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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밤의 해변에서 혼자> 김형구 X 박홍열 촬영감독 대담

홍상수의 시선을 이미지로 붙잡다

김형구 촬영감독(왼쪽). 박홍열 촬영감독(오른쪽).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의 세계를 구현해온 두 남자, 김형구 촬영감독과 박홍열 촬영감독이 함께 작업한 영화다. 1부를 찍은 박홍열 감독은 영화에 직접 출연하며 역대급 신 스틸러로 등극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홍상수 영화의 카메라는 다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나란히 붙은 1부와 2부를 연달아 보면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아직 그 미묘한 차이를 정확히 말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김형구, 박홍열 촬영감독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부터 <극장전>(2005), <해변의 여인>(2006), <북촌방향>(2011),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까지 함께해온 김형구 촬영감독과 <하하하>(2009), <옥희의 영화>(2010), <다른 나라에서>(2011),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 <우리 선희>(2013), <자유의 언덕>(2014),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을 촬영한 박홍열 촬영감독에게 물었다. 더불어 두 촬영감독이 바라본 한국영화의 현실에 대한 소회도 덧붙인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함께 찍은 걸 계기로 두분을 모셨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

=김형구_ 한 영화를 둘이 찍어서 이야기하려니 민망하다. (웃음) 지난 겨울방학 동안 계속 영화를 찍고 있었다. 1월에 홍상수 감독 신작 <그 후>를 촬영했고, 끝나자마자 이광국 감독의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을 3월 14일까지 찍었다. 두달 반 만에 두편의 영화를 찍은 셈이다. 홍상수 감독 신작에서는 또 다른 작업을 시도했다. 이제까지 쭉 함께했던 이의행 조명감독 없이 진행했다. 늘 변화를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밤 장면도 꽤 많았는데 LED 조명 3개만 가지고 영화를 끝내긴 처음이다. 스틸도 홍 감독 본인이 찍어보겠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박홍열_ 홍상수의 촬영감독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큰 영화에서 열심히 퇴짜를 맞고 다니는 중이다. 어제도 하나 까였다. (웃음) 지난해에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작업했고 최근엔 김미례 감독과 <늑대부대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일본에서 반일 무장투쟁을 하던 분들에 대한 이야기다. 3월에도 짧게 일본을 다녀왔는데 재밌는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이광국 감독과는 처음 작업했는데 호흡이 잘 맞았나.

김형구_ 이광국 감독은 홍 감독 연출부 출신이라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부분도 많다. 기본적으로 컷을 많이 나누는 감독은 아니다. 일정 문제로 서로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요즘은 콘티북이 무슨 사전처럼 두껍게 나오던데, 솔직히 나는 30년 동안 영화하면서 감독과 사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은 아니다. (웃음) 현장맨이라 그런지 현장에서 배우와 세팅이 보이는 상태에서 조율을 해야 제대로 된 그림이 그려진다. 내 나름대로 해석한 숏이 감독의 의도에 부합해서 오케이받을 때의 쾌감이 있다. 촬영감독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한다. 옛날에는 카메라 한대로 전후 편집을 생각하면서 한컷씩 찍어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에는 카메라를 여러 대 돌리니 편집실에 가봐야 그림이 나오는데 예전엔 현장에서 그림, 세팅, 편집을 모두 한땀 한땀 계산해가며 찍었다. 이광국 감독이 예전 내 작품 중 하나가 너무 좋았다고 하기에 그 영화는 카메라 한대로 찍었다고 설명해줬더니 이번에도 그렇게 해보자고 하더라. 오랜만에 현장과의 일체감, 긴장감을 느낄 수 있어 즐거웠다.

홍상수라는 궤적

-두분이 번갈아가며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꾸준히 작업해왔다.

