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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인간의 다른 활동과 달리 이기적이지 않아.”(<잠입자>) 정말 그럴까. 적어도 <희생>의 바로 전작인 <노스텔지아>까지의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꽤 그렇게 생각한 듯하다. 15세기 몽골제국의 침략 등 러시아의 온갖 수난을 거치며 <삼위일체>를 그려 인간들의 구원을 도모하고자 했던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수도사도, <노스텔지아>의 고르차코프도 촛불 하나를 세상의 온 믿음인 양 소중히 감싸며 무한히 이타적인 예술가의 숭고를 지켜냈다.
타르콥스키가 꾸준히 도스토옙스키류의 ‘약한 인간’을 그려왔다고는 하나, 사실 그 면면을 자세히 살피면 그 인간들은 약한 만큼 동시에 드센 자기만의 숭고를 지켜낸 위인들에 가까웠다. 전세계 관객들이 타르콥스키의 인물에 절절히 감동한 이유도 그들의 약한 듯하면서 위대한 숭고에 있었다. 여기서 숭고란 인간이 도저히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득한 세계의 압도감을 언어화한, 형용할 수 없
부끄러운 아버지의 초상, 숭고하기보단 아득한 회한으로서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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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누워 <희생>을 보며 잠들지 않을 수 있을까. ASMR처럼 쉼 없이 흘러나오는 형이상학적 대사와 신의 변화를 뚜렷하게 감지하기도 어려운 장면간의 유동성, 장장 몇분간 지속되는 상승과 하강 이미지의 교차, 그리고 한정된 무대에서 펼쳐지는 꿈같은 이야기, 아니 사실은 이야기라고 하기도 마땅찮은 어떠한 순간들의 연속을 보며 맨정신을 부여잡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단출하게 말하자면 <희생>은 아주 지루해서 졸음을 참기가 어렵다.
김영진 평론가(당시 기자)도 1995년 5월 <씨네21>에 “필자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팬이다. 그의 유작 <희생>을 다섯번이나 봤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다섯번 모두 특정 부분에서는 항상 졸았다”라며 극장에서조차 그 수마를 이기지 못했단 기록을 남겼다. <희생>을 보다 잠드는 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두에게 평등한 불가항력의 과정인 듯하니 딱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
시네필은 왜 잠 오는 영화만 좋아하나요, <희생> 이후 30년, 한국 예술영화 담론의 나쁜 기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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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는 한국의 영화 문화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코아아트홀과 동숭아트센터 같은 예술영화관들이 호황을 누렸고, <씨네21>과 <키노> 등 영화 전문 잡지들이 잇달아 창간되기도 했다. 또한 대학가에서는 극장에서 볼 수 없는 고전영화나 미개봉 영화들을 비디오테이프로 상영하는 행사들이 연일 열리곤 했다. 레오스 카락스, 뤼크 베송,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테오 앙겔로풀로스, 에미르 쿠스투리차, 왕가위, 기타노 다케시, 이와이 슌지 등은 1990년대 한국의 시네필이 각별히 아끼는 감독들이었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역시 이들 중 한명이었다.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1986)은 1995년 2월에 개봉했다. 제작된 지 약 10년이 넘은 오래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누군가는 당시 <희생>의 관객이 3만명이 넘었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5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심지어 10만명이 넘었다고 말하는 사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서 있는 사람,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와 1990년대 한국의 영화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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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의 성인, 순교자 혹은 유례없는 영화 시인. 1960년대 무렵부터 20세기 러시아를 넘어 전세계 영화예술의 부흥을 이끌었던 영화 작가 중 한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희생>(1985)이 8월21일 한국 극장가에 4K 리마스터링으로 돌아온다. <희생>이라 하면 1995년 한국에서 늦깎이 개봉하여 3만~10만 관객이라는 기록적 흥행을 이끈 영화 바깥의 신화와 함께,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필모그래피와 인생사를 총집약한 걸작으로도 공인되고 있다. 영화의 구조는 무척이나 간결하다. 은퇴한 저널리스트 알렉산더는 말하지 못하는 아들 고센과 어느 한 외딴집에서 지내고 있으며, 바깥세상은 세계 멸망을 눈앞에 둔 전쟁 소식으로 시끄럽다. 이 와중에 알렉산더의 집을 찾은 몇몇 친구들은 세계, 예술, 믿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그 끝에서 알렉산더는 장대한 희생을 감행하며 아들 고센에게 자신과 세계의 의지를 잇는다. 간단하고 일견 허무해 보이는 이야기는 영화의 프레임을 길고 넓
[커버] 영화의 순교자, 극장에 돌아온 <희생>과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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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들른 박물관에서 봤던 개미들을 잊을 수 없다. 한구석에 얕게 물이 채워진 수조가 있고 그 안에 큰 잎사귀가 여럿 달린 나뭇가지가 꽂힌 유리병이 두어개가 놓여 있었다. 그 사이를 다리처럼 연결하고 있는 베이지색 굵은 로프와 함께 거의 모든 잎의 가장자리가 톱니바퀴처럼 뜯겨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이 전시물이 뭘까 의아해하며 가까이 가보니 수조의 한쪽에 뚫린 구멍을 두고 로프 위를 양방향으로 줄지어 가는 개미들이 보였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같기도 하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동하는 부품 같기도 했다. 잠깐 동안 진짜 개미가 아니라 혹시 ‘로봇 개미’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작동하는 자연을 보여주는 전시에 감탄하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영상 촬영을 하다 보니 다른 모습의 개미들이 눈에 띄었다. 길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 끝쪽에 자기 몸집보다 큰 잎사귀 조각을 물고 모여 있는 개미 무리였다. 가만히 보니
