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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영일 선생의 <한국영화전사>(이영일 지음 | 소도 펴냄) 개정 증보판이 나왔다. 단아한 하얀 표지에 이규환 감독의 1939년작 <새 출발>의 촬영현장이 담겨져 있다. 1969년 한국영화 5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저술된 책이 35년이 흐른 2004년 신고전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개정 증보판을 위한 이영일 선생의 작업과 선생의 타계 이후 김소희(현 <씨네21> 편집장)를 비롯한 후학들과 소도출판사의 저자에 대한 봉정의 결과물이다. 정성어린 주 처리와 귀한 사진들은 개정, 증보에 값하는 자료들이다. 연구자로서 반갑고 감사할 따름이다.영화사가로 비평가로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에 헌신했던 저자의 글쓰기는 제도화된 학계 외부에서 담론을 생산하는 저술가로서의 에너지와 준열함이 넘친다. 서문에서 필자는 한국 영화사를 기술하는 것은 “폐허의 황막함과 내일에의 비상을 마주치고 희망하는 것”이라고 토로한다. 개화기 한국영화에서 1960년대까지를
한국 영화사 연구의 ‘새로운’ 출발,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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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다락방에 산다. 마당에 있는 누군가를 훔쳐보면서 태어난다. 사랑은 가지를 뻗는다. 그 팔은 반드시 불륜에 걸린다. 시기는 그 모든 것들의 밑바닥에 있다. 지하실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면, 종유석이 숲을 이룬 동굴에 숨어 있으리라. 일본 소녀 만화의 1970년대는 그야말로 굉장했던 때다. 비극적 연애, 처절한 도전, 혁명에의 동경과 같은 극단의 감정에 뒤섞여 있던 시절을 통과한 그 시대 만화가들의 미래 역시 결코 평탄치는 않았다. 신흥 종교의 교주가 된 어떤 만화가만큼은 아니지만, 만화가의 펜을 꺾고 뒤늦게 성악가로 살아가고 있는 이케다 리요코의 모습은 <베르사이유의 장미> 혹은 <오르페우스의 창>의 주인공들과 겹쳐서 볼 수밖에 없다.이케다의 팬들은 그녀가 영원히 만화가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이케다 단편집>(대원씨아이 펴냄)이 뒤늦게 국내에서 발간되어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는데, 대작에서는 찾을
순정만화의 원형을 만나다, 이케다 리요코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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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스포츠신문 만화가 있다. 크게 두 부류인데, 보통 4쪽 이하의 컬러만화는 양영순의 <아색기가>류라, 6쪽 정도의 이야기 만화는 허영만의 <타짜>류라 부를 만하다. 이중 우리에게 익숙한 정통 스포츠신문 만화의 스타일은 후자다. 허영만의 <타짜>류는 계보를 거슬러올라가면 고우영의 극화가 있다. 국내 스포츠신문의 원조격인 <일간스포츠>는 고우영의 극화를 연재하며 70년대 극화 열풍을 불러왔다. 이 고우영 극화는 초기 화려한 필력과 진지한 이야기를 보여준 <임꺽정>, 가장 문학적이고 섬세한 <일지매>와 당대의 풍자 센스가 고전으로 해석된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가루지기전>과 같은 2개의 스타일로 양분된다. 80년대 5공 정권의 스포츠 정책과 함께 <스포츠서울>이 창간되며, 고우영의 첫 번째 극화스타일은 제자격인 방학기로 이어진다. <감격시대> &
은밀한 ‘키득거림’, 김행장 <좀비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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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깊은 경기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 대공황 시대 미국인들은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터무니없는 영웅들을 통해 현실로부터 도피했지만, 지금 동아시아인들은 <신의 아들>이나 <멋진 남자 김태랑>을 통해 성공을 꿈꾸는 일조차 가당찮다고 여긴다. 내 신세 그저 이대로지. 뭘 더 나아지길 바라나? 차라리 처절하게 실업자와 백수 신세를 토로하는 자학 개그가 속편한 듯이 보인다. <행복한 백수> <오이카와 취업 일지> <룸펜 스타> <곰씨와 오리군>…. 마치 새로운 장르라도 만들어낼 기세로 ‘불경기 만화’ 혹은 ‘백수 만화’라 불릴 만한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게으르고 의지박약인 백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화는 아마도 <장화 신은 고양이>가 아닐까? 주인은 방구석에서 하는 일 없이 뒹굴거려도 똑똑한 고양이 한 마리가 부와 명예에 미모의 부인까지 얻어
