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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쿄국제영화제에 출장을 간 게 2018년. 영화제 행사장이 있는 롯폰기 힐스로 출퇴근하며 현지인들이 쉼없이 드나드는 번화가의 카페에서 이국의 공기를 마시며 일을 했던, 해외 출장자로서 누린 낭만을 아직 기억한다. 당시 배우 기획전의 주인공이었던 야쿠쇼 고지를 코앞에서 보고 설 던 일도, 외신 기자들과의 화합의 뒤풀이 자리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프랑스 영화평론가와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포함해 한국영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번주 <씨네21>에 장뤽 고다르의 <알파빌>에 관해 비평을 써준 평론가가 바로 그다. 생각해보면 영화로 연결된 희소한 확률의 재밌고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올해 도쿄의 하늘길이 다시 자유롭게 열리면서 <씨네21>은 3년 만에 도쿄국제영화제에 취재를 가게 되었다. 김수영 기자의 취재기를 읽으니, 팬데믹의 끝에서 각국 영화인들의 교류가 다시 생기를 띠는
[이주현 편집장] 존재만으로 충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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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제주-대구-안성-부산. 황금 연휴로 시작한 10월 들어서 다녀온 곳들이다. 황금색 벼를 바라보며 걷노라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끼니를 해결하려 들른 식당에서도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니, 예전의 그리웠던 활기가 온전치는 않아도 확연히 돌아오고 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허락된 가상의 교류는 내 천성의 게으름과 결탁했다. 물건을 사거나 외식하는 행위마저 플랫폼의 혜택으로 대체되면서 콜라 한병마저 배달비로 해결하고 말았다는 인터넷 게시판의 고백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동의 당연함이 제외된 일상은, 체지방량 증가와 빠져버린 근육으로 간단한 외출마저 버거워진 비루한 나의 몸을 만들어냈다. 확실히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이렇게 방치할 수만은 없다. 지방의 일정을 적극적으로 수락하고 승용차의 안락함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할 수 없이 걷는다’ . 정해진 일정으로 향하는 것도 ‘걸음’이고, 짬짬이 나는 시간을 메꾸려 지역의 명소에 들르는 것도 ‘걸음’이다.
걷다 보면 차창 밖으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돌아온 호모 에렉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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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장자크 상페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애니메이션 <꼬마 니콜라>가 올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초청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자크 상페와 꼬마 니콜라라는 그 이름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홍차와 마들렌이 매개하는 마법처럼 단숨에 그의 책들에 빠져 있었던 10대 시절의 기억을 불러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 <속 깊은 이성 친구> <파리 스케치> <뉴욕 스케치> 등 그의 단순하고 무심한 선들은 파리의 낭만적 풍경을 조밀하게 묘사할 때도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소동을 해학적으로 그려낼 때도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듯 춤을 추며 생명력을 분출했다. 보는 이의 입꼬리에 흡족하게 미소를 걸게 만들었던 그 선들의 생명력을 애니메이션 <꼬마 니콜라>에서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개막식에서 영화를 보았다. 뱅자맹 마수브르, 아망딘 프리동 두 감독이 공동 연출한 <꼬마 니콜라>의 각본엔 르네 고시
[이주현 편집장] 애니메이션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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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공장의 소스 배합기에 사람이 끼여 죽었다.
이 문장은 사실이다.
사고가 나자 동료들이 교반기에서 시신을 꺼냈다. 회사는 교반기에 빨려들어간 시신을 수습했던 동료들을 다음날 바로 그 현장, 사고난 교반기를 흰 천으로 덮고 폴리스라인이 쳐진 공장에 출근시켜 일하게 했다.
이 문장도 사실이다.
