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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장 잘할 만한 작품을 만날 기회가 배우에게 몇번이나 찾아올까. 배우 주종혁에게 <한국이 싫어서>는 그런 자신감이 들게 한 영화였다. 극 중에서 그가 분한 재인은 3년 전, 학벌 중심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20대 한국 청년이다. 정착한 뉴질랜드에서 이민 온 계나(고아성)를 만나 우정 어린 누나, 동생 사이가 된다. 한 사람을 외형으로 결론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지를 깨닫게 하는 의미심장한 역할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 뉴질랜드로 건너가 5~6년간 유학 생활을 한 주종혁은 머릿속으로 추억의 사진 앨범을 한장 한장 넘기며 시나리오를 읽었다. 그 시절에 보았던 풍경, 만났던 사람, 느꼈던 감정을 모두 끌어내 자기만의 재인을 만들어냈다.
- 첫 등장에서 놀랐다. 빨간 머리에 돌려쓴 스냅백, 반바지에 조리샌들 차림이 <만분의 일초>의 진중한 검도 선수 재우와는 천양지차더라. 무엇보다 재우는 눈으로 말하는 캐릭터였는데 재인은 독특한 선
[인터뷰] 이방인의 시간을 통과한 뒤에, <한국이 싫어서> 배우 주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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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 가족의 장녀이자 20대 직장인 계나(고아성)가 바라는 건 단 하나다. 춥지 않은 것. 그러나 겨우내 패딩을 입고 지내야 하는 냉골 집, 만날 때마다 주눅이 드는 애인(김우겸)의 중산층 가족, 의견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회사는 줄곧 살을 에는 추위를 느끼게끔 한다. 이렇게 살다가는 결국 얼어서 부서질까봐 그는 홀로 뉴질랜드 이민행을 택하지만 한국을 떠난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순탄한 길로 들어설 리 없다. 낯선 땅에서 따뜻한 햇볕과 살랑이는 바람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아득한 미래가 주는 불안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여전히 몸을 옹송그린다. 배우 고아성은 종착점을 지정하지 않고 과정에 표류하기를 자처한 영화에서 중심을 잡되 의도에 맞는 연기로 작품과 관객을 연결해냈다. 인터뷰로 만난 그는 계나처럼 양팔로 몸을 감싼 채 말하는 모습이 언뜻 추워 보였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가 지금 얼마나 열의에 차 있는 상태인지를 알 수 있었다.
- 영화계
[인터뷰] 오직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이 싫어서> 배우 고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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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국인의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에 한국이 있다면 궁금해질 것이다. 그가 한국이 싫어진 이유와 어지럽고 복잡할 지금의 마음이 말이다. 장건재 감독의 신작 <한국이 싫어서>는 계속 여기서 살면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아서 고국을 뜬 29살 싱글 여성의 이야기다. 헬조선 담론이 대두되던 2010년대 중반의 한국의 사회상을 담은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한국의 가난한 집 첫째 딸이자 성취감을 못 느끼는 직장인으로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한기를 느끼던 계나(고아성)는 오래된 애인(김우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온화한 기후의 뉴질랜드로 이민 간다. 타지살이의 초입에서 워킹홀리데이 중인 20대 한국 남성 재인(주종혁)과 친구를 맺고 부지런히 일하고 연애하며 계나의 살갗은 서서히 건강한 태양빛을 띤다. 그렇지만 <한국이 싫어서>는 외국살이의 낭만화엔 추호도 관심이 없다.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 한국 청년의 불안하고 혼란한 마
[커버] 그래도 우리는 서로가 좋아서, <한국이 싫어서> 배우 고아성, 주종혁, 김우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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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수는 세 차례에 걸친 오디션을 통해 <폭군>의 채자경이 되었다. 그는 무용을 전공한 자신의 경력을 믿고 “몸 잘 쓰니?”라는 박훈정 감독의 오디션 첫 질문에 “자신 있다”고 답했지만, 정작 대본을 받아 읽은 후에야 자경을 연기하기 위해 지금껏 몸을 활용했던 방식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 함을 자각했다. “작품 합류가 확정되기 전부터 킥복싱을 배우고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폭군>의 일원이 되고자 간절한 마음으로 자경에게 필요한 역량을 개발해갔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준비할 것이다.” 지금껏 조윤수는 배역에 접근할 때 ‘공감’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이자 금고 기술자인 자경은 스스로 “여리고 쾌활하다”고 고백하는 조윤수의 성정과는 여러모로 대척점에 놓여 있었다. 그는 기존 방식 대신 “자신에게 없는 매력을 가진 자경을 동경”해보길 시도했고, 어느새 “내가 갖지 못한 지점을 지닌 자경을 사랑하게” 되면서 앞으로 배우 인생에 유
