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위대한 영화비평가 가운데 한명인 로빈 우드는 하워드 호크스를 다루는 저서의 서문에서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영화인 조셉 로지의 <에바>와 호크스의 <레드 라인 7000>을 비교한다. 로빈 우드에게 있어 고전기 할리우드영화와 현대영화가 분리되는 지점은 뜻밖에도 화면에 개입하는 연출자의 자의식이다. 그는 현대영화의 연출자들이 무분별하고 습관적으로 극단적인 자의식을 발휘한다고 지적한다. 화면을 조율된 리듬과 창조적인 흐름에 맡기는 대신 불필요한 의미 부여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고전기 할리우드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주인공의 행위와 몸짓, 인물의 표정과 대화, 카메라 움직임과 편집의 속도가 복잡하게 뒤얽힌 가운데 표현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며 생동감 넘치는 긴장에 있다. 하워드 호크스의 영화엔 내러티브가 요구하는 표현과 행동의 범위를 벗어난 연출의 자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특성이 호크스의 영화를 복잡한 현실의 한 단면으로 지켜보도록 하는 동력이며 도식적인 해석의 틀로 환원할 수 없는 요인이다. 로빈 우드는 이것이 바로 영화라고 단언한다.
이는 로빈 우드 혼자서 고수하던 유별난 주장이 아니다. 대중 집단을 사로잡은 영화의 위대한 시대인 20세기 전반기를 통과한 영화비평과 시네필리아는 미학적이면서 도덕적인 자율성을 갖춘 시청각 집합체로서의 미장센을 옹호하곤 했다. 이론에 의존하는 대신 스크린에 비친 관능적인 신호에 주목하던 V. F. 퍼킨스, 제라르 르그랑, 매니 파버와 같은 유럽과 미국의 비평가들은 이 관점의 편에 서서 고전기 영화의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화면구성에 매혹을 느꼈으며 같은 관점에서 1950년대에 본격적으로 출현한 모던 시네마의 실천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화면에 개입하는 연출자의 손짓 아래서 탄력적이고 창의적인 영화의 미장센이 통제를 잃고 너무나 많은 요소가 분별없이 용인되어버린다고 비판했다. 자유로운 행위와 몸짓은 뻣뻣하고 절뚝거리는 신체의 부자유로, 활기 넘치는 대화와 표정은 모호한 침묵과 무표정으로, 정교하게 상호작용하는 카메라와 편집은 단절된 숏과 숏 사이의 간격으로 전환된다. 모던 시네마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같은 특징은 “일체의 규칙과 규정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영화를 형성”(V. F. 퍼킨스)하는 기반이다.
하지만 모던 시네마의 실천은 고전기 영화의 규칙을 옹호하는 비평가들의 비판에서 벗어나 있다. 모던 시네마는 그 바깥에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던 시네마는 허구적이고 자율적인 고전적 미장센 바깥에 있던 영화의 가능성을 끌어들이는 실천이다. 그럼 모던 시네마의 영토는 어디에 있는가? 영화의 모더니즘은 다큐멘터리의 연장선에서 매체의 조건을 검토하는 특수한 영화사의 일탈이기 때문이다. 모던 시네마는 결코 픽션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불가피하게 현실과 접촉할 수밖에 없는 영화의 물리적 속성을 자각한 사건이다. 그 작업들은 영화가 완벽하게 조율된 픽션에 속할 수 없는 다큐멘터리적 지평에 놓여 있다는 것을 노출한다. 2차 세계대전을 통과한 영화는 통합적이고 안정된 장면의 질서를 설정할 수 없었다. 모던 시네마에 나타나는 불규칙한 개입, 붕괴, 침묵, 그리고 연속성의 중단은 그것이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자국이기 때문에 벌어진다.