세상의 어떤 물건도, 샌드위치든 반도체든 뭐든, 정말 어떤 물건도 이렇게까지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이렇게 일해서는 안된다. 조금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내기 위해 안전장치를 제거한 기계 앞에 사람을 세우고, 약간의 인건비 절감을 위해 사람 수를 줄이고, 안전교육을 없애고, 교육을 받았다는 거짓 확인서를 한달치 몰아 작성하도록 하는 회사에서 일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일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곳에서 똑같은 기계로 계속 소스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해서는 안되
[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흡혈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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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교차가 큰 완연한 가을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나면 계절이 바뀌어 있다는 정설은 올해도 변함없이 증명되었다. 지난주에 이어 1378호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번에는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과 ‘뉴 커런츠’ 부문 영화들을 중심으로 신진 한국영화 감독들의 인터뷰를 싣는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수시로 기자들에게 물었다. 어떤 한국영화가 가장 좋았느냐고. 그때마다 거듭 호명된 화제작은 이정홍 감독의 <괴인>, 김태훈 감독의 <빅슬립>, 임오정 감독의 <지옥만세>,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였다. <괴인>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화가 기이한 기운을 품고 있다고 말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올해 부산에서 4관왕을 차지하며 괴이한 호소력을 증명했다. 기자들이 미처 수상을 예상하지 못한 작품으로는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그래서 도리어 영화가 궁금해 이솔희 감독의 인터뷰를 개인적으로 꼼꼼히
[이주현 편집장] 미래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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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영화 <히든 피겨스>는 저임금 여성 전문직, 특히 흑인 전문직의 애환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이 배경이다.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20세기 초반에 별을 관측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여성 천문학자들이 주로 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나사에서도 그렇게 했던 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계산 전문요원인 흑인 여성이 800m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사 프로젝트 수장인 알(케빈 코스트너)은 장도리를 들고 “유색인용”이라고 적힌 화장실 간판을 부숴버린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나사에서는 우린 다 같은 색깔의 소변을 봅니다”라고 말한다. 그게 내가 케빈 코스트너를 가장 멋지게 본 장면이다. 2022년 넷플릭스 드라마 <스페이스 포스>에서 사령관으로 나오는 스티브 커렐이 “나사에는 네오나치도 많다”는 얘기를 한다. 20세기에 혐오는 인종 문제에 대한 함의를 주로 다룬다.
2022년이 이제 두달 조금
[우석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혐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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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눈 아래 맥립종이 보이네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일정 막바지쯤, 며칠간 지속된 여흥의 훈장으로 눈 다래끼를 얻었다. ‘다래끼가 난 눈 부위의 속눈썹을 뽑아서 돌멩이 위에 올려두면 그 돌멩이를 발로 찬 사람이 다래끼를 가져간다’는 다래끼 민간요법(?)이 어느 식사 자리에서 화두에 올랐는데, 이 이야기를 아는 건 나를 포함해 부산 출신 2명뿐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며 코웃음 치는 사람들을 향해 모 영상위원회 본부장은 새로운 IP의 경향을 얘기할 때만큼이나 진지한 얼굴로 (아마도 부산 지역에서만 구전되어온 듯한) 민간요법을 설명했다. 다래끼 얘기가 좀 뜬금없을 테지만, 요는 3년 만에 정상 개최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반가운 이들과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원 없이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3년간의 단절감을 해소하고도 남을 만큼 무수한 ‘00의 밤’들이 이어졌다. 한국영화 투자배급사들이 파티를 열었고 기관과 단체에서도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으며 영화
[이주현 편집장] 영화제의 존재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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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 강습을 받은 지 한달이 됐다. 동네 체육센터의 치열한 신청 경쟁을 뚫고 등록에 성공한 덕이다.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면 그 반은 마지막까지 정원이 다 차지 않았더라는 것이다. 텃세가 심한 곳도 있다는데 한두번 나가고 포기하게 되면 비싼 나의 배드민턴 라켓은 어쩌나(20여년 전에 배드민턴을 배웠다는 이유로 선수용 라켓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깐깐한 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한달 수강료는? 나의 설렘은? 이런 노심초사는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구나, 생각하며 첫 수업에 참석했다.
첫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신발을 어디서 갈아신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코트에 쭈뼛쭈뼛 들어가 한쪽에 가방을 두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그래도 우리 반은 텃세 같은 건 없어서 다행이야 그지” 하고 이야기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가와서 처음이냐고 물었고, 저기 가서 칠판에 이름을 쓰고 오라고 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가서 썼다. 본인과 잠시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초보자 되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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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 갓 입사했을 무렵 회사엔 부산 출신 선배들이 꽤 있었다. 과연 영화의 도시답게 부산이 키운 영화기자들은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 기간이 되면 숨겨왔던 사투리와 함께 자기만의 맛집 리스트를 당당히 꺼내놓곤 했다. 이를테면 돼지국밥은 어디가 맛있고 복국은 어디가 잘하고 밀면은 어디가 최고라는 식으로. 부산에서 나고 자라 객원기자 시절부터 부산영화제 공식 데일리팀에 꼬박꼬박 합류했던 나는 사투리 통역이나 해운대 지역의 길안내 역할엔 자신 있었지만 부산의 맛집 소개 앞에선 매번 고난도의 숙제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복국이나 돼지국밥을 부산영화제에 출장 와서 처음 먹어봤을 정도니 “네가 그러고도 부산 사람이냐”는 소리를 돌림노래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듣고 또 들었다. 그럼에도 부산영화제 기간만 되면 괜히 부산 사람이라는 뿌듯함에 혼자 조용히 젖어들곤 하는데,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축소되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탈피해 ‘완전한 정상 개최’를
[이주현 편집장] 부산의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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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란 적이 있을까?
