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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저자가 세상을 떠나고 50년이 지난 책은 저작권이 소멸된다. 그런 해외 도서는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18세기 영국 정치가인 필립 도머 스탠호프 체스터필드가 30년에 걸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1774) 출간된 〈Letters to His Son>이 있다. ‘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사랑하는 아들아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지혜로운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보내는 47가지 삶의 길잡이’,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 인생은 이렇게 살아라’, ‘내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아들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아버지란다’ 기타 등등. 각기 다른 제목을 궁리하느라 애썼을 여러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경의를!이번에 나온 책은 1929년에 초판이 나온 영국 덴트판을 저본으로 완역한 것인데, 발췌 번역한 일역판을 우리말로 옮긴 중역본이거나 그 중역본을 짜깁기한 책들이 예
18세기 영국 귀족의 유익한 잔소리, <아들아! 성공의 문은 이렇게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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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재미있다. 160쪽 정도의 분량이 한 호흡에 읽힐 정도니 어지간히 재미있다고 해도 좋겠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El Cartero De Neruda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민음사 펴냄)라는 제목을 듣고 ‘이게 무슨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영화로 만들어진 <일 포스티노>를 떠올리면 쉽겠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모든 언어권을 통틀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한 파블로 네루다라는 천재적 시인과 어느 시골 우체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어느 무명의 저널리스트의 회고로 시작한다. 1970년대 초 칠레의 작은 어촌 마을에는 파블로 네루다에게 우편물을 전달하는 것이 유일한 업무인 마리오 히메네스가 있다. 마을의 처녀 베아트리스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소녀를 위한 시를 써달라고 조른다. 네루다의 도움으로 사랑에 성공한 우체부는 결혼하기에 이른다. 이후 네루다가 대통령
어느 우체부가 전하는 ‘시적 세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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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과 곰팡이의 여름이다. 이 지긋지긋한 계절이면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 열대야, 모기, 팥빙수, 그리고 뭐가 있을까? 빠뜨릴 수 없지. 이토 준지. 여름 장르의 핵은 호러, 호러 장르의 핵은 이토 준지.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가? 30도를 오르내리는 초열대의 밤에 찾아오는 이토 준지는 반갑기도 하고 꺼림칙하기도 하다. 그의 만화가 주는 쾌(快)야 분명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만만치 않은 불쾌(不快)를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단편집 <어둠의 목소리>(시공 코믹스 펴냄)도 그 규칙을 조금도 깨뜨리지 않는다.그 옛날 홍수에 떠내려 보낸 부인을 잊지 못해 환상의 강물 위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노인, 기름에 절어 있는 고깃집에서 밤마다 식용유를 훔쳐 먹다 기름덩어리가 되어가는 아들, 동료들을 위해 피를 토해주는 흡혈 박쥐에 매료되어 기묘한 구애를 하고 있는 남자, 동네의 폐가에 만들어진 도깨비집에서 떠돌이 가족의 무시무시한