김형구_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시작이었는데, 그때는 홍 감독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라 오다가다 만나면 같이 작업 한번 하자는 말을 자주 나눴다. 진짜 인사치레였다! (웃음) 당시엔 나도 꽤 바빴고 홍상수라는 작가에게 내가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워낙 강하게 자기 세계를 밀어붙이는 감독이니 누가 찍으나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동시에 호기심도 있었기에 진짜로 하자고 했을 때 해보기로 했다. 물론 우려했던 부분은 있었다. 촬영감독으로서 내가 해석한 그림을 찍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몇몇의 경우엔 너무 달랐다. 예를들면 흰 벽을 찍는데 화면이 너무 날려서 다르게 해보자고 제안했는데, 자기는 그 벽이 너무 예쁘다고 하는 거다. 눈으로 보기엔 예쁘지만 찍으면 그렇게 안 나온다고 설명해도, 그래도 예쁘다는 거다. 그외에도 몇 가지 부딪친 것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터득한 건 내가 홍상수라는 사람과 같이 작업을 하려면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봤다. 저 벽이 정말 예쁜가? 예쁘지. 예쁘다! 일종의 최면을 거는 거지.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만큼 현장의 공기를 살려내는 게 강점이다. 최근에는 홍상수 현장에 가면 자연스럽게 내 안에도 홍상수가 스며드는 것 같다.

박홍열_ 홍상수 감독의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다. 당시 나는 김형구 감독님의 제자였고 조수도 했던 터라 김형구 감독님이 바쁘실 때 홍상수 감독님에게 나를 소개해주셨다. 늘 존경해왔던 분의 현장이라 너무 기뻤다. <생활의 발견> 같은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저런 그림을 만들지 궁금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장은 준비한 것들을 그대로 풀어내고 재현한다. 홍상수 감독의 현장은 불현듯 튀어나오는,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만나고 담아내는 자리다. 나는 감독을 일종의 영매라고 생각한다. 감독이 모든 걸 다 알고 완벽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생각과 의지를 가진 감독이 그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스탭, 배우, 날씨, 상황 등 수많은 변수를 조화롭게 만나고, 예민하게 포착해내야 좋은 영화가 나온다. 일반적인 영화들은 우연을 배제하는 방식인 데 반해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그걸 찾아내 끌어안는다. 매번 작업할 때마다 다른 것, 새로운 것들을 만나게 해줘 즐겁다. 기본적으로 스탭이 적다보니 현장의 밀도가 높고 그 안에서 생기는 에너지도 좋다. 내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영화 자체보다 현장으로 기억된다.

-긴 시간 홍상수 감독의 손발이 되며 달라진 부분도 꽤 많을 것 같다.

김형구_ <극장전>에서 처음 줌을 쓰는데 그때도 많이 부딪쳤다. 지금은 홍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인식되는 줌 기법을 처음 시도할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테스트 촬영을 할 땐 줌을 엄청 연습시켰는데 막상 촬영이 들어가면 시도를 못하더라고. 결국 늘 찍던 넓은 숏을 자주 썼다. 이럴거면 연습은 왜 한 거냐며 투덜댔지. (웃음) 그다음 작품부터 과감하게 쓰기 시작하는 걸 보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줌이 캐릭터의 심리를 전달하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쑥 들어가는 것과 천천히 들어가는 건 전혀 다르지 않나. 어떤 상황에서 줌을 느리게 했더니 이건 아니라고, 쑥 들어가라는 거다. 감정이 깨진다고 했더니 이건 감정 전달이 아니라 커팅의 개념이라고 설득을 하더라. 처음에는 이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찍을 땐 줌을 느리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게 재미있다. 항상 뭔가 다르게 시도하려 한다. 같은 숏, 같은 기법이라도 늘 달라진다. 그게 홍 감독의 힘인 것 같다. 함께하며 영화의 또 다른 면모를 배운다. 학생의 기분이랄까. (웃음) 찍을 때마다 재미있다.

박홍열_ 내겐 줌을 할 때 주문이 엄청 많으셨다. 솔직히 정말 많이 혼났다. 들어가서 줌 100번 연습하고 나와! (웃음) 그것 때문에 싸운 사람도 많을거다. 나는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쉬는 날 일부러 감독님이 잘 보이는 창문 옆에서 내내 줌 연습하고. (웃음) 속도나 타이밍에 대해 디테일한 주문이 많았다. 이번 건 경쾌하고 리듬감 있게, 이번에는 부드럽고 빠르게. 부드럽고 빠르겐 이상하잖아! (웃음) 처음엔 되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홍상수만의 호흡이라 생각한다. 그의 의지를 충실히 포착하고 반영하는 손발이 되어야 한다. 나중에는 스스로 홍상수가 된다. 홍상수에게 빙의한다고 해야 할까?

