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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황이 남긴 망령과의 사투가 시작된 한국영화
두 번째 착시는 시장 전반 상황에 대한 문제다.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이 유독 도드라지는 건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흥행세 덕분이라기보다는 다른 영화들의 부진 탓이 크다. 3월까지 극장 관객수는 2514만명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동 기간(5507만명) 대비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전통적인 비수기였던 걸 감안하더라도 3월까지의 성적은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한국영화 자체에 대한 불신이 학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꾸준한 시장의 침체, 대작 영화들의 잇단 실패가 맞물려 지금 극장가를 채우는 영화들은 일찌감치 완성되었던, 이른바 묵은 영화들이다. 적절한 타이밍을 놓친 영화들은 트렌드에서 멀어진 채 한국영화의 지나간 악습만 반복 중이다.
시장 상황이 좋아 많은 영화들이 쏟아져나올 땐 이렇게 방만한 양산형의 기획 영화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
[기획]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을 되짚어 봐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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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은 때때로 이야기의 형태로 소비된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우연은 없다. 현상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에 사람들은 인과관계로 정리한 뒤에야 안심한다. 어떤 영화가 흥행하고 나면 그토록 흥행 원인을 찾으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적지 않은 현상에서 원인은 결과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필연성 따윈 없다는 말이다. 대다수 흥행 분석이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럴 땐 질문의 각을 달리하면 종종 본질과 민낯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현재 한국 극장가에 불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을 둘러싼 반응들을 보며 새삼 흥행 분석의 무용함을 생각하게 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흥행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1월4일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441만 관객, 3월8일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이 390만 관객을 돌파하며 장기 흥행 중이다
[기획] 일본 애니메이션의 승리는 “착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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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2023년 1분기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올해 극장가의 승자는 누가 뭐라 해도 일본 애니메이션들이다. 우선 1월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441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국내 흥행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뒤이어 3월에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은 390만명을 돌파하며 역대 순위 2위였던 감독 자신의 전작 <너의 이름은.>(2016)을 밀어내고야 말았다. 3월까지 극장을 찾은 전체 누적 관객수의 3분의 1에 가까운 관객 동원을 단 두편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이뤄낸 것이다. 한때 스튜디오 지브리로 대표되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대교체는 <너의 이름은.> <귀멸의 칼날>등을 앞세워 일찌감치 이뤄졌지만 올해만큼 폭발적인 결과를 선보인 적이 있었나 싶다. 단지 애니메이션에 한정해서가 아니라 일본영화 전반으로 넓혀봐도 이례적인 열풍이다. 무엇보다 1월에 시작된 열풍이 아직까지 이어진다는
[기획] 한국에서 열풍 부는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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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배우 임수정
아직도 임수정 배우의 오디션 때 기억이 선명하다. 똑 부러지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귓가에 또랑또랑하게 들리는 음색과 딕션이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살면서 적개심과 죄의식을 느낀 적이 있는지 다소 에둘러 둘러댈 법한 어렵고 곤란한 질문에도 주저 없이 적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아마도 촬영 내내 감독 다음으로 가장 많은 부담감을 느낀 사람은 임수정 배우였을 거다. 촬영을 끝내고 매일 밤 숙소로 돌아가 자신이 짊어지고 갈 엄청난 압박과 무게감에 끝없이 자책하고 절망하고 괴로워했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그 어려운 시간을 스스로 이겨내고 돌파하면서 훌륭한 연기자로 성장했고 비로소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여배우가 되었다
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배우 문근영
당시 중학생이었던 문근영 배우는 자신의 촬영이 없을 때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선배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거나 스탭 사이에 끼어서 까르르거리거나(그녀가 현장에 오면 모든 언니,
[기획] 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배우 임수정과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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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여성 서사를 기다리며
- <장화, 홍련>처럼 본능적으로 연기하던 시절이 그리울 때는 없나요.
문근영 그리워요. 배성우 선배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너 <가을동화> 때 연기 진~짜 잘했어. 다시 하라고 해도 그렇게 못할 거야. 그런데 생각하고 고민하고 어느덧 연기에 대해 다 알게 됐을 때, 다시 그때처럼 똑같이 연기를 한다? 그러면 연기의 신이 되는 거야.” 그게 제가 가야 할 길이라고 하면서요. (웃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겠다고 했죠.
