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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분석이 드디어 현장 영화인들과 만났다. 지난 10월10일 대학로 아르코 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영화제작 스탭의 합리적 구성 방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반나절 동안 진행된 이 자리에서는 직무분석에 대한 현장의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안정숙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현재 단체협상을 진행 중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교섭단 차승재 대표와 최진욱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나란히 축사를 전하며 공청회는 시작됐다. 연구원들은 발제를 맡고, 분야별로 나눠진 주제별 토론은 모두 현장 영화인들이 담당했다. 두 차례 기획리포트로 연재된 직무분석의 마지막 편이 될 이 기사는 공청회의 핵심 쟁점들을 다룬다. 전문 조감독 도입을 중심으로 한 연출·제작의 전문화, B카메라팀의 적극적 활용을 통한 촬영·조명의 탄력적인 인적 구성과 촬영기간 단축, 그리고 현장편집을 둘러싼 논의가 그것이다.
전문 조감독 도입, 얼마나 현실성 있는가?
공청회 사회를 맡은 영화
스탭의 전문화, 아직은 논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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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카지노 로얄>은 다소 독특한 위치에 있다. 최초로 내세운 금발 제임스 본드인 대니얼 크레이그는 세련된 피어스 브로스넌과 달리 선이 굵은 남자다. 영화 역시 크레이그의 외모를 물려받은 모양새다. 미끈한 액션을 선호했던 전작과 선을 긋고자 근육질 본드를 기용한 데서 읽을 수 있듯 액션 역시 다소 거칠어질 전망. 시리즈 중 21번째 작품이지만 이언 플레밍이 집필한 동명 소설에서 첫 번째 것을 연료로 삼은 <007 카지노 로얄>은 007 시리즈의 출발점을 향해 역주행한다. 분위기를 고조하며 심박동 수를 증가시키는 007표 음악처럼 시리즈의 클리셰로 굳어진 부분도 있다. 미녀 스파이와 벌이는 사랑 놀음, 대규모 폭발신, 눈요기가 될 만한 값비싼 호텔이나 이국적인 풍광, 최신 첩보 무기들이 그것이다.
살인면허 더블오(OO)를 획득하기 위해 두 차례의 저격 임무를 수행한 제임스 본드. 첩보기관 M16의 상관 M은 신입요원인 본드에게 마다가스타에서 테러리스트 몰라
근육질 본드의 거칠어진 액션과 도박 한판, <007 카지노 로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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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대리의 산 중턱에는 개성있게 생긴 집 한채가 서 있다. 고딕풍 그림체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도 하고 팀 버튼의 영화 속에서 본 듯도 하고, 그저 평범한 나무집 같기도 하다. 주위 산들 턱에 설치된 조명들이 아늑한 달빛을 뿌린다. 데뷔작을 찍는 임진평 감독은 집안 화롯가에 모여 앉은 이영아(설아), 김시후(수웅), 김태현(우철), 이은우(미루) 등 네명의 주연배우들과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어린 배우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핸드헬드 카메라가 꽤 섬세하게 흔들린다. 현장 모니터에 잡히는 화면 또한 따뜻하고 서정적이다. 영화 <귀신이야기>는 무시무시한 호러물이 아니다. 곰보해병 귀신, 양복귀신, 꼬마귀신, 고교생 물귀신 등 별별 종류의 귀신들이 사연을 풀어놓는다. 제목 그대로 ‘귀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의 영화다.
설아 일행은 대학교 사진동아리 멤버들. 또 다른 맴버 구태(박효준)가 시달리는 귀신 악몽의 원인을 찾아 ‘독각리’라는 외딴 마을에 왔다
귀신과의 따뜻한 여름 밤, <귀신 이야기>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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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연기는 산문보다는 시에 가깝다. <여자, 정혜>를 시작으로 <가을로>에 이르기까지 김지수가 연기한 배역들에서는 감정의 파고가 쏟아져나온다기보다 은은히 배어나왔다. 격정적인 대사나 극적인 표정 변화가 아닌 그 사이의 알쏭달쏭한 감정의 잔물결은 시구의 풍부한 상징과 함축처럼 여백을 남겼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자주 등장하지 않아도 영화 내내 가득한 존재감. <박수칠 때 떠나라>의 정유정은 출연 빈도로만 보면 아주 작은 역할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이고, 사건의 열쇠를 쥔 여인이었다. <가을로>의 민주 역시 그렇다. 그녀는 회상장면에서나 존재 가능한,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여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다.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 존재로 인물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김지수와 김지수가 생각하는 <가을로>는 그래서 닮은꼴이다. “예쁜 시 한편 읽은 것 같다. 풍경화 같은 느낌이
여자는 여백에서 빛을 낸다, <가을로>의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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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행을 떠난다. 길에 새겨진 연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는 10년간 닫아두었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간다. <봄날은 간다> 이후 5년 만에 ‘멜로’로 돌아온 유지태는 다시 한번 부재의 아픔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허물어질듯 위태로워보였던 소년은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상처를 치유해가는 남자가 됐다. “실화를 소재로 했고, 리얼리티와 판타지가 공존하는 특별한 멜로영화라는 점에 끌렸다. <가을로>는 영화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진심이 담긴 작품이다.”
