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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안도현, 작화 최규석·변기현 <짜장면>2003년 웹을 떠돌아다니는 한편의 만화가 있었다. 노가다를 하는 둘리, 사기꾼 도우너, 매춘에 나선 또치,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동심의 주인공과 그들이 풀어내는 슬픈 이야기가, 2003년 서울의 일상을 변주하며 흐르는 만화였다. 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게재되었고 작가가 다시 <공룡 둘리>라는 본 제목을 붙어준 만화. 범상치 않은 단편으로 단박에 기대주의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등재한 최규석이 졸업동기 변기현과 단행본을 냈다. 안도현의 원작을 만화로 옮긴 <짜장면>. 안도현의 서정과 최규석, 변기현의 작화가 탁월한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 만화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마케팅을 못한 출판사의 문제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보석의 빛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짜장면>은 한없이 자상하고 존경을 받는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어머니에게만은 폭력적인 모습을 보다 못해 가출한 열일곱살
열일곱에게 바치는 만화, <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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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앤미블루 출신 이승열과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이 만드는〈secret〉뮤비<올드보이>의 박찬욱이 뮤직비디오를 찍었다고 한다. 함께하는 뮤지션은 이승열이다. 이승열이 누구냐고? 90년대 후반에 해체됐던, 모던록 밴드 유앤미블루를 아는지. 단 두장의 앨범으로 ‘한국 모던록의 전설’이라는 평을 들었던 2인 밴드, 유앤미블루 멤버는 방준석(영화음악을 주로 하는 음악인들의 모임, 복숭아 프레젠트- <씨네21> 434호 참조- 의 일원이다)과 이승열이다. U2의 보노, 혹은 데이비드 보위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음색을 지닌 이승열은 최근 <이날, 이때, 이즈음에…>라는 솔로앨범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리고 그 앨범의 타이틀곡 〈secret〉을 박찬욱이 뮤직비디오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기 색이 뚜렷한 두 사람이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지 문득 궁금하기도 했고, 각기 다른 장르의 문화가 만난다는 뜻의 ‘컬처잼’에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10여년 전의 인연밤 11
모던록 아티스트와 시네아스트의 멋진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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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만화가 주는 또 다른 재미는 신비롭고도 까탈스럽다는 점이다. 보물은 언제나 숨어 있어 우리를 힘겹게 하지만, 또 그만큼 값진 기쁨을 준다. <앙꼬와 진돌이>는 야후 코리아(kr.yahoo.com)의 뉴스- 비주얼 뉴스- 카툰 코너에 꼭꼭 숨어 있는 만화다. 가끔 메인 페이지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다시 찾아가려면 길을 잃고 헤매기가 십상이다.만화가이며 주인공인 앙꼬는 라면 머리에 부스스한 차림을 하고 있는 절반은 백수, 절반은 프리랜서 만화가로 보인다. 처음에는 남자로 생각했는데, ‘내 남자 친구 아저씨’도 있는 걸로 보아, 여자인 것 같다. 그리고 파트너인 진돌이는 앙꼬의 아빠인 최 사장이 골재 야적장 같은 곳에서 키우는 개인데, 진돗개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미 ‘다섯 번째 진돌이’로 그 혈통은 의심스럽다. 밤마다 여자 뒤꽁무니를 쫓다가 현행범으로 붙잡혀 파출소에 넘겨지고, 가끔 가출해서 이쁜이와 놀다온다. 만화는 앙꼬와 진돌이의 설렁설렁한 일상을 끼적끼적 그려나가고
변두리 동물들을 위한 그림일기, 인터넷 만화 <앙꼬와 진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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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주인공 잭은 글을 쓰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할말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것에 대해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잭과 그가 속한 가족이 적나라한 소외 상태에 놓여 있으며 서로에 대한 관계가 발전할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제임슨은 ‘서로가 잘 알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선망이야말로 <샤이닝>이라는 영화의 궁극적인 주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영화는 과거의 어떤 시대로 시선을 향하고 있다. 이제 제임슨이 쓴 이 글의 제목이 왜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 “<샤이닝>과 역사주의”인지, 왜 그가 <샤이닝>을 두고 역사의 위협을 다루는 역사적 논평이라고 불렀는지 개략적이나마 어느 정도 이해의 실마리가 주어졌으리라 본다.물론 앞에서 인용한 내용은 <보이는 것의 날인>이라는 제임슨의 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샤이닝>에 대한 그의 글에 대해서도 일부만을