임수정 요즘 그 길을 가고 있는 거야? (웃음)
문근영 응, 추구하고 있어. (웃음)
임수정 근데 근영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옥> 시즌2도 정말 기대하고 있어요. 최근 연기 활동을 쉬어가는 동안 차곡차곡 내면에 쌓인 게 많을 거예요. 그게 어떤 캐릭터와 만났을 때, 특히 장르적인 작품을 만날 때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것들이 있어요. 저도 <장화, 홍련&
[기획] 임수정, 문근영 “또다시 만날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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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마주쳐도 울고, 뒷모습만 봐도 울고…
- 김지운 감독은 당시 여러 인터뷰에서 “임수정 배우는 오디션에서 살면서 느낀 죄의식과 적개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대답한 유일한 배우였다”는 말을 많이 했었죠.
임수정 신인배우에게 너무 큰 역할을 맡기는 데 반대 의견도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당시 저는 굉장히 폐쇄적이었고 경계심이 많았고, 부조리한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불만과 불신, 분노, 회피 같은 어두운 감정을 품고 있었어요. 감독님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가 어떠한 설명도 없이 “네”라고 답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수미를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대요.
- 문근영 배우와 미팅했을 때는 ‘어떻게 이 아이는 이렇게 깊은 눈을 가졌지?’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김지운 감독과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문근영 한 시간 정도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나왔어요. “시나리오는 어떻게 읽었어?” “수연이는 어떤 아이인 것 같아?” “수미 역할은 누가 했으면 좋겠
[기획] 임수정, 문근영 “‘장화, 홍련’은 가장 본능적으로 연기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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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은 한국영화의 화양연화였다.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올드보이>의 박찬욱, <장화, 홍련>의 김지운,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등 상업적 감각을 갖춘 작가 감독들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한국영화 객석 점유율 50%를 돌파하며 최초의 천만 영화도 탄생했다. 특히 역대 한국 공포영화 흥행 1위(관객수 314만명,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의 자리를 20년째 유지하고 있는 <장화, 홍련>의 의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개봉 당시 평단의 반응은 엇갈렸지만 입소문과 함께 흥행에 성공한 <장화, 홍련>은 일본, 태국과는 다른 감성을 품은 한국 호러영화만의 계보를 탄생시켰고, 이후 많은 장르영화가 포스트 <장화, 홍련>을 꿈꾸며 수미와 수연 자매의 애상적 이미지를 본보기 삼았다. 오히려 개봉 당시보다 비평적인 성취도 격상했다. 도전적인 제작자들은 신선한 얼굴이 주연을 맡은 공포영화의 가능성에
[기획] '장화, 홍련' 20주년… 임수정과 문근영을 다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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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은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이전되고 물가가 급등해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치솟던 해였다.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과 금융시장이 큰 타격을 입고, 사람들은 보다 신중하게 소비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다시 호황을 겪은 산업도 있지만 10월29일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이태원 참사 이후 긴 추모 분위기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2021~2022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왕에 오른 손흥민에 열광하며 숨 쉴 구멍을 찾았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주목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며 위로받았다.
한편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침체기에 빠진 한국 극장가를 구한 것은 마블이 아닌 마블리였다. 마동석, 손석구 주연의 <범죄도시2>가 <겨울왕국2>(2019년 11월21일 개봉) 이후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칸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송강호
[기획]2022년 박스오피스 분석: 오직, 규모의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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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에도 코로나19 팬데믹이 이어졌다. 2월부터 백신 접종을 시작하고 11월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하는 위드 코로나에 들어갔으나 확진자와 위중증 환자의 폭증과 오미크론 변이의 등장으로 일상 회복에 어려움을 겪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연기됐던 2020 도쿄올림픽이 7월에 개최됐고 한국은 종합 16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4월에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는 집권 여당이 참패했고, 전직 대통령 노태우씨가 10월, 전두환씨가 11월에 각각 사망했다. 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미나리>),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인 성공,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 첫 발사와 같은 쾌거도 있었다.
디즈니와 마블 영화 일색
2021년 박스오피스 톱10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전년도와는 정반대로 두편의 한국영화(<모가디슈> <싱크홀>)를 제외한 나머지 8편 모두가 외국영화라는 점이다. 팬데믹으로 개봉을 연기했던 경쟁력 있는 신작 외
[기획]2021년 박스오피스 분석: 모험하지 않는 관객 시대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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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국 사회 최대 이슈이자 단 하나의 사건을 꼽으라면 누구나 코로나19를 말할 것이다. 1월20일 국내에서 코로나19 환자가 처음으로 발생했다. 이후 2월 대구 신천지, 5월 이태원 클럽, 8월 사랑제일교회 집단감염 사태로 이어지면서 2020년은 “누군가의 숨이 위협이 되는 시대”(윤고은, <도서관 런웨이>)가 됐다. 그럼에도 4월15일에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결과는 여당의 압승이었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과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한편 영화계에서는 <기생충>의 아카데미영화제 4관왕 수상(작품·감독·각본·국제영화상)과 <사냥의 시간>의 넷플릭스행이 주요 이슈였다.