지난 세월을 추억하는 유튜브 클립에서 한 선수의 응원가를 들었다. “가~가~가~가~ 가~르시아”로 시작하는 연호는 빨라지는 박수와 함께 지축을 흔들었다. 10년도 전, 롯데 자이언츠에서 인상적인 플레이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카림 가르시아 선수는 헨델의 <메시아> 멜로디에 그의 이름을 넣은 응원가가 트레이드마크였다. 이역만리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인 이방인은, 어쩌면 두려움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불안한 기대로 이 땅을 밟았을지 모른다. 적응을 위한 힘든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으로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응원가가 만들어졌을 때 느낀 전율은 익숙한 곳에서의 환대보다 몇배나 컸을 것이다. 이후 한화 이글스로 팀을 이적했을 때 그 응원가를 써도 좋은지 롯데 관계자에게 물어보았다는 후일담을 통해 그의 감동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모두가 꿈꾸는 축구의 종주국에서 자랑스러운 손흥민 선수는 지금도 역사를 새로이 만들어가고 있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응원하는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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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룡, 염정아 주연의 뮤지컬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와 라미란, 김무열 주연의 정치풍자 코미디영화 <정직한 후보2>가 9월28일 나란히 개봉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중년 여성이 첫사랑 찾기에 나서는 이야기고, <정직한 후보2>는 진실만을 말하게 된 정치인 주상숙(라미란)이 강원도지사로 활약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시한부, 첫사랑, 거짓말을 못하는 정치인은 판타지와 코미디를 위해 동원된 영화적 장치지만, 요즘의 현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일 때가 많아서 ‘진실의 주둥이’와 같은 키워드는 그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외치기에 세상은 너무 위태로워 한숨과 실소, 근심과 한탄에 파묻힐 때도 많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 과정에서 발생한 비속어 논란부터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로 인한 불안한 경제지표, 스토킹 범죄, 러시아의 예비군 부분 동원령, 무솔리니 이후 100년 만에 극우 정권이 들어서게 된 이탈리아,
[이주현 편집장] 영화보다 영화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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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로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을 인정했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나 개정 요구,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 학생의 집회·시위를 영장 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었다. 학생이 집회에 나가면 이유 불문하고 긴급조치 9호 위반이 되었다. 유신헌법을 비판하면 긴급조치 9호 위반이 되었다. 긴급조치를 비판하면 최종적으로 모두 긴급조치 9호 위반이 되었다.
2013년,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백기완 선생 사건을 필두로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형사 재심이 시작되었다. 변호사들이 긴급조치 재심 사건을 나누어 맡았다. 가장 젊은 당사자들도 이미 쉰살을 넘긴 때였다. 그는 체포 당시 미성년자였다. 판결문의 범죄사실은 다음과 같다. ‘1978년 6월26일 19:00경 서울 종로구 세종로 211 소재 국제극장 앞에서 유신철폐 등 구호를 외치며 서대문쪽으로 진행하는 약 100여명의 학생 시위대에 가담하여 3
[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긴급조치 9호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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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감독을 대면 인터뷰한 것이 최고의 수확이 아니었나 싶다. 그 두편의 영화를 본 것만으로도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는 대성공이었다. 올해도 그런 아름다운 영화들을 만나 흐뭇한 추억을 쌓을 수 있을까?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 5일 개막한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선 개막까지 약 2주가 남았다. 2주 동안 신중하게 실패 없는 관람 시간표를 짜고 싶지만 현실이 도와줄지 모르겠다. 현실 핑계를 대는 이유는 올해도 출장 모드인 건 변함없기 때문이고, 더 솔직한 이유는 부지런하게 움직여 보고 싶은 영화의 좌석을 확보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꼼꼼히 상영작들을 살펴보았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미리 보았던 반가운 영화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중 웬만해선 후회하지 않을 영화 3편을 추천하자면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 제임스 그레이의 <아마겟돈
[이주현 편집장] 고다르에게 보내는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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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유통 그리고 금융이라는 세 가지 틀은 대부분의 경제활동을 설명할 뿐 아니라 문화, 특히 영화산업에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파는 것에 관련된 마케팅 활동을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극장은 만드는 사람인가, 단순하게 파는 사람인가? 영화를 본다는 점에서는 판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극장에서의 관람 행위라는 매우 독특한 서비스의 특징을 본다면 생산 행위로 볼 수도 있다. OTT와 비교하면 극장은 자본재와 기술이 더욱 많이 투입되는, 생산의 특징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단순하게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좋다. 고전적으로는 영화에서 작가, 감독 그리고 배우들이 생산 영역에 속한다. 음향, 미술, 조명 등 스탭들과 후반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생산이다. 그리고 영화가 만들어진 다음에 극장과 마케팅 등 다양한 활동들이 판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감싸고 있는 또 다른 행
[우석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영화 크레딧, 힘과 모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