고양이가 돈 벌어오니, 아이고 좋아, 아즈마 가즈히로의 <알바고양이 유키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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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진짜 눈물의 공포>폴란드의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그의 영화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었고 이 영화는 1990년대 한국의 영화광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던 예술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뒤이은 삼색 연작은 잠깐 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실패로 간주되었고 곧 잊혀졌다. 물론 마땅히 걸작으로 불려야 할 <십계> 연작이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다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 폴란드 내에서는 한때 참여적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들을- 예컨대 <야간경비원의 시선>이나 <카메라광> 같은 영화들- 만들던 키에슬로프스키가 후기에 가서 점점 심리적이고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영화들을 만드는 것에 대해 만만찮은 비판들이 가해지기도 했다고 한다.슬라보예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The Frig
박진감 넘치는 키에슬로프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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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서 88년은 어른들을 위한 새로운 만화가 활발하게 창작된 해로 기억된다. 이현세, 허영만, 한희작, 이두호, 김형배 등의 중견 작가들은 물론 이희재, 오세영, 박흥용 등의 신진 작가들이 함께 진지한 만화를 연이어 발표했는데, 1985년 12월 창간된 <만화광장>과 1987년 5월에 창간된 <주간만화>가 좋은 터전이 되었다. 만화가 만화방이라는 막힌 공간을 탈출해 잡지를 통해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가던 때, 젊은 작가들은 단편을 통해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시사만화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와 역사에 대한 만화가 처음 등장하던 시기였다. 이희재와 오세영의 단편은 각각 <간판스타>와 <부자의 그림일기>라는 단편집으로 묶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시절 가장 빼어난 단편작가 중의 한 사람인 박흥용의 작품은 그저 기억 속에서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박흥용은 86년부터 92년까지 <만화광장&
약한 자들에 대한 기록, 박흥용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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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만화 <트라우마>가 드디어 탄탄한 두권의 책(애니북스 펴냄)으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 2003년 <스포츠서울>에 연재 개시된 이 만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몇년만 잘 버티면 양영순의 <아색기가>, 김진태의 <쾌걸 조로>에 버금가는 작품이 될지 모른다는 조심스런 예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지금, <트라우마>는 한국 신문 만화, 개그 만화의 안방에 떡허니 자리를 잡아버렸다. 일본 메이저 잡지인 <빅코믹 스피리트>에까지 진출했다. 참으로 건방지기까지 한 도약이다.만화가 곽백수가 1998년 <영점프>에 투맨 코미디를 선보였을 때 이미 그의 개그 자질에는 뭔가 꾸리꾸리 잘 숙성될 것 같은 냄새가 났다. 그러나 비슷한 정도의 재능을 선보인 만화가들이 신문 연재에 돌입해서는 불과 한두달 만에 맥을 못 추고 쓰러진 반면, 그는 단기간에 풀타임 신문 만화가로 정착해 지칠 줄 모르게 공을 뿌려대고 있다.