[임소연의 클로징] 언캐니 밸리에 빠진 개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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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단지 생계 때문만은 아니다. 일이 우리를 만성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하고 공황장애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일을 그만두느니 삶을 그만두는 게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하게 할지라도, 우리는 일을 도무지 그만둘 수가 없다. 왜일까? 우리가 일을 너무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일이 삶을 완전히 망치고 부숴주기를, 천천히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망하고 있는 마조히스트이기 때문일까? 2022년 6월 훌루(한국에서는 디즈니+)를 통해 첫 시즌, 그리고 마찬가지로 올해 6월 세 번째 시즌이 공개된 드라마 <더 베어>는 주인공 카르멘(‘카미’) 베어제토를 통해 우리가 일과 맺고 있는 애증 병존의 교착 관계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집안 출신인 카미는 마약중독자였던 형의 자살 이후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를 주 종목으로 하는 형의 가게 ‘더 비프’를 운영하기 위해 고향 시카고
[이연숙의 장르의 감정] 일의 고통과 고통, <더 베어>와 자기 파괴적 열정으로서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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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리얼리즘 영화들의 계보 속에 있으면서도 고유한, 그래서 정말로 귀중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더 원더스>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 여기에 로르바케르의 첫 ‘마술’이 있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답사할 가치가 있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미래의 시점에서 무언가의 처음을 목격한다는 건 늘 생경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심지어 그 무언가가 마술이라면 보는 이의 입장에서 놀라움을 느낌과 동시에 마음의 벽까지 허물 수도 있다. <더 원더스>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마술이 그렇다. 이 쇼의 마술사는 가족의 대표 젤소미나(마리아 알렉산드라 룬구)이고, 관객은 젤소미나 가정에 위탁된 외부인 마르틴(루이스 휠카)이다. 젤소미나는 마르틴의 호감을 얻기 위해 입에서 벌을 꺼내는 마술을 선보인다.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상대의 긴장을 풀기 위해, 그럼으로써 관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되는 이 마술이 알리체 로르바케르 영화의 본질이라는
[비평] 모든 성장 서사는 마술적이다, <더 원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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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안양은 왜 이렇게 평범하지?” 이 질문이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이하 <수카바티>)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수카바티>의 공동연출자인 나바루 감독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언가에 미친 자들만이 내지를 수 있는 함성에 홀리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그 함성의 주인공인 FC안양의 서포터스 ‘RED’는 노잼의 도시였던 안양을 극락의 도시로 도약시킨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축구의 힘인가? 아니면 안양의 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 그렇게 <수카바티>는 출발점에서 제기된 질문을 질적으로 다른 질문으로 이어가며, 관객을 ‘수카바티’를 미친 듯 외치는 RED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극락(極樂)의 세계에 당도한다.
안양은 아미타불의 정토이자 ‘깨달음이 동반된 즐거움’의 세계를 의미하는 ‘극락’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극락을 뜻하는 산스크리스트어가 바로
[비평]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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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두달차,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수 19만명을 넘어서며 예상치 못한 호응을 얻고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주제의 무게와 영화의 비상업적 화법을 떠올리면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평단만이 아니라 대중 또한 이 작품이 전위적인 형식으로 압도적인 체험에 이르게 하며, 무엇보다 그 과정이 ‘윤리적’이라는 견해를 공유한다. 망설임 없는 호평의 물결 속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견을 제기하려고 한다.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형식적 야심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재현하는 두 가지 선택에서 빚어진다. 우선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수용소 바로 옆에 긴 담장을 치고 사는 나치 가족에 초점을 두는데, 한자리에서 움직임을 자제하는 카메라가 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반면, 담장 건너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로만 나치 가정의 장면을 부유한다. 요약하자면,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와 외부의 사운드가 접촉하며 일으킨 불쾌한 긴장이 이 영화의 도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구역질의 만용, 가장된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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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조금도 난 겁나지 않아 - <FANCY>(트와이스, 2019)
종종 인천의 ‘인천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대개 입을 떼기 전부터 실실 웃음을 흘리다가 상대가 반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인천이라는 도시의 저속함에 대해 쏟아낸다. 그들의 묘사 속에서 인천은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장소이며, 거칠고 더럽고 나쁘기만 한 동네다. 그러나 경계라 부를 만한 것도 마땅히 없는 작은 나라에서 어떤 지역이 특별히 거칠고 더럽고 나쁠 수 있는 확률은 몇이나 될까? 아랫동네 사람인 나는 별다른 계산 없이 떠올린다. 오직 멸시를 위해 거칠고, 더럽고, 나쁜 땅이 되는 수많은 고향들을. 그 생각 다음으로는 말이 지겨워진다.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전부 싫다.