[who are you] ‘폭군’, 조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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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건국이 오로지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영화 <기적의 시작>이 공영방송 KBS에, 그것도 광복절에 편성된다고 한다. 이 글이 나갈 시점엔 이미 전파를 타고 난 뒷일이 될 듯하지만, 본래 일정표로는 금요일인 <독립영화관>을 하루 앞당겨 추가 편성하면서까지, 제작진이 방송권 구매를 거부하자 담당 국장이 기안하여 전결하는 기괴한 방식으로, 끝끝내 방송을 고집하고 있다 하니 기가 찰 일이다. 역사에 무지한 광신도들의 기적(奇蹟)을 작위하기 위해 다수가 기함(氣陷)할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 영화로 의도했던 건 실은 역사적 사실을 다룬 진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헛웃음을 자아내는 허구적 코미디가 아닐까 의심케 하는 대목 한 가지. 제작자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독립영화 인증을 신청했지만 영진위는 “객관성 결여와 설득력 있는 논증 제시 부족” 등을 이유로 인정을 거부했다는 것. 그런 영화가 공영방송 KBS의 <독립영화관>에
[정준희의 클로징] 기적의 시작, 파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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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OTT가 HDR이란 용어를 들고 나오기 전까지 영화 속에서는 풍부한 블랙의 계조(밝기의 단계)를 만날 수 있었다. HDR은 High Dynamic Range의 약자로 이미지 암부의 블랙부터 하이라이트의 화이트까지 밝기의 단계가 더 넓어지고 많아진 것을 말한다. 블랙의 표현이 풍부하다는 OLED TV가 등장하고, 핸드폰 디스플레이도 HDR을 지원한다고 광고한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그간 보지 못했던 블랙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막상 우리는 최근의 많은 한국영화와 시리즈물들에서 블랙의 계조를 찾아보기 어렵다. 어둠이 많은 공간에서 그 공간 안에 배치된 어둠과 각각의 사물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블랙의 계조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화면 속 사람이 갖고 있는 블랙도 마찬가지다. 블랙의 계조가 풍부한 머리카락의 구분은 사라지고 하나의 검은 머리카락 덩어리로 보이기 일쑤다.
영상기술은 휴먼 비전 인간의 눈과 똑같이 보이는 것을 목표로 발전해왔다. HDR도 그 목표 중 하나다. 인간의
[박홍열의 촬영 미학] 영화, 어둠의 계조를 잃다, HDR 시대에 ‘Black’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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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업영화의 주요 흥행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기류를 꼽아보자면 ‘밴드왜건효과’(band-wagon effect)와 ‘언더도그효과’(underdog effect)를 들 수 있다. 전자가 대세·강자를 따르는 심리에서 비롯된다면, 후자는 열세·약자를 응원하는 마음이 이끄는 효과다. 역대 한국영화 최대 흥행 연작 <범죄도시> 1~4편(2017~2024)의 관객 총합은 4175만명. 작품의 안과 밖에서 밴드왜건효과가 확연하다. 최강 주먹이 최악 빌런을 후련하게 때려잡아줄 것이라는 악단 마차가 관객을 모았다. 한편으로 김한민 감독의 역대 한국영화 1위작 <명량>(2013)을 포함한 ‘이순신 3부작’도 총 2945만명이 봤다. 이 경우는 서사 내부에 언더도그효과가 뚜렷하다.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지원으로 보나 왜군의 세력으로 보나 누가 봐도 열세인 상황에서 나라를 지켰다.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라는 홍보 문구는 언더도그효과의 최대치를 노려 적중한 사례다. 그
[비평] 열세 서사의 징후적 조류, <행복의 나라>를 계기로 본 한국영화의 한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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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킬링 타임’을 위한 블록버스터영화에서 과학 논리는 어느 정도 엄밀해야 할까. <트랜스포머>는 여러모로 견디기 힘든 영화였지만 가장 보기 괴로웠던 장면은 극 중 분석가가 외계 로봇의 흔적을 두고 “이 신호 패턴은 스스로 학습하면서 자체 진화하고 있으므로 푸리에 변환을 넘어 양자역학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원래 양자역학에서 쓰는 게 푸리에 변환인데 무슨 소리지? 왜 같은 말을 두번씩 하면서 있어 보이는 척을 하지? (끝까지 보고 나니 심지어 영화가 엉망진창인데?!?!) 즉, 아무 말이나 한 거다. 이런 대사를 마주하면 영화를 호의적으로 보려고 애쓰다가도 갑자기 튕겨져 나오게 된다.
토네이도 재난을 다룬 <트위스터스>는 <트위스터>(1996)의 28년 만의 후속작이다. 얀 더본트 감독이 <스피드>의 대성공 이후 연출한 <트위스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토네이도를 쫓는 스톰 체이서들의 삶의 태도를 삼각관계
[임수연의 이과 감성] 블록버스터영화에 과학적 자문이 왜 필요한가요?, <트위스터스>가 토네이도를 길들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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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지하 지음 창비 펴냄
현대예술가이자 퀴어적 존재로서 다양한 글쓰기를 해온 이반지하의 세 번째 단독 저서. 이번에는 ‘공간’에 대해 다룬다. 주제로 삼기엔 너무 광범위한 개념을 담은 단어일까? 책은 “완전히 열려 있어도, 한 귀퉁이만 닫혀 있어도,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길, 서로를 연결하는 길”도 공간이라고 말한다. 집, 직장, 사회복지 내지는 규범 모두가 포함될 수 있다.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는 미흡한 폐쇄성으로 정의되는 넓은 의미의 공간에 대해 느슨하게 연결된 에세이들을 모은 책이다.
