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7년 말 로마의 한 아파트, 어느 신혼부부가 부동산 중개업자의 안내를 받고 있다. 새를 키울 만한 정원이 있고, 적당히 널찍한 침실과 부엌이 있으며, 거실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드는 곳. 얼핏 평온한 삶의 안식처처럼 보이나 실은 극좌파 무장세력 ‘붉은 여단’의 아지트가 될 공간이다. 신혼부부로 위장한 남녀는 급진적 혁명노선을 함께 걷는 동지이며, 이들 외에도 두 남자가 더 숨어들어 위험한 미션을 수행한다. 새해가 밝아오고 온 거리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일 때조차 이들에겐 사치스러운 감정을 나눌 여유가 없다. ‘노동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거사(巨事)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본격적인 아지트 역할을 시작한 것은 1978년 3월16일, 붉은 여단 멤버들이 전 총리이자 기독민주당 당수 알도 모로(로베르토 헬리츠카)를 납치하는 데 성공하면서부터다. 이날은 알도 모로가 공산당과 우파 여당 5당을 연합한, 연립내각이 승인되는 날이다. 알도 모로. 시민들에게는
흔들리는 레지스탕스의 서글픈 초상 <굿모닝, 나잇>
-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 상처, 짐까지 모두 끌어안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나 자신이 짊어져야 할 부담의 무게가 큰 사람이라면 더욱 힘들 터.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의 두 주인공 인구(한석규)와 혜란(김지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각각 약사와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들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별 문제없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살아간다. 인구는 정신분열증과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형 인섭(이한위)의 존재 때문에 사귀던 여성과 헤어진 경험이 있고, 혜란은 아버지가 ‘물려준’ 빚 수억원을 갚아야 하는 형편이다 보니 남자를 사귀는 일은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구와 혜란이 때로는 자연스럽게, 때로는 비현실적인 우연으로
리얼한 사랑 이야기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이 휘둥그레져 되묻는다. “그러니까 저기에 사람이 가 있다는겨?” 호롱불로 밤과 어울리던 오지의 시골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오고 처음 텔레비전을 구경하던 날, 사람들은 암스트롱이 달을 거니는 믿기 어려운 장면과 마주친다. 좌중의 놀라움은 젊은 처자의 천연덕스런 질문으로 정리된다. “그럼 달도 미국땅이 된 겨?”
전깃불을 과학의 최대 수혜처럼 감지덕지할 때, 누군가는 우주선을 띄우는 놀라운 불균형의 시대, 1969년. 예컨대 박정희가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누리려고 헌법을 멋대로 뜯어고치려 할 때, 대학생들은 별이 쏟아지는 밤에 미팅하랴, 계몽과 봉사 정신으로 농촌을 누비랴, 삼선 개헌 반대 데모를 벌이랴 분주하다. 권력은 젊은 반역자들을 간첩단 같은 조직 사건으로 엮어 시대를 훈육하곤 했다. 이런 혼돈과 불균형이 인간의 미세한 운명에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한들, 그러니까 사랑의 아름다운 여백을 순식간에 지워버린다 한들 믿지 않을 수
이병헌과 수애의 기기묘묘한 눈빛 <그 해 여름>
-
배우 김해곤의 털털한 연기를 좋아한다. 간혹 <파이란> 같은 멋들어진 각본을 쓰기도 하는 그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선 연출까지 겸했다. 장진영이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날, 뒤늦게 DVD로 <연애…>를 보면서 극장에서 보지 못한 걸 후회했다. 현실의 땅에 발을 붙이고 선 대사는 귀에 착착 감기고, 김승우와 장진영 그리고 조연들의 연기가 자연스럽고 유쾌해 흡사 바로 이웃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는 것 같다. 두집 연애질에 고달픈 남자와 룸살롱에 나가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내리 두 시간을 따라가게 만들다 가슴 한쪽을 찡 울린 뒤 끝맺는다.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 <연애…>는 그 사람을 놓친 뒤의 슬픔이 배어 있는 영화다. 단, 바른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심한 불편함을 느낄 수 있으니 <연애…> 출입을 삼가는 게 좋겠다. 감독, 제작자, 촬영감독은 DVD 음성해설을 진행하면서 평소 버릇대로 말하지 못
너무나 현실적인 그래서 가슴아픈,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
-
욕망의 통로는 시선이다. 아들의 여자와 불륜에 빠지는 작가 다니엘 볼탄스키(다니엘 오테유)의 욕망이 흘러가는 궤적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다니엘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폴란드계 프랑스인인 작가 다니엘은 20여년간 세르쥬 노박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 몰래 참석한 그는 도서관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한다. 인물들을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고 그가 바라보던 여인과 눈이 마주친다. 다니엘은 외도하던 그 여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을 ‘두려움과 전율을 느꼈다’라고 기록한다. 훔쳐보던 주체가 훔쳐보는 대상으로 전환되면서 두려움과 전율이라는 양가적인 반응이 생겨난 것이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은 팜므 파탈이 등장하는 누아르영화이면서 작가의 존재론을 묻는 예술가 영화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의 영어 제목은 ‘기묘한 범죄’(Strange Crime)이고, 불어
에로틱한 분위기의 철학적인 질문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
-
이윤기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아주 특별한 손님>은 전작 <여자, 정혜> <러브토크>보다 비균질적이면서 다층적이다. <여자, 정혜>와 유사한 배경 아래 있지만 다소 건조해 보였던 그때의 영화적 표현에 비해 훨씬 더 정묘한 화음을 갖췄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보경의 하룻밤 이야기는 의문투성이의 구조로 시작하지만, 마침내 가능한 자기 회복의 조짐을 보이며 끝을 맺는 데까지 이른다. 게다가 영화의 중반부에는 그런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있을 거라 상상하기 힘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우울한 분위기까지 끼어든다. 건조하면서도 직선적인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소설 <애드리브 나이트>와는 달리 <아주 특별한 손님>은 명백히 다른 차원에서의 영화적 중층을 만끽하게 한다. 이윤기 감독은 세 번째 작품에서 확실히 한발 더 디디는데, 그가 말하는 “생경함”이 바로 그 힘이 아닐까 싶다.