정통 개그만화의 힘, 곽백수의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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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죽은 자들만이 전쟁영화의 종말을 봐왔다”라는 (플라톤식의) 말이 있다. <전쟁과 영화>(폴 비릴리오 지음 | 권혜원 옮김 | 한나래 펴냄)라는 제목의 책과 마주할 때, 아마도 우리는 전쟁 자체와 그에 대한 이야기의 항구성을 이야기하는 그런 식의 언급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폴 비릴리오의 이 책을 직접 펴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가진 사고의 폭이라는 게 얼마나 협소한지 자책을 할 수도 있다. 이건 스크린 위에 재현된 전쟁의 양상들을 다룬 영화비평 혹은 영화사 기술 정도에 머무는 책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비릴리오의 논의에 중심이 되는 문장을 다시 고른다면 충분히 흥미로우면서도 언뜻 다소 과격해 보이기도 하는 이런 것이다. “전쟁은 영화이고 영화는 전쟁이다.”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는 그처럼 전쟁과 영화 사이의 은밀한 교감을 다루는 책이다.비릴리오가 전쟁을 영화와 관련지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쟁이란 스펙터클의 생산을 목표로 삼
시각의 ‘병참학’, <전쟁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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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반쯤 패러디 만화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본격 패러디 만화라 부를 만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영화나 CF, 또 다른 만화들을 패러디한 장면들이 만화에 곧잘 등장한 만화들이었다. 어느 경우에는 ‘패러디 만화’라는 수식어를 동원해 노골적인 복제를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적어도 패러디가 되려면 원전 텍스트에 대한 새롭고 창의적인 해석이 필요한데, 대뜸 특정한 영화나 만화, 애니메이션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가져와 자신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식이었다.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여러 캐릭터들을 다른 작품에서 차용한 만화도 있었다.2003년, <아기공룡 둘리>가 연재된 지 20년이 지난, 그래서 ‘둘리’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기도 한 바로 그해 남루해진 일상의 무게를 지닌 성년 둘리가 등장한 작품이 <영점프>에 실렸다. 오마주라 부르기에는 주인공들의 최후가 너무 충격적이고, 패러디라 부르기에는 다른 얄팍한 복제형 패러디 만화와 구분이 되지 않아 찜찜한 그 만화는 삽시
명랑만화가 살 수 없는 세상, 최규석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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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스펙터클의 원조격인 히치콕의 <새>(1963)는 지금 보면 다소 촌스러운 특수효과가 여전히 놀라운 공포효과를 유발하는 수준급의 고전이다. 이 말이 <새>의 기술력에 대한 폄하로 들려선 안 되겠다. 히치콕은 진짜 새와 기계 새를 총동원하여 ‘온갖 잡새가 날아드는’ 전대미문의 이미지를 합성해냈을 뿐 아니라, 거기서 발견될 ‘옥에 티’를 상쇄하고 남을 만큼 풍부한 의미망을 또한 고전적으로 직조해냈다는 뜻이다.영국영화연구소(BFI) 고전영화 시리즈 중 하나인 <새>(카밀 파글리아 지음/ 이형식 옮김/ 동문선 펴냄)는 이러한 제작과정과 영화적 의미를 더없이 충실하게 밝혀주는 ‘<새>잡기 완전정복’ 해설서이다. 광범위한 리서치와 꼼꼼한 영화읽기를 아우르는 저자는, 가령 멜라니(티피 헤드런)의 애스턴 마틴 스포츠카(의 제임스 본드 차와 유사 모델)에서 성적 모험가로서의 현대 여성의 자유를 끄집어낸다. 저자의 우상이기도 한 멜라니는 히치콕 특유의 가
히치콕의 <새> 완정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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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한번이라도 전학이라는 걸 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심장이 요동치는 경험인지 잘 알 것이다. 낯선 학교에서 텃세를 부리는 아이들, 말투 하나로 꼬투리를 잡혀 얻게 되는 별명, 전혀 다른 교과서를 새로 배워야 하는 괴로움…. 그러나 뜻밖의 기회를 잡아 이전 학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오늘부터 우리는>에서부터 <멋지다 마사루>까지, 전학은 만화 속에서 무궁무진한 소재를 만들어왔다.타키지와 노보루는, 말하자면 전학 전문 학생이다. 타키지와의 아버지는 비밀 잠입 교사로, 학생들을 지나치게 강압하는 학교를 찾아가 그 음모를 분쇄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타키지와는 이러한 아버지의 정체도 모른 채 전학을 밥 먹듯이 할 수밖에 없다. 그가 전학 가는 학교들은 괴팍한 열혈 모드로 무장한 말도 안 되는 학교들로, 머리띠를 맨 주번이 지각생을 처단하기 위해 목숨 걸고 교문을 지키고, 급우들은 학급을 사수하기 위해 필살기가 난무하는
