화려하게 피어나던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에 찬, 약간은 시기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던 한국 만화의 발화는 만화, 더 나아가 문화의 패러다임 전환과 함께했다. 한국사회에 이미지 언어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으며, 흑과 백의 대결적 취향에서 다채로운 게릴라적 취향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1995년을 한국 만화 발화의 정점을 만든 행사가 있었으니, 그것은 정부 주도로 개최된 SICAF(당시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였다. 페스티벌이라기보다는 화려한 대중 엑스포에 가까웠던(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첫 번째 SICAF에는 몇개의 기획전시가 개최되었는데, ‘신세대관’에서 ‘피어오르는 9인전’이라는 젊은 작가전이 열렸다. 최호철, 명, 박상선, 최민호, 유승하, 오영진, 박정훈, 이지미, 박형동 모두 9명의 작가였다. 상당수가 미술을 전공한 이들은 평면과 입체를 아우르며 만화의 새로운 가능을 보여주었다.8년의 스펙트럼그로부터 8년이 흐른 2003년 6월, 최민호
그 작가의 만화일기,최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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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에 있었던 저 불의의 ‘덜 마무리된’ 음원 유출 사건을 생각해보면 이번 대망의 라디오헤드 새 앨범의 제목 ‘Hail To The Thief’, 즉 ‘도둑에게 경배를’이란 타이틀은, 조지 부시의 석연찮은 미국 대선 승리에 대한 심기 불편한 일갈이었던 원래 의미의 틀을 멋대로 박차고 나온 그들만의 짓궂은 농담이거나 그도 아니면 차라리 놀라운 예언이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이미 모든 음악이 파일화되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는(듯한) 인터넷 세상에서 이런 일이 어찌 청천벽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마는 록계의 날카롭지만 어쨌든 고집불통 백면서생들인 라디오헤드로선 금전적 문제만큼이나 자신들의 컨트롤 영역을 벗어난(혹은 침범당한) 당혹스러움을 우선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한데 그 사건으로 그들이 배운 교훈은 무엇일까. 혹은, 그런 게 있을까. 그 해프닝이 이들의 판매고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사실 확신하기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록으로의 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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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겨울인데도 먼저 피어준 동백꽃, 자전거를 타고 오른 언덕길의 석양, 욕실 바닥에서 헤엄치는 금붕어 모양의 타일. 우리의 주인공들에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함께했던 누군가가 사라진 지금, 그 하나하나는 가슴을 도려내는 단도가 되어버렸다. 토오루와 메구는 엄마를, 켄지는 갓 결혼한 부인을 잃어버렸다. 엄마이면서 부인이었던, 그들 사이를 잇는 유일한 나사였던 하츠코는 그해 유행한 인플루엔자로 어이없게 세상을 떠났다. 10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젊은 새 아버지와 알 건 다 아는 고등학생 남매, 알량한 호적을 떠나면 연결될 어떤 끈도 없는 이들이 같이 살아야 한다. 도대체 그럴 필요가 있는 걸까?히구치 아사의 <가족, 그 이후>(학산문화사 펴냄)는 제목 그대로 한 가족이 무너져버린 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새파랗게 젊은 남자와 결혼한 엄마가 두 아이를 남겨두고 갑작스레 죽어버렸다. 남자는 법적인 아버지가 되어 남매와 살아간다. 사실
엄마 없는 지붕 아래,히구치 아사의 <가족,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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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사람 만나는 횟수는 늘지만 각각의 만남에 투자하는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그나마 직접 만나는 경우보다 전화나 메일로 접촉하는 기회가 더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짧은 시간에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상대를 관찰하는 동물의 습성이 나오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보여질 때는 시선의 입맛에 맞게 연기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연기가 있고, 나는 그 너머가 늘 보고 싶다.매개의 시대, 미디어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 배우 시대. 이런 말들이 나는 자꾸만 ‘뺑끼의 시대’로 들린다. 관중의 요구에 맞게 유연한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세련된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로 인정되기보다는 천박한 화장술 내지는 사기술로 보인다. 그런데 나는 종종 내 안에서도 그런 연기를 느낀다. 그래서 누군가가 한 말 “사는 게 레토릭이여” 이런 말로 물타기를 하며 이 문제를 회피한다. 당대의 형식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나키의 고독을 의미한다. 나는 그 지경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강유원
`뺑끼`에 저항한다,강유원 서평집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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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만난 힘이 넘치는 신인이다. 스스로 ‘늦깎이 데뷔’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도깨비 신부>는 신인의 데뷔작치고는 꽤 숙성된 작품이다. 또한 상투적인 동어반복의 만화들이 넘치는 요즘 데뷔작의 미덕을 온전히 간직한 보기 드문 작품이기도 하다. 원숙함과 신선함이라는 낯선 두개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도깨비 신부>는 자칫 이국의 옷을 입은 퇴마사(클램프의 <신춘향전>을 보라!)로 전락해버리기 십상인 세습무의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매력적’이라 했지만 할머니, 어머니에 이어 손녀가 신내림의 기운을 받아 낯선 것들을 본다는 설정이나 영을 보는 능력을 터부시하는 상황은 무척 익숙하다. 무녀인 할머니, 무녀의 길을 거부해 잡귀잡령의 지배를 받아 일찍 죽고 만 어머니, 할머니만큼 신기가 강한 손녀, 그리고 딸과 상관없이 도시에서 재혼한 채 살고 있는 아버지라는 인물구도는 어떤 갈등구도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가를 짐작게 해준다. 하지만 이런
조선의 도깨비들이 춤춘다,말리의 <도깨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