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쓰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대체로 애정을 가진 어떤 것에 집중하고 애쓰는 상태를 드러낼 때 꺼내는 말인데 긍정보단 부정적인 상황에 곧잘 쓰인다. “괜찮아, 마음 쓰지 마.”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주름 사이 걱정거리를 새기고 다니는 내 꼴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술 한잔에 사연을 주워 삼키더니 서둘러 대화를 끝냈다. 굳이 대화를 더 이어가지 못한 건 ‘마음 쓰지 말라’는 친구의 당부에 담긴 배려를 알기 때문이다… 라고 멋지게 말하고 싶지만 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어서다. 마음은 사용하면 닳아 사라지는 소모품일까. 정해진 총량을 넘어가니 여유도 바닥난다. 미안하면서도 차마 마음을 나눌 기력이 없다.
사실 ‘마음을 쓴다’는 표현보다는 ‘마음이 쓰인다’는 표현이 더 와닿는다. 때론 의지 바깥에서 작동하는 것들이 우리를 있어야 할 자리로 이끌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박박 긁어도 더 남은 게 없었던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샘솟는 걸 느낀다. 친구에 대한 미안함인지, 내 옹졸한 마음 그릇에 대한 부끄러움 탓인지 알 길은 없다. 그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없었던 마음이 새롭게 피어나 뒤늦게 상대를 향한다. 마음이 (새롭게) 쓰인다. 이럴 때 보면 참 재밌는 표현이다. 마음을 소진한다는 의미로서 ‘쓰다’(use)가 새롭게 마음을 적어 내려간다는 뜻의 ‘쓰다’(write)로 바뀌는 순간, 가난한 마음 위로 다시 주변을 돌아볼 한줌의 기력이 선물처럼 포개진다.
한국영화의 위기는 이제 꺼내기도 피로한 말이 되어버렸다. 습관처럼 읊조리는 위기론에 둔해지고 무기력해진 지 오래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힘들다고 손놓고 있을 수 없고 괴롭다고 외면할 수 없다는 거다. 마음이 계속 쓰이니까. <씨네21>이 1월 내내 4주에 걸쳐 2024년 공개될 신작을 소개하고, 투자 책임자와 플레이어들을 만나고, 산업 전망과 트렌드를 묻는 건 그런 이유다. 솔직히 마음을 쓴다고 딱히 해결되는 건 없다. 나는 친구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없고, 친구는 내 고민을 들어줄 처지가 못 된다. 우리의 고민은 공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 처지를 마음 써준 그의 침묵이, 그의 마음을 그리며 써내려가본 내 상상이 마침내 우리를 연결한다.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2024년의 첫달, 1월의 끝자락에서 올해의 끝을 상상해본다. 마음을 다 불태우고 소진한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 계속 생각 중이다. 뭘 해야 할지 모를 땐 뭐라도 해야 한다. 오늘을 분석하고 내일을 고민하는 마음들이 모여 써내려간 예측들, 켜켜이 쌓아올린 마음의 흔적들이 여기에 있다. 해답은 없다. 다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한국영화에 대해 한줌의 마음이 쓰인다면 우리는 마음을 다해 영화를 써내려갈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계속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