목포, 경주, 태백 등으로 이어지는 <가을로>의 여행길은 무려 60곳이 넘는 로케이션을 통해 완성됐다. 촬영 당시 연극 <육분의 륙>을 병행하던 유지태는 몇달간 차 안에서 잠을 자고 연습하며 전국 각지를 밟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정말 고통스러웠다. 어찌나 힘들었던지 메니에르병이라고 중심 감각을 잃는 병도 얻었다.” 고된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가
남자는 소리없이 깊어진다, <가을로>의 유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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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씨는 직접 만나보니 완전히 여장부다.” “지태씨는 나보다 어리지만 무게감있는 배우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가을로>의 비극적인 연인이라기보다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보듬을 줄 아는 오누이 같다. 촬영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 아름답기로 소문난 장소들을 찾아다녔던 두 사람이 추위와 폭설 때문에 고되고 길었던 긴 겨울 동안 호흡을 맞춘 덕분이리라. 그래서, 민주(김지수)가 곁에 없어도 현우(유지태)는 아스라한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민주는 현우의 환상 속에서 밝게 미소지을 수 있다. <가을로>에서 과거와 현재는 뒤섞이고, 사실과 환상은 경계없이 넘나들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확고한 존재감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 것이다. 촬영장에서,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동안에도 김대승 감독과 셋이 두런두런 수다를 떨며 크게 웃던 모습은 <가을로>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두 사람에게 서로를 아련히 바라보며 슬픈 듯
가을, 그리고 남과 여, <가을로>의 유지태,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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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세계를 사랑하는 아시아영화 전도사
사토 다다오는 일본의 아시아영화 전도사다. 140권이 넘는 그의 저서 중에는 일본 감독에 대한 책, <아메리카 영화> <유럽영화> 등 1세계 영화를 다룬 책 이외에도 <중국영화 100년> <아시아영화> 등 아시아 각국의 영화를 쉬운 화법으로 소개하는 책이 많다. 아시아 국가 여러 곳에서 많은 감독들이 그를 형님이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의 저서 <영화로서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가>의 제목에 대해 그는 평생 긍정을 표해온 셈이다.
-일본 외의 아시아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문화대혁명 직후, 중국 사람들에게 세계영화에 대해 이야기해줄 일본 영화인으로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중국영화에 흥미가 있었다기보다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무렵 만들어진, 일본에 저항하는 내용의 영화가 궁금해서 옛날 중국영화를 보여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그 영화들이 단순한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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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에 속하는 영화광이며 영화평론가인 사토 다다오(佐藤忠男)는 1930년생이다. 지난 9월25일, 일본영화학교 교장으로 요코하마 학생영화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그를 만났다. 시대와 취향을 막론한 방대한 저술을 자랑해서인지 지금도 특정 일본영화나 감독에 대해 말하기 위해 그의 글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각종 기사와 논문에서 마주했던 노장에게서 영화와의 인연과 영화를 통해 그가 만나게 된 세계에 대해 물었다. 사토 다다오와 알고 지낸 한국 감독 3인에게서 그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을 함께 청해들었다.
“요즘도 강단에 서십니다. 좋아하는 감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죠.” 일본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에 속하는 영화광이며 영화평론가인 사토 다다오(佐藤忠男)는 1930년생이다. 영화감독을 키우는 실무 위주의 일본영화학교 교장으로 10년째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그의 건강에 대해 묻자, 통역을 맡은 일본영화학교 학생이 대뜸 대답한다. “지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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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 감독의 일곱 번째 영화 <후회하지 않아>
넌 부자여서 도망할 곳이 있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어. 수민이 재민을 향해 나지막이 내뱉는 순간, <후회하지 않아>의 목소리는 명백해진다. 이송희일 감독이 카프 작가 강경의 <인간 조건>에서 빌려온 이 대사는 <후회하지 않아>가 소년들의 달짝찌근한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작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후회하지 않아>가 관객을 데려가는 곳 역시 종로 구석의 음침한 호스트바. 열여덟 순정의 게이가 아니라 가난한 남창들이 손님들의 몸을 핥으며 삶을 영위하는, 비루한 서울의 구석이다.
수민(이영훈)은 주간에는 공장에서, 야간에는 대리운전기사로 일하며 살아가는 고아다. 수민의 인생이 또 다른 악장으로 접어드는 것은 공장 부사장의 아들 재민(이한)을 만나면서부터다. 수민과 재민은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계급의 차이는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는 회사에 반기
부산의 한국영화 7편 [7] - <후회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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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훈 감독의 세번째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
<벌이 날다>로 데뷔한 민병훈 감독은 모스크바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 영화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생가를 찾아 아르메니아로 떠난 적이 있다. 집만 한채 덩그러니 있는 파라자노프의 생가를 보고 아르메니아의 수도로 돌아오던 민병훈 감독은 도중에 트럭을 얻어 탔고, 운전사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하룻밤 숙소를 마련했다. 그날 밤 운전사의 가족이 찾아와 그가 아프다며 민병훈 감독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민병훈 감독을 만난 남자는 아르메니아어와 러시아어를 섞어가며 너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다, 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이상한 두려움을 느꼈다. 20, 30년 뒤의 내 모습이 내 앞에 현존해 있다면, 그리고 그가 민병훈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 기이한 경험이 수년이 지나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씨앗이 되었다.