-할 이야기가 많은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이상했나
<아주 특별한 손님>의 이윤기 감독 인터뷰
-
이윤기의 세 번째 장편영화 <아주 특별한 손님>이 개봉한다. 조용하게 큰 홍보없이 만들어진 작은 영화다. 그러나 영화를 들여다보니 이런저런 할 이야기들이 꽤 많다. 두편의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가능성들이 좀더 정밀하게 묶인 형태의 영화가 나왔고, 상업적 부담에서 벗어나 있어 그런지 자유로운 영화적 필치도 엿보인다. 갑작스럽게 떠밀려 시작된 한 여자의 하룻밤 이상한 여정을 통해 기묘한 삶의 애착을 길어올리는 영화다. 올해의 아주 특별한 영화로 기억될 만한 <아주 특별한 손님>을 소개한다.
삶을 향해, 자아를 찾아 ‘한 걸음 더’
“저는 미요코가 아니에요. 루미에요. 오사와 루미라고 해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아주 특별한 손님>의 원작인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소설 <애드리브 나이트>의 주인공은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그렇게 간단히 말해버린다. 독자는 이 여자가 한 무리의 남자들이 찾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적어도 그녀의 진술에 따라 확
이윤기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아주 특별한 손님>
-
<Ashes To Ashes> 자우림 | T엔터테인먼트 발매
전체적으로 검은 부클릿이 먼저 눈에 띈다. 펼쳐보면 멤버들은 모두 흑백이고 오직 김윤아만이 컬러 사진이다. 자우림의 6번째 앨범 <Ashes To Ashes>의 이런 첫인상은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이 앨범은 지금까지의 자우림이 유지하던 어떤 특성들이 변화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차이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고, 포기한 어떤 것(들)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앨범의 사운드는 전반적으로 느리고 낮게 진행되며 디스토션이 등장하거나 단조 리듬을 중심으로 구성된 리프가 흐르기도 한다. 이 앨범을 듣고 어둡고 우울한 정서를 느꼈다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장르로 구분하자면 슬로코어, 새드코어와 같은 용어가 떠오르겠지만 이 사운드의 무게감은 그 장르적 규범을 정리했던 포티스헤드나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의 감수성과 비교되지는 않는다. 첫곡 <Soul Blues>와 <Loving
분산된 무게중심, 실수이거나 의도이거나
-
<에보니 타워> 존 파울스 지음 | 정영문 옮김 | 열린책들 펴냄
<에보니 타워>는 <콜렉터>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존 파울스가 중편과 단편을 엮어 1974년 발표한 단편집이다. 1926년에 태어난 파울스는 전후(戰後)에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대표작인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1969년에 발표됐다. 그런 연표를 떠올리며 예술과 소설과 창작에의 질문이 어른대는 <에보니 타워>를 읽는다면 이 소설들이 품고 있는 긴장을 좀더 밀접하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울스가 애초 <변주>라고 이름 붙이고 싶어했던 <에보니 타워>는 개별 작품의 줄거리를 나열하는 행위가 부질없게 느껴지는 소설집이다. 예를 들면 타이틀작인, 상아탑인 아이보리 타워와 대비되는 용어인 <에보니 타워>는, 노화가를 방문한 젊은 화가 겸 작가가 겪는 이틀과 에필로그 비슷한 찰나의 느낌이 전부인 소설이다. <
무너질 듯 위태롭게, 행간은 변주된다
-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 12월2일(토) MBC 밤 12시30분
배우의 자긍심은 강건하다.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일 이러한 편견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 그 자신도 배우인 제임스 다시다. “나는 정말 정말 야심이 없다.” 카리스마를, 배우가 지닌 매력 중에서도 최고로 꼽는 오늘날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나는 배우로서 부유해지고 유명해지는 것을 기대하지 않을뿐더러 부와 유명세가 나를 이끄는 힘도 아니다.” 올해 31살. 한창 커리어를 쌓아가야 할 천금과 같은 시기지만 다시는 191cm나 되는 키를 건들거리며 “나는 그저 나 자신만으로 행복하다”고 토로한다. “내겐 우러러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반드시 그들처럼 되길 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 음식처럼 소박하고 그곳의 날씨처럼 온건한 현실주의자인 다시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도널드 서덜런드, 브라이언 콕스 등을 배출한 런던극예술학교(LAMDA)에서 <헤라클레스> &l
