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의 명화>를 손꼽아 기다리고, 시린 손을 비비며 단관 개봉 극장의 영화표를 줄 서 예매하던 추억은 이제 까마득하다. 요즘 유행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은 지상파, 종편, 케이블, OTT 중 도대체 어디에서 볼 수 있나 찾아보아야 할 정도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요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다. 십수년 전 지상파 예능에서 대본 없이 (혹은 대본 없는 것처럼) 예능인들의 일상을 보여주던 리얼리티 쇼가 비방송인들로 대상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타 가족들의 삶을 보여주는 육아 프로그램에서 시작해 아마추어 뮤지션이나 댄서들의 성장기를 보여주던 오디션이 각광받았다. 그래도 이들 프로그램은 연예계라는 범주의 생활인들과 지향점이 연예인을 꿈꾸는 후보자들이라 일반인이라 말하긴 어렵다.
최근에는 짝을 찾는 프로그램들이 관심을 받고 있다. 청춘 남녀가 풋풋한 설렘으로 상대를 찾던 예전의 짝짓기가 이제는 높은 연령대 출연진의 현실적인 고민으로 확장된다. 그다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Please, be kind
-
2022 카타르 월드컵이 개막했다. 메시의 아르헨티나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지고 강호 독일도 일본에 패하면서 초반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전세계 영화계가 긴장해야 할 만큼 개막 첫주 카타르 월드컵의 시나리오는 흥미진진하다. 오늘은 가나, 우루과이, 포르투갈과 함께 H조에 속한 대한민국의 첫 경기가 있는 날이다. 한창 마감 중인 <씨네21>의 사무실은 그저 고요하다. 겨울의 월드컵은 처음인데 이맘때는 이런저런 연말 결산 기사를 준비하느라 바쁜 시기고, 나를 제외한 기자들은 영화만 사랑하는 종족들이라 올해는 월드컵 특집도 못하고 넘어가게 생겼다. ‘영화의 일기’가 아닌 ‘월드컵 일기’라도 맡기고 싶은 김혜리 편집위원의 아이디어(“예전에 <가디언>에서 영국 감독들로 축구팀을 짠 적 있는데 웃겨 죽음…”)에 힘입어 축구 에디토리얼이라도 쓸 수밖에.
이제부터 가상의 한국 영화감독 남자 축구대표팀을 꾸려보려 한다. 어쩐지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시무시한 팀을 완성할
[이주현 편집장] 한국 영화감독 축구팀 베스트11
-
마흐사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집회와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에 공권력을 동원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다.
마흐사 아미니는 22살 여성으로, 지난 9월13일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되어 구금 중 의문사했다. 이란 당국은 아미니의 의문사가 지병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희생자가 지하철역 근처에서 구타당하는 모습을 여러 사람들이 목격했고, 시신의 CT검사 결과 머리 골절과 출혈이 확인되었다.
머리카락을 보일 자유는 머리카락을 왜 가려야 하는지, 히잡이 종교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와 무관하다. 어떤 이유도 ‘내가 내 몸에서 보일 부분과 보이지 않을 부분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대전제에 동의하는 수많은 이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여성들은 앞장서 자신의 히잡을 불태우거나 벗어 들었다. 그러나 이란의 히잡 반대 시위는 강경 진압되고 있다. 지금까지 1만명 이상이
[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거리로 나온 여성들
-
만화 <원피스>가 현재 진행형이었다니. 1997년 일본의 만화잡지 <주간 소년 점프>를 통해 첫 연재가 시작됐으니, <원피스>를 탄생시킨 만화가 오다 에이치로와 해적 루피를 비롯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 그리고 팬들이 함께 쌓아온 시간만 무려 25년이 넘는다. 100권이 넘는 단행본, 1000화가 넘는 TV애니메이션, 15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까지 그야말로 대항해가 아닐 수 없다. 올여름, 15번째 극장판 애니메이션인 <원피스 필름 레드>가 일본에서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랜만에 <원피스>의 호방한 모험과 그 놀라운 생명력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원피스>와의 첫 만남은 만화방이나 PC방에서 공강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던, 시간은 많고 돈은 없던 스무살 대학 시절에 이루어졌다. 만화광 친구가 추천해줘 <원피스>를 집어들었지만 캐릭터들의 황당한 개성에 곧장 적응하지 못했
[이주현 편집장] 다시 시작된 모험
-
-
카니발과 페스티벌은 대학 시절 혼용돼 쓰였던 단어들이다. 차이는 잘 몰랐다. ‘카니발리즘’은 서로 모여서 사람의 살을 나눠 먹던 고대의 사건, 일종의 인육 행사에 기원을 둔다는 걸 배울 때, 충격적이었다.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는 아들들이 모여서 자신들이 죽인 아버지의 살을 나눠 먹는 장면이 나온다. 친부 살인과 식육이라는 행사가 국가 기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프로이트의 설명은 나에게는 문화 충격이었다. 카니발이 아버지 등 국가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다면, 페스티벌은 신과 관련되어 있다. ‘허용된 과잉’이라는 페스티벌의 다른 정의는, 기존의 질서를 일시 정지하고 새로운 신의 질서를 만드는 기존 질서 파괴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전두환 시절 군사정권이 여의도에서 개최한 국가적 행사인 ‘국풍81’은 전형적인 페스티벌이다. 일종의 관제 페스티벌인데, 그것이 진짜 페스티벌이 된 이유는 행사 이후 많은 청소년들이 광장에서 음주와 함께 나름 자신들의 질서 파괴 행사를 벌였기 때문이