초열대야에 찾아가는 호러 왕국, 이토 준지의 <어둠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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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책 판형의 여성 만화월간지 창간, 유통은 정기구독자 중심으로전사자가 속출하는 전장에서 새로운 잡지가 창간됐다. <허브>(Herb)라는 예쁜 이름의 잡지는 초록색으로 제 색을 무장하고 손에 잡히는 소설책 판형에 256쪽 분량으로 태어났다. 생존 방법은 인터넷을 통한 정기구독. 5천명의 정기구독자가 목표란다. 참 소박하다. 이름처럼 작고 소박한 꿈이다. 만약 5천의 독자로 이 잡지가 생존된다면, 나는 그중 1%라도 모아볼 참이다.<허브> 창간호에는 모두 12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보통 만화잡지를 창간하면 간판으로 한두명의 작가를 민다. 잡지 표지에도 간판 작가의 작품은 큰 활자로 적시된다. 하지만 <허브>는 <오후>에서 보여준 전략을 따라 모든 작가의 비중이 동일하다. 즉, 김진에서 난나에 이르는(배열 순서임) 12명의 작가가 자기에게 주어진 페이지에서 최선의 경주를 다한다는 말이다. 작품의 다양성은 만족이다. 연재극화와 단편의 배율도 적절
<허브> 잘되기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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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주제를 철학적으로 다루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 알랭 드 보통이 이번에는 여행을 주제로 문학, 예술, 철학 그리고 자신의 여행 체험을 엮었다. 여행의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각각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상응한다. 여행의 시작은 어디인가? 왜 여행을 떠나는가? 여행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여행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은 어떻게 간직할 수 있는가?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어디인가?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과 기대가 막상 실제로 여행하면서 무너지거나 변하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드 보통은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을 꿈꾸며 ‘원시적인 순수와 낙관’을 찾아 바베이도스로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지의 모습에 실망하고 만다. 여행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라는 게 드 보통의 통찰이다. 자유로운 상상과 고독을 즐기면서 진정한 자아를 만나게 해주는 여행,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으로의 여행이 여행의 본모습이
자유로운 상상과 고독을 찾아서 떠나라! <여행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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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양쪽, 혜화 로터리와 이화동 사거리 사이에는 심야에 이륜차가 들어갈 수 없다는 표지판이 서 있다. 돌돌거리는 나의 스쿠터가 4년째 이곳을 굴러다니고 있지만 한번도 단속하는 걸 보지는 못했다. 다만 그 금지의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번쩍거리는 라이트를 달고 쇼바를 한껏 올린 모터바이크를 타고 미친 듯 중앙선을 넘나드는 폭주족들. 한때 이곳도 신천 등지와 더불어 폭주족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것이다. 그때 나도 그 미친 정신을 이해해보고자 밤새 ‘오빠 달려’ 하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이야기를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만 같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폭주족은 직업이 안 되는 걸까? 그러면 계속 달릴 수 있잖아.” 다카하시 쓰토무는 <폭음 열차>를 통해 1980년대 초반 도쿄의 소년 폭주족들을 그리고 있다. 한 영웅을 내세우기 위해 폭주족이라는 백그라운드를 잡은 게 아니라, 폭주족이라는 커다
폭주족은 직업이 안 되는 걸까? 다카하시 쓰토무의 <폭음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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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요정들의 말로 일루바타르라고 불리는 유일자 에루가 자신의 생각으로 아이누들을 만들었고, 그들은 그의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 음악으로 세상이 시작되는데 일루바타르는 아이누들의 노래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했고, 그들은 어둠 속의 빛을 보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이 그 아름다움에 반했고, 환상 속에서 시작되어 전개되는 그 역사에 매료됐다. 그리하여 일루바타르는 그들의 환상에 존재를 부여하여 공허 속에 위치시키고, 그 세상의 중심에 비밀의 불을 보내어 타오르게 했고, 그 세상을 에아라 불렀다.’<실마릴리온>에서 유일자를 대리하는 신들인 발라에 관한 이야기인 ‘발라퀜타’의 첫머리에 나오는 태초에 관한 이야기, 눈으로 볼 수 있는 환상의 음악이 존재가 되고 역사가 되어 시작되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반지의 제왕>에서 2년에 걸쳐 진행된 ‘반지 전쟁’ 이야기는 2만년이 넘는 세월에 걸친 이야기인 <실마릴리온>에서는