<밤의 해변에서 혼자>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각각 1, 2부를 하나씩 맡아 찍었는데 특별히 어려웠던 점은 없나.

김형구_ <밤의 해변에서 혼자> 땐 9명 정도였던 것 같다. 나보다는 아무래도 박홍열 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박홍열_ 늘 새로움을 추구하시지만 나와 작업을 하면서 특히 스탭을 줄여나가는 시도를 계속 하셨던 것 같다. 다 내 잘못이다. (웃음)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독일에 갔을 땐 스탭이 4명이었다. 사람이 적으니 변화에 빨리 적응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이건 제작비에 따른 선택이 아니다. 표현하는 것, 내용에 따라서 스탭이 많이 필요한 이야기가 있고 적을수록 좋은 현장이 있는 거다. 홍 감독의 영화는 완전히 열려 있는 영화라 스탭이 많으면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어렵다.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일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스탭이 적은 게 유리하다. 그런데 독립영화 혹은 저예산영화를 찍는 분들 중 일부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 ‘홍상수는 10명을 데리고도 영화를 찍는다고 하더라.’ 간혹 영화과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홍 감독님 예를 들면서 왜 그렇게 스탭이 많이 필요하냐고 하는 걸 보면 정말 답답하다. 독립영화는 사람이 적고 예산이 작은 영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전체를 보는 눈, 지향을 파악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입을 열다

-박홍열 감독은 홍상수 영화 최고의 신 스틸러로 등극했다.

박홍열_ 홍 감독님 영화를 하면서 항상 그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홍 감독님 영화에서 앵글은 촬영감독이 잡는 게 아니다. 그건 온전히 홍 감독님의 시선이며 이미지다. 대개 서사영화에서는 사건을 중심으로 인과관계를 짜나간다. 촬영감독의 역할은 이야기를 이미지로 옮겨오는 거다. 당연히 프레임의 선정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친다. 반면 홍상수 감독은 그날 아침, 이 공간을 중심으로 두 사람이 앉아 있으면 뭐가 나올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정확한 그림, 프레임 자체는 감독님 머릿속에만 있다. 그때 촬영감독의 역할은 거기서 어떤 빛, 색깔, 온도를 부여할 것인가 정도로 제한된다. 가령 <다른 나라에서>는 장마철에 찍었는데 우울한 정서를 보여줄 건 아니니까 카메라의 색온도를 높여서 따뜻한 분위기를 더했다. 아까 말한 줌 촬영을 예로 들면, 언제 어느 타이밍에 들어올지 몰라 늘 긴장상태였다. 배우들의 호흡에 맞춰서 줌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럴 땐 내가 촬영감독이 아니라 마치 배우가 된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새 카메라 뒤에 있는 게 아니라 영화 안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잘린 장면도 꽤 있다. 원래 2부 처음에 (김)민희씨가 영화를 볼 때 영사기 옆에 서 있는 장면이 있다. 마지막에 바닷가에 누웠을 때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장면도 있었다. 너무 시선을 뺏는 것 같다고 홍 감독님이 나중에 편집에서 뺐다. 명연기였는데! (웃음)

-1부에서는 이건 뭐지 싶은데 2부 속초에서는 정말 열심히, 필사적으로 창문을 닦는다. (웃음)