질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모던 시네마는 ‘조우의 예술’에 속한다. 그곳은 둘 이상의 세계의 단면이 충돌적으로 만나는 장소다. 모던 시네마의 화면은 서로 다른 규율과 질서가 이질적인 형태로 공존하는 불화의 형식을 드러낸다. 통일성 있게 조율된 프레임이 아니라 단절적이고 혼란스럽게 분열된 세계가 카메라 앞에 노출되어버린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질서의 층위로 분리된, 그러나 사각의 비좁은 프레임 내부에 나란히 존재하는 세계는 그 안에 필연적으로 새겨지는 존재론적인 격차를 생성한다. 호주의 영화평론가인 에이드리언 마틴은 장뤼크 고다르의 <경멸>(1963)의 초반부 별장 정원에서 펼쳐지는 미장센을 두고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이 장면은 영화가 두발을 양방향으로 내민 채 어딘지 불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경멸>은 한쪽 발을 고전적 미장센의 시대에 걸치고 있는데, 그것은 영화가 1950년대에 컬러와 와이드스크린으로 진화한 이후의 고전적 미장센이다. 다른 한쪽 발은 고다르 자신이 주도한 모더니즘의 시대에 걸치고 있다.” 한쪽엔 고전주의적 색채와 비율과 배경이 존재한다. 다른 한쪽엔 모더니즘의 인물과 동선과 규율이 나타난다. 격차가 발생한 화면은 세계의 세부 요소를 지탱하는 단일한 원칙을 잃어버린다. 모던 시네마는 장면의 기반이 되는 단 하나의 질서를 이탈해 영화가 비일관적인 감각과 체제의 결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몽타주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순간에 세계를 기록하는 스크린은 통제된 허구와 무작위적인 현실이 오가는 다양한 상호작용의 복합체로 변모한다.
현대영화의 기념비적인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사랑>의 도입부에서도 화면은 둘로 갈라진다. 전후 히로시마의 병원과 박물관과 광장을 방문하고 뉴스릴 영상을 보여주는 화면이 연달아 제시된다. 그 위로 장면의 시각 정보를 부정하며 “당신은 아무것도 못 봤어”라는 말을 반복하는 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메라가 기록하는 시각적인 세계와 마이크로 덧대진 청각적인 세계는 분리되어 있다. 어쩌면 누벨바그의 실천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분리된 영화의 세부 요소를 해부하고 긍정하는 작업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은 헤어질 위기에 놓인 두 남녀의 여정과 다큐멘터리로 포착된 어촌 마을의 풍경을 결합한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에서 미국 범죄영화 속 주인공의 행동을 흉내내는 인물들은 파리 도심의 무심하고 즉물적인 광경과 어색하게 맞물려 있다. 전후 모던 시네마는 영화가 더이상 통합적인 미장센을 구획할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하는 형식이다. 20세기 미장센 비평의 대가들이 모던 시네마의 화면을 용납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관된 픽션의 질서를 확립하지 못하는 모던 시네마의 무능력은 미적 형식이 붕괴한 결과물이라기보다 영화의 역사적 한계지점을 가리키는 증거물이다.
이렇게 다큐멘터리가 간직한 리얼리티의 흔적은 모던 시네마의 화면 내부로 침입하기 시작한다. 혹은 모던 시네마의 방법론이 다큐멘터리의 내부로 침식하기 시작한다. 모던 시네마에 나타나는 갑작스러운 비인칭적 개입, 피사체를 구성하는 형태의 붕괴, 인물의 침묵, 행위의 중단은 그것이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자국이기 때문에 벌어진다. 영화의 세부는 연출자의 엄격한 지휘 아래 작동하는 허구적 영역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픽션을 다루면서도 현실의 단면과 접촉할 수밖에 없다. 모던 시네마는 이 명제에 대한 불가피한 수긍이다. 고다르는 네오리얼리즘에서 촉발된 모던 시네마의 흉포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전후 영화의 위대한 성취는 궁핍한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발견한 순간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뉴스릴 필름이 ‘거기에 존재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해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의 역사가 고전영화에서 모던 시네마로 이행했다는 단선적인 서술이 아니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다큐멘터리로 관측된 부분과 픽션으로 연출된 부분이 뒤얽혀 있으며 모던 시네마는 완벽한 픽션도 다큐멘터리도 될 수 없는 영화의 불균형을 노출한다. 오히려 그것은 한 스크린 위에 불균형하게 접해 있는 영화의 서로 다른 단면을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시도처럼 보인다.