1인당 극장 관람 횟수 1.15회
코로나19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취재에 응한 영상 콘텐츠 산업 종사자들이 흥행이나 톱10이라는 말을 꺼내기 주저할 정도로 2020년 한국 영화 시장은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입었
[기획]2020년 박스오피스 분석: 코로나19와 긴 비수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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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국 사회는 상반기의 버닝썬 게이트, 하반기의 조국 사태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두 사건의 파장이 컸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도래한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여성팬들의 사랑을 받고 유명세를 얻은 남자 연예인들의 성범죄가 남긴 충격이 거셌다. 조국 사태는 계급과 공정성, 정의에 관한 담론을 사회에 던졌다. 역대 최고의 호황을 누린 영화계에서도 계급과 여성 서사가 주목 받았다. 상반기에 이미 천만 영화가 4편 탄생했고, 하반기에 1편이 추가되면서 2019년은 사상 처음 5편의 천만 영화를 보유한 해가 됐다. 그중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이 포착한 부의 지형도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주인공은 소시민, 이야기는 무겁지 않게
우리네 자영업자(<극한직업>), 가족(<기생충>), 청년(<엑시트>), 아버지(<백두산>)가 주인공인 영화들이 2019년 박스오피스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흥행 1위는
[기획]2019년 박스오피스 분석: ‘기생충’부터 ‘극한직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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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평화’, ‘종전’, ‘문화 번영’ 등의 단어가 비교적 많이 떠올랐다. 세 차례 이어진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에 비핵화 여정의 물꼬를 텄고,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세계적 관심 속에 막을 내렸다. 2018 러시아 FIFA 월드컵에서는 아시아 최초로 한국이 독일을 상대로 2 대 0으로 승리하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시에 분노와 절망의 소식도 이어졌다. 여성들의 성폭력 고발 운동인 ‘미투 운동’이 점화되며 젠더 감수성의 중요도를 높였고, ‘몰카’가 아닌 ‘불법촬영’에 대한 대대적인 시위가 혜화역에서 1년에 걸쳐 이뤄지기도 했다. 총 6회 진행된 ‘불법촬영 규탄시위’ 마지막 차례에는 11만명의 여성이 결집했다. 안정된 듯 여전히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영화관에선 1871편의 작품이 개봉했다. 이는 1943편으로 최고치를 달성한 2019년과 2020년(1897편)에 이은 3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특히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가 연이어 관객을 만났는데, 그중 &
[기획]2018년 박스오피스 분석: 마블, 마블, 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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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여전히 2016년 촛불집회의 영향 아래 있었다. 3월10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었으며, 5월9일 처음으로 조기 대선이 치러졌다. 이를 통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권’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포항에서 일어난 5.3 규모의 지진으로 대학수학능력 시험의 일정이 미뤄지는 사상 초유의 일이 있었고, 세월호 참사 3년 만에 세월호를 인양하여 뭍으로 꺼냈다. 최초, 처음, 초유 같은 수식이 연일 이어지던 나날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연발하는 가운데 영화관은 2억1900만명의 관객을 모으는 호황기를 맞이했다. <택시운전사>는 민주주의 실현을 향한 대중적 열망에 화답하듯 천만 영화로 솟아올랐고, 장르와 소재의 다양성은 더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유입시켰다. 실제로 당해 박스오피스 톱10에 이름을 올린 작품들은 모두 다른 제작사에서 제작되어 각기 다른 개성과 색깔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2017년이
[기획]2017년 박스오피스 분석: 정의를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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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민수(君舟民水, 임금은 배, 백성은 물과 같다), 성난 물살이 배를 뒤집듯 백성이 임금을 끌어내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광화문광장에 쏟아져 나온 민심은 결국 12월9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4월13일 치러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심은 분명했다.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을 확보하며 16년 만에 여소야대 형국이 펼쳐졌다. 5월17일 강남역에서 불특정한 여성을 노리고 벌어진 살인사건은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웠다. 수많은 여성들의 추모 운동이 이어졌고 성차별, 여성 혐오에 관한 논쟁이 촉발됐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이 세기의 대국을 펼친 2016년은 솔로의 시대였다. 1코노미, 혼행, 혼밥에 이어 ‘가성비’ 키워드가 득세했다. 2000년 이후 역대 최악의 청년실업률 속에서 청년들은 ‘금수저’, ‘흙수저’로 자신들의 계급을 자조했다. 한마음으로 정국을 뒤엎은 해지만, 개인의 삶에서는 행복도 불행도 각자도생해야 했다.
2011년
[기획]2016년 박스오피스 분석: 한국영화 러키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