시각문화의 역사적 존재 이유를 파악하라, <보이는 것의 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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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여성만화(순정만화라 불리기도 하는)에 빠져들게 한 만화는 이케다 리요코의 <올훼스의 창>이었다. 순진한 전학생과 베일에 쌓인 주인공, 작품의 배경이 되는 볼셰비키 혁명. 아름다운 그림과 정서의 선을 타고 넘나드는 이야기 전개, 무엇보다 꽉 짜여진 그 스케일이 나를 매혹시켰다. 황미나, 김진, 김혜린, 신일숙, 강경옥, 80년대에 데뷔해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나가는 작가의 선 굵은 작품은 모두 긴 호흡을 지니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내면의 깊은 정서까지 파고드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반면, 90년대 후반 만화잡지가 점점 저연령층을 겨냥해 편집되면서 등장한 여러 작품들은 작가의 반짝이는 재치와 재능으로 인기를 얻었다. 애드리브가 서사를 구축한 것이다.따지자면, <언플러그드보이>와 <오디션>의 성공으로 흥행작가가 된 천계영의 작품들도 대부분 ‘선 굵은, 긴 호흡’과 같은 수식어의 정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새롭게 출간된 복귀작 는
한없이 가벼운 감각적 트렌드, 천계영의 〈D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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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아르튀스-베르트랑. 우리 시대의 가장 기억할 만한 사진작가다. 그는 1996년부터 경비행기, 헬기, 열기구 등을 타고 북미, 유럽, 중남미,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하늘에서 본 지구의 모습을 담아왔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풍경들이 촌철살인의 에세이와 함께 펼쳐진다. 땅에는 국경이 있고 하늘에는 영공이 있으니 그의 비행이 마냥 순조로웠을 리 없다. 중국은 영공 통과가 금지됐고 인도에서는 촬영 필름의 대부분을 압수당했다.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비행금지구역이 유달리 많기 때문일까? 책에서 우리나라 풍경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실망하기엔 이르다. 베르트랑이 2월 중 내한, 열기구를 타고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니 봄에 서울에서 열릴 무료전시회에서 ‘하늘에서 본 대한민국’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북위 6도44분, 서경 3도29분. 5월14일에 촬영한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아방루구의 군중 모습. 더없이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아이들과 청
사람이 새겨진 지구인문서, <발견, 하늘에서 본 지구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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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의 7집 앨범 <Issue>와 공연조금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서태지의 7집 앨범 <Issue>를 이야기하기 전에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한 일본 록 뮤지션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그의 이름은 히데(Hide)인데, 서태지가 이번 앨범에서 함께 일한 공동 편곡자 이나(I.N.A), 기타리스트 카즈(KAZ), 엔지니어 에릭 웨스트폴(Eric Westfall)이 모두 이 뮤지션과 함께 일했다. 아무튼, 그 히데란 사람이 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을 무렵 그런 말을 했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에는 존경하는 뮤지션이 그냥 해본 소리라도 좋으니, 마치 큰형처럼 자신을 이끌어주길 바랐다고. 하지만 막상 자기가 나이가 들어 그런 위치가 되어보니 누구에게도 그런 ‘믿음직한 큰형’같은 존재는 될 수 없었다고 말이다. 나에게 서태지는 그런 존재였다. 생각해보면 그는 세상이 무너져도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나의 ‘형’이었지만, 내가 그를 믿었던 건 그가 늘 ‘불안’해했기 때문이었
태지 ‘보이’, 불안을 벗고 확신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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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검> 완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떡하니 새로운 선물이 도착했다. 총 12편의 알짜배기 단편을 모아놓은 이 책은 500조각의 퍼즐과 함께 포장되어 나에게 배달되었다. 이 단편집에는 20년에 가까운 작가의 작품생활을 갈무리하는 단편들이 선정되어 있다. 첫머리에는 1985년 <아홉번째 신화>에 발표된 <그대를 위한 방문자>가 놓이고, 마지막에는 미발표 신작인 <노래하는 돌>이 있다. 1985년에서 2003년, 세기가 바뀌는 시간 속에 놓여진 작가의 스펙트럼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다.김혜린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작가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복판에 사람이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아주 상식적인 창작의 원칙을 충실하게 지킨다. <그대를 위한 방문자>는 지금 보면 다소 낯선 연출법들이 등장한다. 내적 자아와 대화, 갈등하는 예술가의 모습, 과도한 독백과 내레이션까지. 하지만 이 작품은 솔직한 그대로 80년대를 살아가는 작가가 경험해야
542페이지의 재미, 김혜린 단편집 <노래하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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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인연이 깊은 작가 필립 K. 딕. <스크리머스> <임포스터> <블레이드 러너> <토탈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번에는 <페이첵>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 중인 ‘필립 K. 딕의 SF 걸작선’ 시리즈 중 네 번째 책으로, <페이첵>을 포함해 모두 8편의 작품을 수록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을 제외하면, 작가의 청년기인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필립 K. 딕 지음/ 김소연 옮김/ 집사재 펴냄]