박홍열_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 이번에는 촬영이라기보다는 배우로서의 야망이 있었다. 촬영은 열심히 안 해도 못 자르겠지만, 연기는 열심히 안 하면 바로 잘릴 것 같아서. (웃음) 독일 촬영 때 그냥 프레임과 사이즈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찍어본 건데 그걸 고정으로 만들고 싶었다. 독일 갈 때 검은색 코트, 장갑, 짙은 청바지를 입고 갔고 민희씨가 빌려줘서 검은색 비니를 쓰고 다녔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 시커먼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게 재밌게 느껴지셨나 보다. 한번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보라고 하셨는데 속으로 기회는 이때다 싶어 진짜 열심히 했다. 이후에 계속 검은 옷을 입고 감독님 주변을 알짱거렸다. (웃음) 1부 끝날 때 민희씨를 업고 갈 때도 여기서 뭔가를 보여줘야 2부에도 나올 수 있다 싶어서 나름 뭔가를 계속 시도했다. 자세히 보면 보인다. (웃음) 카메라의 패닝이나 줌으로 보여주는 리듬감을 내몸짓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항상 상상했는데 그걸 이번에 실현한 거다. 2부 속초에서 유리창을 닦을 때도 나름의 속도와 리듬감이 있다. 오른쪽 두번, 왼쪽 세번의 불균질한 리듬감! 다시 말하지만 잘 보면 보인다. 카메라와 몸을 일치시켜보자! 첫 테이크 때 죽을 만큼 열심히 닦았는데, 홍 감독님이 컷을 안 하셔서 나중엔 팔 빠지는 줄 알았다.

김형구_ 2부 촬영 때 내내 현장에 있어서 나를 도와주러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꿈쩍을 하지 않는 거다. (웃음) 1부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정보가 없어서 박홍열 감독이 나오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프레임 안으로 스윽 들어오는 거다. “너 출연하려고 온 거였어?” 물론 도와주기도 했지만.

-2부 때는 홍상수 감독님이 배우 자격으로 현장에 부른 건가.

박홍열_ 당연히 아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때 김형구 감독님이 촬영하시고 내가 어시스턴트를 했다. 홍 감독님이 그게 보기 좋으셨나보다. 이번에도 네가 어시를 하라고 권하셨는데, ‘기회는 찬스’라고 하잖나. 이번엔 조수를 해줄 다른 친구까지 한명 섭외해서 갔다. 검은 옷 의상을 풀 세팅하고! (웃음) 홍 감독님 영화를 많이 하다 보니 비주얼이 없는 촬영감독이라는 오해가 생겼다. 이걸 계기로 배우로 진출해볼까 했지만 둘 다 안 되는 중이다. (웃음)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서로의 촬영을 확인했을 텐데 어떻게 다르던가. 홍상수 감독은 매번 설명할 수 없다고만 답하니 두분이 차이를 알려주면 좋겠다.

김형구_ 그게 정답이다. 그걸 말로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솔직히 차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누가 카메라를 잡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카메라는 만년필이고 결국 펜을 잡은 건 홍상수니까 펜에 따라 굵기의 차이는 있어도 글씨체는 늘 같겠지. 2부 때는 어시스턴트도 있었고 상대적으로 편했다. 1부는 스탭도 더 적었고, 게다가 출연까지 했으니 작업이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 같으면 어려웠을 거다. 독립영화라는 야전에서 쌓은 경험치가 그런 부분에서 발휘되는 것 같다.

박홍열_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김형구 감독님의 작업을 보며 늘 자극받아왔고 이번에도 많이 배웠다. 홍상수 영화가 반복에 의한 차이를 발견하는 것처럼 명쾌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차이가 있다고 느낀다. 개인적으론 홍 감독님 현장이 시간, 예산 모두 넉넉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한계를 돌파하고 조건을 맞추기 위한 기술적인 노하우가 많이 쌓였다. 가령 이번엔 스탭이 없으니 혼자 포커스를 맞춰야 했는데 그렇다고 팬과 줌이 중요한 영화에서 그 부분의 무게감을 소홀히 여길 수도 없다. 결국은 부분의 디테일보다 전체의 호흡, 흐름 등을 파악하고 균형을 맞추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자기가 할 것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작품이라는 생각, 내가 감독이라는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나는 홍상수 감독님의 느낌, 해석을 정확히 구현하는 데 집중하는 편이다. 반면 김형구 감독님이 카메라를 잡으신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때 정말 놀랐던 건 카메라의 거리감, 그리고 심도였다. 김형구 감독님이 참여하신 홍상수 감독님의 작품에는 김형구 감독님의 앵글감이 묘하게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홍 감독님도 김형구라는 카메라를 통해 뭔가 새로운 걸 보시는 것 같다. 나도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때 보조로 참여했지만 남한산성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김형구 감독님과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게 너무 좋았다. 사제지간으로 있을 때와는 다른 것들이 보이고, 학생일 땐 쉽게 묻기 어려웠던 걸 여쭤보며 많이 배웠다. 오히려 조수를 할 땐 일이 급하니까 배우기 어렵지만 편하게 몇 마디 해주실 때 그 대화에서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봉봉 방앗간에서 김민희 배우를 줌인하는 카메라나 정재영 배우가 콩을 고를 때 줌인하는 속도는 이전과 조금 다르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방식이 대상을 아낀다는 느낌을 준다.

