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후반쯤 패러디 만화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본격 패러디 만화라 부를 만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영화나 CF, 또 다른 만화들을 패러디한 장면들이 만화에 곧잘 등장한 만화들이었다. 어느 경우에는 ‘패러디 만화’라는 수식어를 동원해 노골적인 복제를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적어도 패러디가 되려면 원전 텍스트에 대한 새롭고 창의적인 해석이 필요한데, 대뜸 특정한 영화나 만화, 애니메이션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가져와 자신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식이었다.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여러 캐릭터들을 다른 작품에서 차용한 만화도 있었다.
2003년, <아기공룡 둘리>가 연재된 지 20년이 지난, 그래서 ‘둘리’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기도 한 바로 그해 남루해진 일상의 무게를 지닌 성년 둘리가 등장한 작품이 <영점프>에 실렸다. 오마주라 부르기에는 주인공들의 최후가 너무 충격적이고, 패러디라 부르기에는 다른 얄팍한 복제형 패러디 만화와 구분이 되지 않아 찜찜한 그 만화는 삽시간에 인터넷에 유포되며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2004년, 스캔본 만화가 돌자 작가 스스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만화를 공개했고, 독자들이 단행본의 출간을 요구했던 ‘그 만화책’이 출간되었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영점프> 연재작을 표제작으로 2002년 동아·LG만화공모전 수상작인 <콜라맨>, 2003년 상명대학교 졸업작품집에 수록된 <선택>, 1998년 서울문화사 신인만화공모전 성인지 부문 금상을 수상한 <솔잎>, 그리고 신작 <사랑은 단백질> 등이 수록된 매력적인 작품집이다.
최규석의 만화는 현실과 상관(相關)한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현실과 관계한다. <공룡둘리>와 <사랑은 단백질>은 만화가 현실과 만나는 방식을 매우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두 작품은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 서 있지만 매우 현실적이다. 매우 현실적이지만, 만화가 발현하는 상상의 미학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공룡둘리>에서 둘리는 남루하게 늙어가고, 또치는 동물원에서 몸을 팔고 있으며, 도우너는 실험실로 끌려간다. 20여년 전 <보물섬>에 등장했던 ‘둘리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는 만화이며, 동시에 우리의 현실이다. <공룡둘리>는 만화이자 현실인 ‘둘리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만화 속으로 끌고 와 힘겹고 팍팍한 삶,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잡지를 중심으로 한 한국 주류만화가 허영만의 표현대로 “후루룩 불면 그림들이 다 쏟아져내리고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을 정도로 앙상해진 오늘, 그래도 최규석과 같은 작가들이 한국 만화의 희망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