‘가운데땅’의 신화와 역사, <실마릴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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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3일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SICAF) 2004 코믹 어워드의 수상자가 발표됐다. 2001, 2003 SICAF 어워드 만화 공로상으로 진행되었던 상이 2004년부터 SICAF 코믹 어워드로 정리되고 대상, 작품상, 특별상 3개 부문의 7개 시상으로 정리되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번 상의 수상 항목과 선정된 작품들이다. 기존의 만화상과는 달리 작품상 부문에는 ‘장편&연재만화상’, ‘단편만화상’, ‘만화스토리상’, ‘졸업작품상’으로 나누어 ‘작품의 완성도’를 중점으로 심사했으며, 시장의 확산과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는 작품을 위해 특별상 부문(‘만화기획상’과 ‘새로운 발견상’)을 운용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2001년 길창덕, 김종래, 2003년 고우영에 이어 2004년에는 이두호가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80년대 이후 사극의 한길만을 줄기차게 고집해온 노장인에 대한 매력적인 헌사가 되리라고 본다. 작품상을 보자. 박흥용의 <호두나무 왼쪽길로>는 장편&a
우리 만화에 한국의 혼을, SICAF 2004 코믹 어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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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죠스> <탑건> <플래시댄스> …. 분명 당신의 머릿속에는 뭔가 불명확하지만 공통점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들이 떠오를 것이다. 좀처럼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강력한 이미지를 남기는 캐릭터,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영화 속 이미지가 연결되는 매혹적인 음악들, 단 몇줄만으로 줄거리 설명이 충분해지는 명쾌함, 영화 개봉에 추가되는 수많은 부가상품들, 그리고 박스오피스에서의 대단한 성공…. 그리고 이 모든 특징들을 포괄하는 단어, ‘하이 컨셉’(High Concept)이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영화 시장 조사 분석가로 일했으며 현재 노스텍사스대학교에서 라디오·TV·영화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인 저스틴 와이어트가 저술한 <하이 컨셉트>(저스틴 와이어트 지음| 조윤장·홍경우 옮김| 아침이슬 펴냄) 는 하이 컨셉 영화가 어떻게 후기 고전 할리우드영화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화산업의 성장과 관련을 맺어왔는가를 들
영화 시장을 주무르는 핵심 열쇠, <하이 컨셉트-할리우드의 영화 마케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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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악마’ 응원단은 치우천황을 그려넣은 깃발로도 유명하다. 불의 신이자 농업의 신인 염제(동이계)는 뇌우의 신 황제의 도전을 받고 패했다. 중국 산둥성 일대에 살던 구려라는 신성한 종족의 우두머리 치우(동이계)는 자신의 임금 염제를 위해 복수에 나선다. 그러나 치우는 ‘피가 100리나 흘렀다’는 탁록전쟁에서 황제의 군대와 접전을 벌여 패하고 만다. 중국에서는 이 승리로 중국 민족의 조상인 황제가 야만족(치우)을 물리쳐 문명의 제국 중국을 성립시켰다고 주장한다.염제나 치우는 은나라를 비롯한 고대 동이계 종족들이 숭배했던 신이다. 치우를 도운 풍백과 우사가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것도, 염제를 그린 벽화가 집안의 고구려 무덤(오회분)에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자비로운 염제가 황제에게 억울하게 축출된 한을 발산해버린 것이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수십, 수백만 인파의 거리 응원은 아니었을까? 중국 문학자 정재서 교수(이화여대)는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