김형구_ 오랜 동안 영화를 해왔던 습관이라고 해야 하나, 몸에 인이 박인 호흡이 있다고 해야 하나.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하려고 해도 잘 안 될 때가 있다. 내 느낌대로 해버려야 하는 순간들이랄 수 있는데, 감독의 동의가 없으면 내 것을 깨버리고 감독의 요구를 따라야 하지만 다행히 동의가 되면 그 화면을 살리는 거다. 처음에는 홍상수 감독과 그 부분에서 충돌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에는 동의하는 부분들이 늘어났다. 내가 바뀐 걸 수도 있고, 홍 감독이 변한 걸 수도 있고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의 줌은 컷 개념이 아니라 인물에 천천히 다가가는 동작이었던 것 같다. 느리게 다가가 달라는 주문이 있었고, 그건 홍 감독과의 작업에선 새로운 시도였다. 디지털 촬영으로 넘어간 후부터는 리허설도 없이 그냥 찍고 있는데 연습이 되지 않은 날것, 말하자면 현장의 공기를 담는 게 홍상수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박홍열_ 아까 내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이 부분이다. 홍 감독님은 본인도 정확히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하지만 본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상(像)을 만나려고 한다. 물론 본인의 틀은 있다. 하지만 최대한 본인이 그 틀을 깨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김형구 감독님과 촬영할 땐 김형구라는 사람의 연륜, 노하우 등이 홍 감독에게 자극이 되어 의외의 것들을 만나게 하는 순간이 있다. 내가 보기엔 홍 감독님도 그 순간들을 즐기는 것 같고. 반면 나의 장점은 말을 잘 듣는다는 것? (웃음) 편하게 생각해주신다. 나도 감독님이 편하고. 감독님이 요구를 했을 때 그걸 맞추고 싶은 게 내 자연스런 욕망이다. 처음에는 동경하던 대상이라 감독님의 현장에서 굉장히 경직되어 있었다. 지금은 매우 자유롭다. 망치면 말지 뭐. (웃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때는 홍상수의 생각이라는 정답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크고 작은 엇나감들이 있었다. 이제 겨우 깨달은 건 홍상수 감독님은 그 공간에서 새로운 걸 만나려고 하는 사람이고, 나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편하게 찍으면 감독님도 편하게 느낀다.

<청화남고>

지금 한국영화계에서 촬영감독으로 산다는 것

-김형구 감독님은 <화장>(2014), <연평해전>(2015) 등 꾸준히 작업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김성수, 허진호, 봉준호 감독 등과 함께했던 시기와 비교하면 최근엔 상대적으로 활동이 뜸한 편이다.

