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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적 반성은 그렇다치고 - <조커: 폴리 아 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토드 필립스의 해명 혹은 속편의 어떤 논리
김소미 2024-10-10

전편보다도 더 비쩍 마른 채 나타난 호아킨 피닉스는 등장부터 배우의 몸이 발휘하는 조형적 위상에 힘을 싣는다.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몸은 이제 거의 부서진 것처럼 보인다. 유명 토크쇼 진행자 머레이(로버트 드니로)와 어머니를 포함한 6명을 살해하고(<조커>) 아캄수용소에 갇힌 지 2년. 어두컴컴한 감옥의 복도를 걸어가는 죄수의 뒷모습은 비죽 솟은 오른쪽 어깨뼈가 척추를 지나 심장까지 관통한 듯이 처참하게 뒤틀려 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앞모습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은 무료하다 못해 종종 순연한 빛까지 내비친다. 이대로라면, 비운의 인간 아서 플렉과 광기의 살인마 조커를 분리해 재판에서 형량을 줄이려 노력하는 변호인단의 전략도 통할 것만 같다.

덜 분노하고 덜 발작하는 조커가 사뭇 당황스러울 무렵, 음악치료 수업에서 만난 또 다른 수감자 할린 리 퀸젤(레이디 가가)이 속편을 추동하는 새 감정을 알려온다. 사랑. 그것도 제법 서로에게 무구하게 빠져드는 종류의 사랑이다. 1편에서 아서의 상상 속 연애 상대자였던 아파트 이웃 주민과 복도에서 처음 마주친 순간에 선보인 권총 자살 제스처가 이번엔 할린의 몫이 된다. 그가 조커를 모티프로 제작된 영화는 모두 섭렵했다고 말하는 열렬한 조커 추동자라서다. <조커: 폴리 아 되>의 아서는 조커가 낳은 존재가 자신에게 사랑을 되돌려주는 일에 정서적으로 구원받는다. 기쁨에 겨워 스티비 원더의 로맨틱한 발라드 <For Once in My Life>를 열창할 정도로! 이들은 곧 <밴드 웨건> (1953) 상영이 한창인 아캄수용소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온다. 황금기 MGM 뮤지컬의 ‘진저와 프레드’ 대신 조커와 할리퀸이 탭댄스를 추고 철창에 매달리는 세계가 곧 <조커: 폴리 아 되>다.

조커의 깨진 내면에 투사된 할리우드의 꿈

1편의 이야기를 물려받은, 그러나 돌연변이처럼 보이는 2편. <조커: 폴리 아 되>는 동일한 감독과 배우가 전편의 설정을 연대기적으로 확장한 서사를 취하고 있음에도 그 리듬과 질감 면에서 이질적이다. 세기의 재판을 앞둔 주인공에게 관객이 예상하는 바가 있다면 탈옥, 폭동, 그리고 또 다른 살인의 연속일 법하지만 놀랍게도 5년 만에 돌아온 조커는 가학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심판받는 죄수의 동선은 영화 내내 감옥과 법원을 오갈 뿐이다. 법정물의 구조를 취하는 신작에서 아서 플렉은 기괴한 분장을 취하고도 살인의 충동을 따르긴커녕 반성적인 자기 서사를 다시 쓰는 데 집중한다. 화면은 오직 그의 정신세계에 의지해 현실의 제한된 프레임을 이탈할 수 있다. <조커: 폴리 아 되> 의 뮤지컬은 바로 그곳에서 펼쳐진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1980년대 뉴욕영화를 닮은 가상의 도시 위로 트래비스 비클(<택시 드라이버>) 콤플렉스를 가진 스탠드업 코미디 지망생을 묘사한 <조커>는 속편에서 한층 더 광범위한 자세로 미국영화의 그림자를 빨아들인다. 아서 플렉의 혼란한 내면에서 재생되는 환상들은 모두 할리우드의 옷을 입었다. 거칠게 말해 코믹스는 캐릭터의 기원일 뿐, <조커: 폴리 아 되> 스타일의 원전은 철저히 할리우드의 역사를 향하고 있다. 인공적인 뮤지컬 세트피스, 범죄와 일탈에 놓인 아메리칸 뉴 시네마적 연인, 법정과 감옥을 무대 삼은 고전적 아크의 드라마가 아서 플렉-조커의 양분된 정체성만큼 뚜렷한 균열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물론 우연이 아니다. 2019년, 워너브러더스가 <조커>에 코믹스 기반의 캐릭터 영화로서는 턱없이 적은 예산인 6천만 달러를 투자하고 박스오피스적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던 시기부터 토드 필립스와 호아킨 피닉스는 1편보다 범상치 않은 2편의 풍모를 꿈꿨다. <조커: 폴리 아 되>는 거대 스튜디오가 흥행에 힘입어 ‘기획’한 속편이 아니다. 영원히 우리 시대의 조커이고 싶은 호아킨 피닉스의 집착이 낳은 산물이란 표현이 차라리 정확하다. 그는 <조커>를 마무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토드 필립스에게 아서 플렉-조커의 모습을 삽입한 <악마의 씨>(1968), <대부>(1972) 등의 포스터를 전송한다. 조커가 고담을 넘어 그들이 속한 진짜 할리우드의 환상으로 넘어가지 말란 법은 없다는 듯이. 그리고 조커가 할리우드의 일원일 수 있다면 노래하지 말란 법도 없다고, 이 환상의 콤비는 굳게 믿었던 듯하다.

