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함. 기이하고 괴상망측하다는 뜻이다. 조금 더 길게 풀자면, 평상의 것들과는 너무도 달라 예측하거나 헤아리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전통시장을 찾고 기자들에 둘러싸여 카메라 세례를 받는 일이야 그저 식상할 뿐 기괴할 것까지는 없었다. 총선 전이고, 게다가 설 연휴를 앞둔 차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가 한손에는 날것의 털 뽑힌 목 잘린 닭의 아랫부분을 쥐고, 다른 한손에는 시장상품권 뭉치를 펼쳐 든 모습을 보았을 때, 내 머리는 이물질이 낀 톱니바퀴마냥 덜컥거렸다.
‘저게 대체 무슨 장면인 걸까?’
본래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장면을 보면 잠시간 멈칫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그 사진이 실린 기사를 읽어보았다. 보통은 제목이라도 보거나 맥락을 담은 문자 정보와 결합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미지도 그럭저럭 납득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읽고 나서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양계농가들의 시위 장면도 아니고, 지역화폐 활성화를 부르짖는 시장 상인도 아닌데, 게다가 그 두 가지를 연결시킬 어떤 실마리도 없이, 왜 그는 굳이 차에 올라타서까지 저 장면을 계속 연출하고 있었던 것일까 싶었다.
내 머리로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은 키치(Kitsch), 속칭 ‘이발소 그림’이다. 기이하고 비상식적인 것들의 무의미한 결합. 보는 이들은 이게 뭐냐고 할 수 있지만, 그걸 만든 자에게는 나름대로 다 생각과 계획이 있다. 한 화면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들이 조합되어 나온 결과물인 셈이다. “나는(=여당의 비상대책위원이자 차기 대통령감), 서민들이 찾는(=털 뽑히고 목 잘린 생닭), 전통시장을 위해(=시장상품권), 이렇게나 큰 연민과 열정을 품고 있다(=무언가를 외치며 달뜬 얼굴).” 운동권이란 말만큼이나 철 지난 엑스세대를 들고 나온 참이니,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울트라 캡숑 포스트모던’해 보이는 것에서만큼은 성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용산에서 녹화되었다는 대통령실 대담도 퍽 포스트모던했다. 질문도 꽤 기괴했지만 그것에 대해 내놓은 답에서 ‘의미’라는 걸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질문한 이는 그 대답에서 충분한 의미를 얻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괴이쩍은 질문을 진지하게도 이어갔다.
‘뭐지? 저들끼리는 찰떡같이 소통이 되는데, 나만 개떡같이 못 알아먹고 있는 건가?’
이것으론 부족했는지, 설을 맞은 국민에게 ‘행복’과 ‘사랑’을 준다고 대통령과 대통령실 직원들이 뮤직비디오도 찍었다. 맞다, 모름지기 뮤직비디오란 포스트모던 영상물의 총아가 아니었던가! 물론 생닭 키치에 비하면 꽤 전통적인 기법에 의존하고 있긴 했지만, 그로테스크함의 측면에선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은총이 가득해서, ‘신나라’의 ‘아가동산’에 모인 성도들의 공연 장면을 담은 VHS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은 건가 싶기까지 했다. 나는 그 은혜로운 대화와 노래가 있는 키치의 천국에 닿지 못한 채 저주의 불지옥에 빠진 근대인이었을 뿐이다.
하여간 천국에 있든, 지옥에 있든, 크게 보면 결국 그로테스크하다. 유토피아적 그로테스크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디스토피아적 그로테스크 리얼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