작가는 고정된 공간에 속해서 정착하고 가꾸고 안주해본 적이 없다. 머물던 곳에서 도망치고 다른 장소로 이주하는 삶은 결혼이라든지 매끄럽게 설계된 독립과 무관하며 ‘작품’이라 부르는 짐더미를 이고 지고 사는 예술가인 그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글쓰기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매일 먹는 도시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친구에게 받은 에드바르 뭉크 인형의 위치를 고민하는 그의 글에
씨네21 추천도서 -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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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눈빛만으로 남자를 죽인 여자. 그리스신화 속 괴물 메두사는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돌로 변하는 괴물로 묘사된다. 고르고네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불사신이 아니다. 때문에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려 죽는다. 메두사의 이미지는 많은 대중문화에서 차용되어왔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메두사가 주는 공포를 남성의 거세 불안과 연결시켜 논의하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당신이 알고 있던 메두사다. 제시 버튼은 기존 신화에서 벗어나 메두사가 그의 언니들과 바위섬에 살던 시절부터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이미 아테나의 저주를 받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한 상태다. 어느 날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남자, 페르세우스가 배를 타고 섬에 나타난다. 평생 사람들의 시선에 시달렸고 이젠 머리카락 대신 뱀을 갖고 있는 그는 차마 남자 앞에 나타날 수 없다. 메두사는 남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조심스럽게 교감을 시도하며 각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씨네21 추천도서 - <메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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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성 지음 나비클럽 펴냄
<계간 미스터리>와 한국추리문학상 수상작품집 등 한국 미스터리 소설들을 다수 펴내는 나비클럽에서 <추리소설로 철학하기>에 이은 또 한권의 미스터리 비평서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가 출간되었다. <곡성> <파묘>와 같은 오컬트 호러부터 <선재 업고 튀어> 같은 멜로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르가 미스터리와 연결되어 전개되고 해석된다. 미스터리는 어떻게 모든 서사에 침투하는 힙한 장르가 되었을까. “무균실을 지향하는 세계에서 미스터리는 분명 유해한 이야기다. 미스터리는 언제나 선을 넘기 때문이다.” 미스터리의 플롯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우선 범죄를 구성하고 범죄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미스터리는 범죄를 매개로, 사회에서 촉발되는 다양한 유해함의 상상력을 다룸으로써 ‘유해한 이야기’를 넘어서는 ‘유해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현재 성공적인 한국 콘텐츠들의 공통점으로 미스터리 장
씨네21 추천도서 -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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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원희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결혼 후 육아와 살림을 하며 연주에 손을 놓았다. 때때로 피아노 앞에 앉아 쇼팽의 왈츠나 브람스를 연주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피아노 앞에 앉기보다 다른 누군가의 연주를 듣는 삶이 익숙해진 지 오래다. 딸이 일찍 아이를 낳아서 벌써 할머니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현실은 어딘지 아득하게 느껴진다. “원희는 이제 자신은 그저 클래식 애호가일 뿐이라 여겼지만 내심 아직도 언제든 연습만 하면 손가락이 금방 풀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만.” 제2회 김유정작가상 수상작인 <오후만 있던 일요일>의 도입부는 급할 일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60대 원희의 어느 날을 담는다. 경지에 오른 중견 연주자가 자신의 취향이라고 굳게 믿어온 원희가 젊은 피아니스트 고주완의 연주에 빠져든다. 요양원에 간 시모, 치매인 어머니의 돌발행동에 황망해진 남편, 셋째를 임신한 딸, 그리고 시작된 덕질.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스쳐가는 삶의 순간
씨네21 추천도서 - <우리에게 없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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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지 지음 문학동네 펴냄
영화 <파묘>로 오컬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기. 오컬트 장편소설 <귀매>가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로 개정 출간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1930년에 펴낸 <조선의 귀매>라는 책에 실린 ‘귀매’의 정의는 “산이나 숲속에 서린 기묘한 기운에서 태어난 요괴”다. 산과 들에서 이따금씩 느끼는 오싹하고 두려운 기분은 귀매가 일으키는 것이라고. 불길한 예감의 진원지로 민속적인 요소를 활용하는 포크 호러 장르의 작품이기도 하다.
숲속에 있는 흰말 한 마리를 발견한 아이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갑작스레 나타난 말의 갈기를 쓰다듬는 아이는 하얀 머리를 곱게 쪽 찌고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로부터 그 말을 데려가라는 말을 듣는다. 말은 순하게 머리를 끄덕였지만, 아이는 망설인다. 할머니의 말은 의미심장하지만 또한 수수께끼 같다.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물가물 멀어지고, 아이는
씨네21 추천도서 - <귀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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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매> - 유은지 지음 문학동네 펴냄
<우리에게 없는 밤> - 위수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 - 박인성 지음 나비클럽 펴냄
<메두사> -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 - 이반지하 지음 창비 펴냄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8월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