레이디 가가까지 동원해 토드 필립스가 넘고 싶었던 산은…

<수어사이드 스쿼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의 마고 로비가 시퀀스를 압도하는 역동과 익살로 영화를 난장판으로 만든 것과 달리 레이디 가가의 할리퀸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모양새다. 조커의 광기를 내면화함으로써 스스로 강력해지길 원하는 초기 할리퀸의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심리적 기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지만, 그 역할은 조커의 거울 치료를 위한 존재로 한정되어 있다. <조커: 폴리 아 되>의 할리퀸은 조커의 이야기가 우후죽순 영화로 만들어지는 시대가 양산한 비운의 페르소나다. 부모의 집에 불을 지르고 방화죄로 잡혀온 여자는 죄목부터 조커와 거울상이고, 오직 조커와의 관계로부터 권력감을 얻는다. 요컨대 할리퀸에게 아서 플렉은 필요하지 않다. 환상 속에서만 노래하는 할린을 직시할 때, 아서의 눈엔 깨진 거울에 비친 애처로운 조커도 함께 비친다. 그러니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사랑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명제는 반쪽짜리다. 그 사랑이 오직 조커만을 원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아서 플렉은 각성한다. 두 사람을 “사이코틱 탱고를 추는 댄스 파트너"로 묘사한 호아킨 피닉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커: 폴리 아 되>에 조커 아닌 인간을 위한 춤과 무대, 파트너는 없다. 이처럼 자기부정의 메커니즘으로 완성된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조커는 더이상 미치지 못한다. 1편의 욕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정이다.

코미디영화 <행오버> 시리즈로 커리어를 세운 토드 필립스가 <조커> 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는 드라마틱한 광경 이후 <조커: 폴리 아 되>가 나왔다. 1편의 계승과 해체를 동시에 일삼는 이 분열적 선택은 토드 필립스다운 반항일까, 아니면 갑자기 무거운 왕관을 쓰게 된 감독의 빠른 패착일까? 관객은 배트맨과 싸우는 조커를 원할까, 아니면 레이디 가가와 노래하는 조커를 기꺼이 즐길까? <조커: 폴리 아 되>의 예상되는 실패 지점은 제법 선명한 질문들로 간추려진다. 속편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유추하고 이를 해체하려는 시도 자체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 동기가 투명하게 해석된다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해 토드 필립스는 그동안 자신의 작품이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 문화’의 병든 단면을 부추겨 잠재적으로 범죄를 조장할 만한 영화라는 오명과 싸워왔다. 자신의 출처를 찾는 영웅의 여정, 승리의 서사를 추구하는 블록버스터의 숙명을 안티 히어로 장르에 접목한 상징적 구도는 거론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됐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남성에게 내재된 분노가 가공할 만한 폭력으로 승화되는 영화를 동시대적 무의식의 산물로 받아들인다면, <조커>는 물론 우려스러운 영화가 맞다. 총기 난사, 차량 테러 등 현실의 폭력으로 이어진 매노스피어(남성계 커뮤니티)를 연구한 학자 로라 베이츠의 책 <인셀 테러>가 말해주듯, 고담 시민의 공포는 현실과 시차가 거의 나지 않는 전세계적 집단 감정이다. 두려움을 투사하는 대중을 창작자가 제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조커>가 특정 집단이 추종할 만한 영화로 라벨링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토드 필립스와 제작진은 열띠게 항변했다. 호아킨 피닉스가 인터뷰장을 박차고 나간 일화도 유명하다. 결과적으로 속편은 1편이 안긴 트라우마에 대한 제작진의 응답처럼 완성되었다. 그것도 너무 직설적인. 아서 플렉은 반성하고, 조커는 덜 위협적이며, 혹여나 <조커>의 추종자들이 있다면 배신감을 느낄 만한 주제를 취한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도 상징적 캐릭터의 카리스마보다는 종종 연민을 자아내는 쪽으로 선회 했다.

자, 조커가 5년 만에 우리 앞에 나타나 오해를 풀자고 한다. 토드 필립스는 더이상 그의 도덕성을 의심받지 않을 만한 영화를 내놓았다. 이제 관객이 잔인한 질문을 던질 차례다. 그래서 재미는? 오락이 되길 주춤하는 영화인 <조커: 폴리 아 되>의 치열한 내적 고민이 반가운 관객과 지루한 관객. 당신은 어느 쪽인가. 이 선상에서 조커의 열창도 달리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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