동양의 마음과 상상력 읽기,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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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야 미노루의 팬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오리지널 <이나중 탁구부>의 골수팬이다. 그들은 이자와와 마에노가 벌이는 악취미 펑크 개그의 옹호자로, 이후 진지하고 어두운 세계로 변해가는 만화가를 못마땅해 한다. 두 번째는 <두더지>식의 암울한 청춘 만화의 지지자로 <이나중 탁구부>를 초보 만화가 시절의 치기 정도로 여긴다. 마지막으로 <이나중>에서 시작되어 <크레이지 군단> <그린 힐>로 이어지는 변화의 축을 자연스러운 전환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꾸준한 독자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모치즈키 미네타로(<드래곤 헤드>), 해롤드 사쿠이시(<벡>), 스기무라 신이치(<초학교법인 스타학원>)의 옹호자이기도 한데, 웃음과 비탄 사이를 오고가는 청춘의 위태로운 진동을 즐긴다.신작 <시가테라>(북박스 펴냄)는 이중 세 번째 부류의 독자들에게 가장 큰 지지를 받
나에겐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다, 후루야 미노루의 신청춘 <시가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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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익숙하지 않음에 불편할 것이다. 인물들도 이상하고, 배경도 그렇고, 이야기는 무언가 답답한 것 같다. 시각적으로 낯설어서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다. 톤도 없고, 때론 회색도 없이 흑과 백뿐이고, 명확한 직선도 없는 배경까지 모두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정송희의 만화는 무엇보다 작가 개인에 의해 그려진 ‘손맛’을 느끼게 해주는, 만화의 원초적인 힘을 보유한 작품이다.소박하지만 풍부한 그림으로 정송희는 삶을 미시적으로 바라보고, 기록한다. 표제작인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의 경우 어린 시절 각각 다른 성폭력의 피해자였던 여자와 가해자였던 남자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되돌아본다. <지나 사라지다>는 희생만을 강요당한 한 여자의 이야기다. <유년의 틈> 역시 어린 시절 상처받은 기억을 지닌 두 사람의 회상을 그린다. <누드모델>은 육체적 차이에 대한 타인의 폭력적인 발언에 대한 상처를 이야기하며, <그게 뭔지 몰랐어>는
나지막하게 미시적으로, 정송희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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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텁지근한 여름밤이다. 온몸에 달라붙는 불쾌의 점막은 몇번씩 찬물을 끼얹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과 <나이트메어> DVD를 시리즈로 돌려보아도 모니터 속의 핏방울이 컵라면 국물마냥 끈적거릴 뿐이다. 셜록 홈스와 애거사 크리스티는 언제 다 읽었는지 까마득하기만 한데, 이토 준지는 신작을 내놓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런 고민 속에 괴로워하는 당신에게 왔다. 우메즈 가즈오가 왔다.일본 괴기호러의 대명사, 우메즈 가즈오는 그동안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일본 만화가 중 가장 중량급의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그 독창적이면서 방대한 작품 세계를 둘러보면 데즈카 오사무를 제외하고 일본 만화계에 그만한 영향력을 행사한 만화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나중 탁구부>식의 악취미 과격 개그의 신기원을 연 <마코토 짱>, 세기말의 서바이벌 게임으로 <아키라>와 <배틀 로얄>에도 큰 영향을 준 <표류교실>과 같은 작품은 오히려
엄마, 빨간 마스크는 어디에서 왔어? 우메즈 가즈오의 <무서운 책>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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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4일 월요일. 그다지 소문이 빨리 퍼지지 않는 만화계를 온통 혼돈의 도가니에 빠뜨린 뉴스는 시공사발 ‘<오후>와 <비쥬> 휴간’ 소식이었다. 서울문화사, 대원CI, 학산과 함께 국내 4대 메이저 출판사로 불리던 시공사. 후발주자이지만 선두를 위협하는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던 출판사. 특히, 2001년 새로운 국장의 영입으로 고급 양장본, 일러스트레이션 북 등을 기획하며 침체에 빠진 주류 만화계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었다. 특히 연이은 휴·폐간 사태로 자괴감에 빠져 있던 만화잡지의 대안적 모델로까지 불린 격월간 만화잡지 <오후>의 창간은 시공사 만화사업의 꽃이었다. <오후>는 정확한 타깃 분석과 작품 기획, 컨셉과 디자인의 차별화, 그리고 효율적인 홍보로 일약 2003년의 성공사례로 떠올랐다. 그런 잡지가 1년을 못 넘기고 휴간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고, <오후>를 사랑하는 팬들이 모이는 게시판은 그야말로
이젠 어쩌란 말이냐, <오후> <비쥬> 휴간과 한국 만화의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