[우석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청년들 그리고 페스티벌과 카니발
-
2015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촬영 현장. 복숭아의 도시이자 마틴 루서 킹의 고향이자 나에겐 마블의 도시로 기억되는 그곳에서 블랙 팬서, 채드윅 보즈먼을 만난 적이 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통해 처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 모습을 드러낸 보즈먼이 당시 히어로 경력이 꽤 찬 스타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나 스칼렛 요한슨만큼이나 여유롭게 블랙 팬서로 합류한 소감이며 자신이 맡을 임무에 대해 들려줬던 기억이 난다. 이후 <블랙 팬서>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고유한 캐릭터와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슬프게도 2편이 제작되기 전 그의 부고가 들려왔다. ‘채드윅 보즈먼의 블랙 팬서’는 2018년의 모습으로 영원히 머물러 있겠지만 와칸다 왕국의 블랙 팬서 이야기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이하 <와칸다 포에버>)를 통해 계속된다. 티찰라(채드윅 보즈먼)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16
[이주현 편집장] 정훈이 포에버
-
황폐한 마음으로 망연자실 앉아 있다가 뭐라도 틀어놓고 싶어 유튜브를 실행했다. 간절한 마음에 보고 또 본 수많은 뉴스가 알고리즘에 반영되고, 한편 여러 유튜버가 업로드를 미루면서 펼쳐진 추천 영상의 광경이 있다. 사건, 사고를 다루는 각종 프로그램들. 진지한 시사 다큐멘터리도 있지만 패널들이 나와 사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 많았다. 어떤 프로그램에는 형사들이 나오고, 어떤 프로그램은 한 사람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떤 프로그램은 패널들이 둘로 나뉘어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고, 어떤 프로그램은 목소리를 높여가며 화를 내고…. 그 광경 앞에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건, 사고를 다루는 프로그램의 의의는 명확하다. 사건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도록 촉구하거나 범죄 수법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 방송에서 다뤄지면서 여론이 움직여 재수사를 하게 된다든지 사건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때도 적지 않다. 그러한 이유로 시청하면서도 이것은 좋은 시청이다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모든 사건은 ‘썰’이 되는가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쿄국제영화제에 출장을 간 게 2018년. 영화제 행사장이 있는 롯폰기 힐스로 출퇴근하며 현지인들이 쉼없이 드나드는 번화가의 카페에서 이국의 공기를 마시며 일을 했던, 해외 출장자로서 누린 낭만을 아직 기억한다. 당시 배우 기획전의 주인공이었던 야쿠쇼 고지를 코앞에서 보고 설 던 일도, 외신 기자들과의 화합의 뒤풀이 자리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프랑스 영화평론가와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포함해 한국영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번주 <씨네21>에 장뤽 고다르의 <알파빌>에 관해 비평을 써준 평론가가 바로 그다. 생각해보면 영화로 연결된 희소한 확률의 재밌고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올해 도쿄의 하늘길이 다시 자유롭게 열리면서 <씨네21>은 3년 만에 도쿄국제영화제에 취재를 가게 되었다. 김수영 기자의 취재기를 읽으니, 팬데믹의 끝에서 각국 영화인들의 교류가 다시 생기를 띠는
[이주현 편집장] 존재만으로 충분한
-
창원-제주-대구-안성-부산. 황금 연휴로 시작한 10월 들어서 다녀온 곳들이다. 황금색 벼를 바라보며 걷노라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끼니를 해결하려 들른 식당에서도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니, 예전의 그리웠던 활기가 온전치는 않아도 확연히 돌아오고 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허락된 가상의 교류는 내 천성의 게으름과 결탁했다. 물건을 사거나 외식하는 행위마저 플랫폼의 혜택으로 대체되면서 콜라 한병마저 배달비로 해결하고 말았다는 인터넷 게시판의 고백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동의 당연함이 제외된 일상은, 체지방량 증가와 빠져버린 근육으로 간단한 외출마저 버거워진 비루한 나의 몸을 만들어냈다. 확실히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이렇게 방치할 수만은 없다. 지방의 일정을 적극적으로 수락하고 승용차의 안락함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할 수 없이 걷는다’ . 정해진 일정으로 향하는 것도 ‘걸음’이고, 짬짬이 나는 시간을 메꾸려 지역의 명소에 들르는 것도 ‘걸음’이다.