송도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던 동안엔 남동공단에 집을 얻어 생활했다. 집값이 싸고 거리가 가까워 출퇴근은 편했지만, 동네가 너무 빨리 조용해져서 해가 저물면 괜히 겁이 나 집 밖으로 나가지 않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파티] 괜찮아 조금도 난 겁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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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세계
찰스 브라메스코 지음 최윤영 옮김 다산북스 펴냄
한여름, 짙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런 하늘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힘껏 달리는 주인공을 보는 일이 많다 보니, 일본 여행 중에 하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며 ‘일본 애니메이션에 들어온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 문화에서 구름은 벚꽃의 개화와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잠깐 피었다 지고 마는 벚꽃의 짧은 전성기는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컬러의 세계>에 따르면 벚꽃과 구름을 포함해 “미야자키(하야오)의 포근한 색채 감성은 대지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일본 시골 마을의 고요한 평온함을 통해 드러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연을 담아내는 색채 팔레트를 즐겨 쓴다면 왕가위는 어떨까. 왕가위의 <중경삼림>은 홍콩의 중심가이며 유흥가인 란콰이퐁 지역을 잿빛으로 포착하지만 두 인물이 만날 때면 ‘햇살’, ‘밝음’, ‘사랑스러움’의 파랑,
[CULTURE BOOK] <컬러의 세계> <교토, 길 위에 저 시간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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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3대 흉가는 어디일까. 바로 곤지암 정신병원, 경북 영덕횟집 그리고 갈빗집 늘봄가든이다. 영화 <늘봄가든>은 현실 속 괴담에서부터 출발한다. 언니 혜란(김주령)의 만류에도 남편의 유일한 유산인 시골 저택 늘봄가든으로 이사를 간 소희(조윤희)는 그곳에서 조금씩 불길한 운명을 맞닥뜨린다.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하나둘 벌어지고 스산한 분위기 속에 막연한 공포감은 커져간다. 저주받은 공간, 어겨선 안되는 규칙, 악의 없는 금지구역 침범 등 <늘봄가든>은 클래식 호러영화가 갖춰야 할 설정을 충실하게 따른다. 배우 조윤희, 김주령의 호러 장르 변주 또한 기대를 키운다. 작품 전반에 균형 있게 포진한 점프 스케어 구간도 넉넉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절대로 들어가지 마.” 익숙하지만 가장 섬뜩한 공포심을 고양시킨다.
[coming soon] '늘봄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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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영화 <다우렌의 결혼> <시민 덕희> <소셜포비아>, 시리즈 <모래에도 꽃이 핀다> <해피니스> 등 출연
<헤어질 결심>
좋아하는 한국영화가 정말 많지만 그중 으뜸이다. 사랑의 의미, 생존의 의미, 진실의 의미가 무엇일지 나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건네게 되는 영화다. 나도 저렇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정말 사랑이라면 저 정도의 마음까지 도달해야 할까? 아파도 사랑은 하고 싶다.
헬스
룰대로 살기. <나 혼자 산다>에서 말한 “부정을 부정한다”의 일환이다. 매일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끝냈을 때 비로소 일상을 시작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면 성장을 만끽할 수 있다. 가장 가시적인 성장이 몸의 변화 아닐까? 신체적 프레임을 넓혀야 좀더 지금 내 나이에 맞는 배역을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 헬스에 열중한다.
철학책 읽기
존재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LIST] 이주승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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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숲 사이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는 현장. 그곳엔 수많은 노동자들의 땀과 건축자재들이 모였을 뿐 아니라 ‘돈’도 함께 있다. 그 돈으로 정직하게 건물을 쌓아 올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도장을 위조하고 숫자를 조작해 사익을 축재한다. 이런 사소한(?) 불의가 쌓여 건물 철근이 쏟아져 내리고 유리는 박살난다. tvN 드라마 <감사합니다>는 건설회사에 만연한 횡령과 비리로 얼룩진 해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단지 ‘건설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적 신뢰도가 ‘순살 아파트’처럼 허물어진 한국 사회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감사합니다>는 횡령과 비리로 회사를 갉아먹는 “쥐새끼”들을 처단하겠다고 공언한 신차일 팀장(신하균)을 중심으로 JU건설 감사팀이 조직 내 각종 비리와 횡령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오피스 ‘클린’ 활극이다. 하지만 내용이 전개될수록 우리가 현실에서 본 온갖 부조리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오피스 ‘더티’ 활극 같기도 하다.
[CULTURE TVIEW]'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