[앗! 당신] 행복해지는 법을 아는 사람, 제임스 다시
-
EBS 12월2일(토) 밤 11시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이런 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난감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영화는 더 없이 마음을 울리고 그 감동을 적절히 조절하며 표현하기에 지면은 너무 작고, 게다가 이미 수차례 좋은 글들이 쏟아진 상황에서 그 영화를 다시 쓰는 것. 내키지 않은 일이다. 이런 영화를 그저 ‘소개’하는 것처럼 따분한 일도 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해 약간의 양해를 구한다.
<라스트 데이즈>는 <게리> <엘리펀트>에 이은 구스 반 산트의 죽음의 삼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게리>가 사막을 가로지르려던 두 남자의 비극적인 실화를 다루었고 <엘리펀트>가 컬럼바인고등학교의 총기난사 사건을 다루었던 것처럼 <라스트 데이즈> 역시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시대의 반영웅, 차라리 시대의 비극, 시대의 슬픔이었던 커트 코베인이다. 1994년 4월5일, 27살의 나이로 숨진 커트
그 죽음 직전의 순간으로, <라스트 데이즈>
-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정윤철 감독은 감독이 되지 않았더라면 대치동 학원 강사로 지금쯤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 달변가다. 소싯적에 전교 7등은 놓치지 않았을 날선 외모에서 쏟아져나오는 조리 분명하고 강약 확실한 문장의 추임새가 그 증거다. “원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로도 아인슈타인처럼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다. 인간관계를 맺는 관성과 상대성 이론”이라는 근사한 말은 두 번째 증거다. 물론 첫 영화 <말아톤>으로 생각에 넘치는 성공을 거둔 정윤철 감독은 현재 대치동 학원 강사만큼 바쁘다. 한편의 영화를 막 개봉시켰고 또 한편의 촬영을 두달 전에 끝내고 편집 중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인권옴니버스영화 <세가지 시선>의 <잠수왕 무하마드>, 후자는 김혜수, 천호진, 박해일, 정유미가 출연하는 장편 <좋지 아니한家>다. 유독성 가스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알고보니 타이의 잠수왕이었다
<잠수왕 무하마드> <좋지 아니한家>의 정윤철 감독
-
현재 촬영 중이거나 연내에 촬영을 시작할 한국영화들이 예년에 비해 크게 감소한 것으로 알려져 충무로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6개의 스튜디오를 보유하고 있는 남양주 종합촬영소의 경우, 11월에 스튜디오를 사용한 영화는 <복면달호> 한편이다. 11월24일과 25일에 이명세 감독의 <M>과 하명중 감독의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가 스튜디오를 사용할 계획이지만 “제작이 불붙었던 올해 상반기나 지난해 이맘때에 비하면” 크게 줄었다. 남양주 종합촬영소의 한화성 팀장은 “올해 9월까지만 해도 스케줄이 빡빡해서 제1 스튜디오는 쪼개서 사용할 정도였다”면서 “대개 서울 인근에서 촬영하는 영화들이 15편에서 많게는 20편에 달했는데 지금은 촬영을 시작할 영화들까지 포함해도 5∼6편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하반기 한국영화 제작 감소를 체감하는 건 스튜디오만이 아니다. 부산영상위원회에 따르면, 11월22일까지 로케이션
하반기 한국영화 제작 대폭 감소
-
<못말리는 결혼>(가제)이 지난 11월15일 홍천 비발디 파크에서 촬영에 돌입했다. 이날 촬영분은 기백(하석진)과 은호(유진)가 부모 몰래 여행을 떠나려다 붙잡히는 장면. 집안의 반대로 괴로워하는 연인의 얘기에 기백의 어머니(김수미)와 은호의 아버지(임채무)의 코믹 연기가 덧붙여질 이 영화는 2007년 4월 개봉할 예정이다.
<못말리는 결혼> 촬영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