신학생 수현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부산의 한국영화 7편 [6] - <포도나무를 베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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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석 감독의 두번째 청춘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서투른 순수함으로 가득한 청춘은 냉혹한 세상의 벽에 부딪혀 신음한다. 장편 데뷔작 <마이 제너레이션>으로 카드빚의 늪에 빠진 청춘을 담담하게 직시했던 노동석 감독은 다시 한번 신열과도 같은 젊음의 시간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낭만의 거품을 걷어낸 청춘의 방황은 여전하지만, 3천만원의 저예산으로 제작됐던 전작과 비교할 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제작 규모가 커졌을 뿐 아니라 연출 또한 한결 안정되고 세련돼졌다.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맨 얼굴”과도 같았던 <마이 제너레이션>에 비해 <우리에게…>는 “화장을 한” 셈이다.
<우리에게…>는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기수(김병석)와 그를 친형처럼 따르는 종대(유아인) 이야기다. 기수는 드러머를 꿈꾸지만 현실의 무게 탓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세상을 향
부산의 한국영화 7편 [5]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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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혜 감독의 데뷔작 <여름이 가기 전에>
모진 사랑의 열병 때문에 상처를 입고서 ‘이제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랑은 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맹세란 너무도 쉽고 빨리, 다시금 눈먼 열정에 묻혀버리고 만다는 것을. <여름이 가기 전에>의 주인공 소연(김보경)도 그 부질없는 다짐의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파리에서 유학 중인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다가 순수한 남자 재현과 가벼운 만남을 갖고 있다. 하지만, 소연의 마음속에는 한때 파리에서 열렬히 사랑했다 헤어진 이혼남 외교관(이현우)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소연은 부산에서 출장 중인 그를 만나기 위해 부득불 내려가기도 하고, “파리로 돌아가기 전 우리집에서 함께 지낼까”라는 그의 제안에 솔깃해 짐을 싸갖고 언니네 집을 나오기도 하지만, 남자의 미적지근한 반응 때문에 항상 기대와는 다른 결과를 맞이할 뿐이다. 정작 만나고 나면 그와의 관계가 건조하게 말라붙었다는 사실을 거듭 깨달
부산의 한국영화 7편 [4] - <여름이 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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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감독의 세번째 영화 <아주 특별한 손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20대 초반의 착해 보이는 여자 보경(한효주)에게 무섭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건장한 사내 두명이 다가온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취조에 가까운 질문공세가 이어진다. “고명은! 명은이 아냐? 에이 명은이 맞는데….” 자신은 명은이가 아니라고 말한 여자는 사내들의 집요한 착각에 당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다. 도시 한복판에서 갑자기 다른 이의 이름을 들고 온 남자들에게 동일인이 아니냐고 추궁당하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고, 당하는 사람이 여자일 경우 겁나는 일이다. 그런데도 결국 여자는 남자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겁없이 차를 타고 동행까지 한다. 그녀는 어느 중년의 홀아비가 죽음을 선고받아 의식불명 상태에 놓여 있고, 그의 딸은 집을 나가 몇년째 소식이 없는데, 당신이 그 딸의 모습과 비슷하니 단 하루라도 죽음 앞에 처한 그에게 딸인 양 얼굴을 보여주면 안 되겠느냐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부산의 한국영화 7편 [3] - <아주 특별한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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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 감독의 첫번째 장편 영화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기사와 승객. 두 남자가 탄 택시가 구불구불한 국도를 나른하게 미끄러져 나간다. 왜소한 손님의 이름은 김태한(박광정). 강원도 양양군 낙산읍에서 도장포를 경영한다. 잘생긴 서울 택시기사 박중식(정보석)은 대문만 나서면 곧장 애인 중 한명과 마주치는 바람둥이다. 전국에 분포한 중식의 숱한 연인 중에 태한의 아내도 있으니, 질투로 속이 곯은 남편은 어제 마침 ‘씨팔’이라는 두 글자를 붉은 낙관에 새겨 내리찍고 떨쳐 일어섰다. 서울까지 달려온 그는 중식의 멱살을 잡는 대신 낙산행 장거리 주행을 주문한다. 밀회를 부추겨 현장을 덮칠 궁리지만 어떤 놈인지 좀 볼까 싶기도 하다. 영화는 심리적인 자승자박 상태에 빠진 태한의 눈에 비친 국도변 풍경을 스케치한다. 두 남자의 낙산행은 슬슬 몽롱한 소풍이 된다.
긴 우회로를 거친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가 첫 장편인 김태식(47) 감독은 스스로
부산의 한국영화 7편 [2] -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