필립 K. 딕의 SF 걸작선 시리즈, <페이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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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히틀러가 부활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면, 만약 빙하가 녹아내려 지구의 땅덩이 대부분이 가라앉아버린다면, 만약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제2의 진주만 침공을 감행한다면…. 픽션은 ‘만약’을 사랑한다. 그리고 ‘더 큰 만약’일수록 더 강렬하게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가와구치 가이지의 <태양의 묵시록>(대원씨아이 펴냄)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만약’에 속하는 이야기다.2002년 8월10일 오전 10시20분. 강도 8.8의 대지진이 일본 열도를 엄습한다. 곧이어 후지산이 분화를 일으키고, 동쪽, 동남쪽, 남쪽에서 연이어 일어난 거대 지진과 해일이 최악의 재난을 만들어낸다. 급기야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열도의 한가운데가 갈라져 이 나라는 완전히 두 조각으로 분단되는 지경에 이른다. 애초에 섬나라였는데, 섬이 하나 늘어났다는 게 무슨 문제겠는가? 그러나 파국의 상황을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일본이 미국과 중국에 원조를 요청하고, 재해 복구를 빙자하여 열도에 들어선 두 강국이
일본 분단, 지도를 새로 그려라, <태양의 묵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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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솔로몬은 악령들을 모두 불러모아 놓고, 그들의 목에 반지로 인장을 찍어 자신의 노예임을 표시했다. 한번은 그가 요르단에서 목욕을 하던 중 그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은 어느 어부가 잡은 물고기의 뱃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어부가 그 반지를 찾아 솔로몬에게 돌려주기 전까지 솔로몬은 그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반지의 제왕>이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서양 문명에서 양지에 해당하는 기독교나 헬레니즘 전통과는 다른 음지의 전통, 바로 비학(秘學: 오컬티즘)을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비학은 문자 그대로 신비 혹은 초자연적 현상을 탐구, 활용하는 것으로, 마법, 연금술, 점성학, 강신술, 관상학, 수비학(數秘學), 유대교 신비주의(카발라) 등을 모두 포괄한다. 기독교 전통에 의해 이단시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 때문에 그 자세한 전모를 가늠하기도 힘들다.그 생애 자체가 미스터리라는 저자는 19세
사슴을 새로 변하게 하려면? <마법사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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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만화들이라 부르자. 익숙한 기대감과 서스펜스의 짜릿함을 즐기는 만화들이 아니라 나른하고, 불편하고, 졸리고, 그러다 보면 슬프고 그 안에 내 모습이 있는 그런 만화들이다. 한국 만화의 약점인 다양성을 메워가는 만화들이다.크게 주목받고 있지 못하지만 은근히 많은 팬들과 소통하는 만화들이다. 이향우의 만화는 동화 같고, 일상적이며, 가난하고, 감상적이다. 동화와 일상, 가난과 감상의 낯선 조합이 빛을 발해 이향우의 만화를 만든다. 그가 지닌 감성은 ‘순정’(純情)의 감정을 훌쩍 넘는다. 그의 만화는 그래서 꽤나 아슬아슬하게 지금까지 버텨왔다. <우주인>은 자기 색을 지닌 몇 안 되는 한국 만화잡지 <나인>에 연재된 만화다. 원래는 2개의 색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아름다운 색을 입혔다. 작가에 의해 입혀진 색이라 원래의 것처럼 자연스럽다. 최근 복간되는 만화들 중 일괄적인 컴퓨터 작업을 통해 색을 입히는 경우가 있는데, 고려해볼 일이다.<우주인>
비틀비틀 클럽의 친구들, 이향우의 <우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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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아이와 네오의 대화.
“숟가락을 구부리려 하지 마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을 깨달으려고만 하세요.” “무슨 진실?” “숟가락은 존재하지 않아요.” “숟가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당신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놓고 혜능은 이렇게 말했다. “움직이는 건 바람도 깃발도 아니며 다만 마음이다.” [오윤희 지음/ 호미 펴냄]
<매트릭스, 사이버 스페이스 그리고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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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M과 N의 이야기다. M은 미츠루의 M, 과자 만들기가 취미이고 고수머리가 매력적인 고교 1학년의 여학생이다. N은 나츠히코의 N, 수재에 학급대표로 하얀 피부가 눈부신 남학생이다. 그럼에도 방심은 금물. 이 정도의 미지근한 설정으로 요즘의 닳고 닳은 독자들을 구워삼을 수는 없다. 사실은 말이다. 여러분도 곧 알게 되겠지만 말이다. M은 마조히스트의 M, N은 나르시시스트의 N이었다.<그 남자 그 여자> <타로 이야기> <미운 오리 왕자님>…. ‘다중인격자 러브코미디’라는 신종 장르를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학원로맨스의 분명한 경향 하나가 보인다. 겉과 속이 다른 남녀들의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 히구치 다치바나의〈M과 N의 초상〉(대원씨아이)은 바로 그 장르의 틀을 조금 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바깥으로 당기고 있다. 칼끝에 손가락만 닿아도 황홀경에 빠져 에로에로해지는 여학생과 유리창에 비치는 자기 모습만 봐도 실신할 정도로 도취되어
거울아 거울아, 더 때려줘, 〈M과 N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