고다르는 영화를 두고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를 넘나들며 한축에서 다른 한축으로 진동하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큐멘터리로 분류한 카메라의 접근과 픽션이라고 부르는 연출의 접근은 같은 운동의 두 가지 측면이며, 영화를 탄력적으로 변형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연결되는 순간에서다. 전후 영화의 역사와 형식을 인식하는 고다르의 관점은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맺는 필수 불가결한 연결과 격차로부터 발생한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미군 종군 사진사였던 조지 스티븐슨이 강제수용소의 끔찍한 광경을 16mm 천연색 필름으로 촬영하지 않았다면 <젊은이의 양지>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행복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우슈비츠수용소의 끔찍한 학살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가 표상하는 행복과 결부되어 있다. 모든 다큐멘터리가 극영화에 속하는 것처럼 모든 극영화는 다큐멘터리를 포함하고 있다(일례로, 고다르와 같은 해에 태어난 다큐멘터리스트인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흔히 다이렉트 시네마로 불리는 자신의 작업을 ‘리얼리티 픽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 세계에 접합해 있던 영화의 두 가지 가능성은, 앞서 언급한 명민한 비평가들의 판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편리한 분류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고다르의 말을 비틀어 말하자면 할리우드는 픽션의 주인공이 되었고, 모던 시네마는 다큐멘터리의 피사체가 되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은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를 진동하는 현대영화의 위태로운 경계면을 반사하는 지진계다. 이 짧은 영화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어린 남자아이 에드문트는 어둠으로 장식된 실내 공간과 폐허가 된 베를린의 거리를 오간다. 피사체를 비추는 조명의 변화로 영화사를 서술할 수 있다면, 네오리얼리즘의 혁신은 한편의 영화 안에 표현주의적 그림자와 다큐멘터리의 일상적 피사체를 나란히 배치했다는 데 있다. 에드문트는 한 장면에선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로, 다른 장면에선 거친 질감 위에 포착된 일상의 아이로 나타난다. 빛과 어둠의 경계면에서 <독일 영년>이 놓여 있는 존재론적 위상을 조정하던 에드문트는 끝내 부서진 건물 고층에 올라간 뒤 거리의 바닥으로 추락해 죽는다. 실내극의 공간과 멜로드라마의 정서와 표현주의의 그림자는 소거되고 네오리얼리즘의 다큐멘터리적 관측이 남는다. <독일 영년>은 영화의 한 시기(모던 시네마)가 이전 시기(고전기)의 흔적에 응답하는 픽션이다. 영화사의 한 분기점에서 픽션은 다큐멘터리를 끌어들였다. 혹은 그 스스로 다큐멘터리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이는 화면에 부여된 구성과 편집의 연속적 논리를 파괴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모던 시네마의 실천자들은 미장센의 규율과 몽타주의 원칙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영화의 원점으로 되돌아가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 작동하는 기원적인 긴장을 관측했다. 그들은 다큐멘터리의 장소에서 앞선 시대의 픽션적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영화라는 사물을 만지고 있다. 카메라와 마이크는 마치 고전기 할리우드의 웨스턴이 그랬듯이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가 형성되는 순간에 수반되는 떨림과 불안을 스크린에 기록했다. 누벨바그의 시간이 끝난 뒤에 뒤늦게 영화의 장소에 도착한 장 외스타슈는 영화가 실천할 수 있는 예술적 양식과 표현을 부정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겐 단지 영화 매체를 순수하고 단순한 현실의 기록으로 환원하는 것에 목표가 있을 뿐이다. 외스타슈의 외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카메라 앞의 대상이 들려주는 역사를 전달받는 <0번>은 따라서 지극히 단순한 다큐멘터리이자 그의 모던 시네마가 출발하는 픽션의 한 조각이다. 모던 시네마의 실천은 이렇게 영화 역사의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점으로 적힌다. 그것은 영화가 도착한 두 번째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