지구 평화의 그날까지, 오늘도 전학이다, <불꽃 전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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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포털 사이트의 만화서비스‘다음’(www.daum.net)에서 만화를 서비스한다는 사실을 꽤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들어가보지 않았으면서도 무언가 ‘창작만화’를 서비스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2003년에는 준비한 국제세미나의 웹 캐스팅을 부탁하기도 했다. 당연이 무산되었지만, 나는 그때 왜 무산되었을까 의심하지도 않았고 다음의 만화코너에 들어가볼 생각도 안 했다. 얼마 전, 인터넷 사이트를 서핑하다, 다음에 ‘대한민국 대표 온라인 만화웹진’이 주간지로 창간되어졌다는 게시물을 보고, 다음만화코너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깊은 절망과 충격을 받았다. 다음만화코너는 거의 완벽한 온라인 만화방이었기 때문에. 그곳은 거대한 디지털 인프라를 활용한 만화의 새로운 시도도 없고, 변변한 신인작가의 작품 하나 없고, 제대로 된 저널조차 없는 거대한 만화의 무덤과 같은 만화방이었다. 그 안에는 1970∼80년대의 명랑만화에서부터 시작해, 이른바 만화방 만화라 불리는 대량생산만화에 잡지에 연재되었던
만화방과 만화웹진을 착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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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 새로운 기술이 전통문화의 기호를 대체하는 때, 넓게 말하면 역사와 문화의 변혁기에 등장하는 것이 원시적 열정이다. 여기에서 ‘원시적’이라는 말은 어떤 권위를 가진 기원 혹은 낙후된 것을 뜻한다. 이에 따라 원시적 열정이란 잃어버린 순수한 기원 혹은 뒤처진 어떤 것으로서의 원시적인 것을 되찾으려는 열정이다. 서양의 시선은 타자 안에서 낙후성이나 기원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중국 혹은 동아시아에서는 그러한 서양의 원시적 열정을 스스로 내면화하는 과정이 진행되어왔다.레이 초우는 중국영화에서 원시적인 것이 머무르는 장소로 여성, 자연, 어린이에 주목한다. 그리고 1930년대 완령옥 주연의 무성영화에서부터 60년대 문화대혁명기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이미지를 거쳐, 80년대 첸카이거와 장이모 등의 영화를 공동체, 국가, 일, 학습, 사랑, 혁명, 젠더 등과 같은 범주가 뒤섞이는 교차점으로 읽어내려 한다.초우가 책에서 중점
문화번역으로서의 현대 중국영화 읽기, <원시적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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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이 친구를 왕따시키는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고, 학교장은 책임추궁에 못 이겨 자살하고 말았다. 모두에게 깊은 상처가 되는 일이었겠지만, 인생의 10%를 갓 넘긴 사람과 70%를 넘게 산 사람에게 그 무게는 달랐을 것이다.44살의 건설회사 작업반장 쿠로사와는 인생의 절반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내로라 할 만한 재산도 없다. 회사에서는 은근히 왕따를 당하고 있지만 그런 자신을 하소연할 친구는 망해가는 경비회사에서 들여온 신호 정리 마네킹 ‘타로’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인망(人望)을 얻자.” 지구상에서 가장 외로운 중년 남자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전설의 첫 발자국을 뗀다.생존을 위해 닥치는 대로 살아왔지만, 어느 날 돌아보니 자신에게 진정한 것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중년 남자의 위기. 여러 소설, 영화, 만화에서 보아온 이야기다. 그 작품들 대다수는 우리에게 약간의 애절함을 던진 뒤에 이 사람이 삶의
꺾어진 인생, 바닥을 쳤다,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최강전설 쿠로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