걷다 보면 차창 밖으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돌아온 호모 에렉투스
-
지난 8월 장자크 상페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애니메이션 <꼬마 니콜라>가 올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초청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자크 상페와 꼬마 니콜라라는 그 이름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홍차와 마들렌이 매개하는 마법처럼 단숨에 그의 책들에 빠져 있었던 10대 시절의 기억을 불러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 <속 깊은 이성 친구> <파리 스케치> <뉴욕 스케치> 등 그의 단순하고 무심한 선들은 파리의 낭만적 풍경을 조밀하게 묘사할 때도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소동을 해학적으로 그려낼 때도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듯 춤을 추며 생명력을 분출했다. 보는 이의 입꼬리에 흡족하게 미소를 걸게 만들었던 그 선들의 생명력을 애니메이션 <꼬마 니콜라>에서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개막식에서 영화를 보았다. 뱅자맹 마수브르, 아망딘 프리동 두 감독이 공동 연출한 <꼬마 니콜라>의 각본엔 르네 고시
[이주현 편집장] 애니메이션의 마법
-
빵 공장의 소스 배합기에 사람이 끼여 죽었다.
이 문장은 사실이다.
사고가 나자 동료들이 교반기에서 시신을 꺼냈다. 회사는 교반기에 빨려들어간 시신을 수습했던 동료들을 다음날 바로 그 현장, 사고난 교반기를 흰 천으로 덮고 폴리스라인이 쳐진 공장에 출근시켜 일하게 했다.
이 문장도 사실이다.
세상의 어떤 물건도, 샌드위치든 반도체든 뭐든, 정말 어떤 물건도 이렇게까지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이렇게 일해서는 안된다. 조금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내기 위해 안전장치를 제거한 기계 앞에 사람을 세우고, 약간의 인건비 절감을 위해 사람 수를 줄이고, 안전교육을 없애고, 교육을 받았다는 거짓 확인서를 한달치 몰아 작성하도록 하는 회사에서 일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일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곳에서 똑같은 기계로 계속 소스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해서는 안되
[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흡혈의 세상
-
일교차가 큰 완연한 가을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나면 계절이 바뀌어 있다는 정설은 올해도 변함없이 증명되었다. 지난주에 이어 1378호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번에는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과 ‘뉴 커런츠’ 부문 영화들을 중심으로 신진 한국영화 감독들의 인터뷰를 싣는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수시로 기자들에게 물었다. 어떤 한국영화가 가장 좋았느냐고. 그때마다 거듭 호명된 화제작은 이정홍 감독의 <괴인>, 김태훈 감독의 <빅슬립>, 임오정 감독의 <지옥만세>,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였다. <괴인>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화가 기이한 기운을 품고 있다고 말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올해 부산에서 4관왕을 차지하며 괴이한 호소력을 증명했다. 기자들이 미처 수상을 예상하지 못한 작품으로는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그래서 도리어 영화가 궁금해 이솔희 감독의 인터뷰를 개인적으로 꼼꼼히
[이주현 편집장] 미래의 얼굴들
-
2017년 영화 <히든 피겨스>는 저임금 여성 전문직, 특히 흑인 전문직의 애환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이 배경이다.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20세기 초반에 별을 관측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여성 천문학자들이 주로 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나사에서도 그렇게 했던 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계산 전문요원인 흑인 여성이 800m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사 프로젝트 수장인 알(케빈 코스트너)은 장도리를 들고 “유색인용”이라고 적힌 화장실 간판을 부숴버린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나사에서는 우린 다 같은 색깔의 소변을 봅니다”라고 말한다. 그게 내가 케빈 코스트너를 가장 멋지게 본 장면이다. 2022년 넷플릭스 드라마 <스페이스 포스>에서 사령관으로 나오는 스티브 커렐이 “나사에는 네오나치도 많다”는 얘기를 한다. 20세기에 혐오는 인종 문제에 대한 함의를 주로 다룬다.
2022년이 이제 두달 조금
[우석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혐오의 시대
-
“왼쪽 눈 아래 맥립종이 보이네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일정 막바지쯤, 며칠간 지속된 여흥의 훈장으로 눈 다래끼를 얻었다. ‘다래끼가 난 눈 부위의 속눈썹을 뽑아서 돌멩이 위에 올려두면 그 돌멩이를 발로 찬 사람이 다래끼를 가져간다’는 다래끼 민간요법(?)이 어느 식사 자리에서 화두에 올랐는데, 이 이야기를 아는 건 나를 포함해 부산 출신 2명뿐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며 코웃음 치는 사람들을 향해 모 영상위원회 본부장은 새로운 IP의 경향을 얘기할 때만큼이나 진지한 얼굴로 (아마도 부산 지역에서만 구전되어온 듯한) 민간요법을 설명했다. 다래끼 얘기가 좀 뜬금없을 테지만, 요는 3년 만에 정상 개최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반가운 이들과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원 없이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3년간의 단절감을 해소하고도 남을 만큼 무수한 ‘00의 밤’들이 이어졌다. 한국영화 투자배급사들이 파티를 열었고 기관과 단체에서도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으며 영화
[이주현 편집장] 영화제의 존재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