김형구_ 이제는 일선에서 활약 중인 제자들을 지켜보며 최전선에서는 한 발 떨어져 있게 된다. 한국영화를 이끌어가는 그들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가령 김성수 감독의 최근 두 작품은 내 제자들과 함께했는데 보면서 뿌듯하기도 하고 기뻤다. 한편으론 내가 해보고 싶었다는 아쉬움도 있고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싶은 것도 솔직한 마음이다. 김성수 감독은 내게 굉장히 고마운 사람이다. 나는 활동적인 사람이 아닌데, 김성수 감독은 워낙 역동적이라 내 모자란 부분을 채워줬다. 늘 새로운 비주얼을 추구하기 때문에 촬영감독으로서 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제일 많이 얻어낸 작품들이다. 시작은 <비트>(1997) 이전 단편 <비명도시>(1993)부터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는 내가 제일 행복하게 찍었던 작품이다. 이번에 이광국 감독과 했던 작업과 비슷했다. 내가 느끼고 해석한 대로 숏을 잡으면 감독이 동의를 하고, 그게 점점 쌓이는 행복감이랄까.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2003)을 함께하기 위해 중국까지 일부러 찾아오는 열정도 있었고, 나와 의견이 충돌하면 왜 자신이 그런 화면이 필요한지 확실한 논리를 갖추고 있었다. 초반에는 “봉 감독 왔나” 하고 인사했지만 나중에는 감탄을 거듭하다가 “감독님 오셨습니까” 하는 입장이었지. (웃음)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좋은 감독들과 함께해왔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과거의 영광만 더듬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자극을 주고 새로운 화면들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다. 최근엔 중국 감독들과 2편 정도 작업을 했다. 그간 중국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시도한 영화들이다. 한국의 촬영감독이 중국영화에 새로운 비주얼을 개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아직 개봉하지 않는 작품들인데 어떤 영화인지 소개한다면.

<하루 만에 지난 여름>

김형구_ 한편은 <청화남고>(감독 장줘위안)라는 일제강점기 배경의 코믹액션영화다. 사실 감독의 요구가 없으니 비주얼적인 시도를 하기 쉽지 않는데, 30대의 젊은 감독이 과거 김성수 감독과의 작업이 떠오를 만큼 열정적이고 과감하게 새로운 것들을 원했다. 새로운 기법을 위해 테스트 촬영까지 따로 했을 정도다. 아마 6월 중순에 중국에서 개봉할 것 같다. 또 하나는 우리말로 하면 <하루 만에 지난 여름>(감독 리샤오장)이란 작품이다. 이 사람도 신인감독인데 색다른 비주얼에 대한 요구들이 있었다. 예산이 큰 영화가 아니었는데도 내가 원하는 바를 최대한 수용하려는 노력들이 감사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들었다. 국내 영화계는 경험 많고 연륜 있는 스탭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게 사실인데, 중국에서는 감독이 신인이니 도리어 연륜 있는 촬영감독이 필요하다고 일부러 나를 수소문해서 찾아왔다. 할리우드도 큰 영화들은 대부분 검증된 촬영감독들이 하지 않나. 규모가 있는 시장에서는 경험을 중시하는 것 같다. 부럽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해한다. 국내 영화계는 산업 규모가 작지 않나. 그에 비해 매년 쏟아지는 인력들은 무척 많다. 당장에 영상원만 하더라도 1년에 몇 십명씩 졸업하니까.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게 맞다고 본다. 대신 중국처럼 다른 시장에 눈을 돌릴 필요는 있다고 느낀다. 지금 한·중관계가 냉랭해져서 좀 난감하지만 우리에게 중국 영화시장은 여전히 기회인 것 같다.

-박홍열 감독님이 앞에 잠깐 언급했는데 홍상수의 촬영감독이라는 경력이 상업영화에 참여하는 데 걸림돌이 되나.

박홍열_ 투자나 배급쪽에서 거절당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일종의 편견이지만 한편으론 그게 꼭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죽을 때까지 영화를 하고 싶다. 당장 뭘 하는지보다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하나의 도구로서 소모되기보다는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스탭이 되고 싶다. 영화산업이 양극화되고 배급의 힘이 커지면서 현장이 소스를 공급하는 곳으로 전락하는 기분이 든다. 산업적으로는 누가 소스를 트러블 없이 저가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가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는 거다.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보단 내가 가지고 있는 영화에 대한 생각, 영화를 대하는 태도 아래 어떻게 영화와 만날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런 태도가 필요한 현장에서 하나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 영화의 현장은 나의 영화 스승 중 하나다. 그런 경험들이 아니었다면 아직 틀에 박힌 작업들을 반복하고 있었을 것 같다. 내 틀을 깨주고 새로운 것들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간신>(2014)이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보면 사실 비주얼적인 개성도 강렬하다.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욕심도 있을 것 같은데.

박홍열_ 영화는 감독의 것이다.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 안에서 호흡을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의미에선 스탭도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스탭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역할 안에서만 지엽적으로 사고하기 쉽다. 그러면 제대로 된 비주얼이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의 역할이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영화를 공동작업이라고 하는 건 단순히 현장에 함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두의 창작, 창의력이 들어가는 거다. 부분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전체 그림을 알고 있어야 한다. 스스로 부품을 자처하는 순간 시네마는 사라진다. 서사만 상업적인 것들을 반복하는 영화들이 공장의 기계처럼 찍혀 나오는 거다. 나는 촬영이라는 기술을 팔고 싶은 게 아니다. 영화를 찍고 싶다. 단지 화려함, 보기에 근사함이 아니라 영화의 지향을 가장 적절한 형태로 구현하는 방식으로서의 비주얼리스트가 되고 싶다.

-박홍열 감독님은 독립영화쪽에서 꽤 많은 작업을 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한국영화계의 분위기에 대해 한마디 조언을 한다면.

박홍열_ 슬프지만 한국영화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화두 중 하나는 어떻게 영화를 살릴 것인가다. 모두 똑같은 영화, 비슷한 화면들을 반복하는 사이 길을 잃는 중이다. 답은 영화다운 것, 다르게 표현하자면 ‘시네마틱한 것’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라라랜드>의 클래식함이 영화적인 것이다. 독립영화라면 시네마(그는 굳이 시네마라는 표현을 반복강조했다.-편집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하고 각기 다른 나름의 답을 보여줘야 한다. 솔직히 말해 지금 한국에서 독립영화는 다큐멘터리 정도밖에 없다고 본다. 나머지는 상업영화의 작은 버전이다. 혹은 상업영화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 적은 예산으로 상업영화를 지향하는 영화들에 불과하다. 상업영화와의 차이가 없어지면서 독립영화, 독립영화 시장, 독립영화 관객도 사라지고 있다. 이른 시간 안에 제작(배급)의 요구를 군소리하지 않고 소화할 수 있는, 충실한 기술자로 전락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시장은 기술자를 원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장인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 그렇지 않은 영화도 많다. 안타까운 건 그런 가치들이 단지 흥행이란 잣대로 묻힌다는 거다. <씨네21> 같은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 좀더 목소리를 내줬으면 한다. 단 한 장면이라도 어떻게 시네마틱한 것들을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자기 색깔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런 분들이 가치를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김형구 촬영감독.

김형구 촬영감독

미국 AFI(American Film Institute) 유학 후 1994년 김정진 감독의 <우연한 여행>으로 데뷔했다. 이후 김성수, 허진호, 봉준호, 홍상수 감독 등과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우연한 여행>(1994), <닥터 봉>(1995), <박봉곤 가출사건>(1996), <진짜 사나이>(1996), <비트>(1997), <아름다운 시절>(1998), <태양은 없다>(1998), <이재수의 난>(1999), <박하사탕>(1999), <인터뷰>(2000), <무사>(2001), <봄날은 간다>(2001), <투게더>(2002), <살인의 추억>(2003), <영어완전정복>(2003),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 <역도산>(2004), <극장전>(2005), <괴물>(2006), <해변의 여인>(2006),<행복>(2007), <비밀애>(2010), <북촌방향>(2011), <부러진 화살>(2011),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 <더 파이브>(2013), <화장>(2014), <연평해전>(2015),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 외 다수

박홍열 촬영감독.

박홍열 촬영감독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학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석사. 2003년 <자본당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감독 김곡, 김선)로 장편 데뷔 후 <하하하>(2009)부터 홍상수 감독 영화의 한축을 담당해왔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약탈자들>(2008), <하하하>, <옥희의 영화>(201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2011), <다른 나라에서>(2011), <아부의 왕>(2012),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 <우리 선희>(2013), <찌라시: 위험한 소문>(2013), <자유의 언덕>(2014), <간신>(2014),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5),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2016),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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