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간 아이템 회의 시간에 동료들을 설득한 단 하나의 문장. <더 인플루언서> 출연자 77인 중 이름을 아는 사람은 15명뿐이었다. 자료조사 과정에서 새로 알게 된 몇몇 인플루언서들은 내가 평생 절대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은 부류였다. 하지만 몇몇에겐 가벼운 호감이 생겼고 왜 팬이 많은지도 납득이 됐다. “세상이 말세다”라며 외면하기보다는 이 현상을 직시하고, 화석이 되어가는 종이잡지 기자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계기로 삼고 싶었다.
당신은 <더 인플루언서> 출연자 77인 중 몇명이나 알고 있나요?
주작, 잼민이, ㅇㅈ(인정), 나락…. 지난 몇년간 이 유행어들이 낯설지 않았다면 당신도 알게 모르게 인터넷방송의 영향하에 있는 것이다. 모 커피 광고에도 등장한 “라떼는 말이야”의 시초는 유튜버 침착맨 혹은 아프리카TV BJ 감스트라고 알려져 있고, “이거 실화냐”는 유튜버 보겸이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BJ, 유튜버, 인스타그램 스타, 이를 아우르는 인플루언서의 세계는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지난 8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서바이벌프로그램 <더 인플루언서>에는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트위치, 아프리카TV 등 플랫폼에서 활약하는 총 77인의 유명인이 등장한다. 릴리즈 전에는 출연자 중 몇명을 알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인터넷 문화 친밀도를 보여준다는 일종의 테스트(?)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더 인플루언서>에 따르면, ‘인플루언서’란 “당신의 관심을 받아 탄생했고 동시에 당신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다.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게임, 메이크업, 요리, 사주, 춤, 음악 등 각자 특화된 분야가 있는 크리에이터들이 있다. 이중 일부는 그들의 콘텐츠를 흡수하는 소비자들의 지지와 조회수를 받고 유명세를 얻는다. 아프리카TV나 트위치로 대표되는 실시간 방송을 따라잡을 여유가 없어도 상관없다. 요즘엔 헤비 유저들이 원본 방송을 짧게 편집해서 올린 쇼츠나 릴스로 이름을 알리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최근 매체에서 인플루언서들과 관련해 가장 뜨거웠던 이슈는 ‘선정성’이었다. <더 인플루언 서>에서 최종 8인까지 올라갔던 BJ 과즙세연은 방송 직전 방시혁 하이브 의장과 LA 길거리에서 함께 찍힌 영상 때문에 화제의 인물이 됐고, 과거에 신체 노출이 있는 의상을 입고 가슴에 우유를 뿌리는 영상이 SNS에서 다시 확산되기도 했다. 실제 그는 실시간 시청자 수를 모아야 하는 <더 인플루언서> 두 번째 라운드에서 아프리카TV에서 자주 선보이던 주력 콘텐츠 ‘섹시 댄스’를 고수해 상위권으로 생존했다. 과거 <맥심> 커버 모델이었던 유튜버 표은지는 옷을 갈아입는 과정을 생중계하며 속옷을 그대로 노출했고 그 역시 살아남았다. 방송 이후 <더 인플루언서>는 은밀히 감춰져야 할, ‘음지’에 있어야 할 이들을 전세계에 송출되는 예능프로그램에 출연시켜 이른바 ‘양지화’시켰다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과연 그럴까?
4인조 걸 밴드 QWER의 <고민중독>은 올해 한국에서 가장 많이 소비된 노래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멤버 쵸단과 마젠타가 노출 있는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등 트위치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쾌함을 드러내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파리올림픽 양궁 단체전 금메달리스트 김제덕은 QWER의 드러머 쵸단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보디 프로필에 ‘좋아요’를 누른 흔적이 발굴돼 구설수에 올랐다. ‘여캠’의 노출 있는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 것이 어느 정도 부적절한가를 따지기 이전에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2004년생 운동선수가 속한 또래 집단에서 QWER이나 쵸단은 ‘음지’가 아니다. 팔로워 수십만명을 거느린 스타가 공개적으로 ‘좋아요’를 자연스럽게 누를 수 있는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이에 대해 굳이 해명하지 않는다. 반면 스타 수학 강사 정승제는 BJ 과즙세연의 댄스 영상에 ‘좋아요’를 누른 이유가 무엇이냐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일자 “‘릴스’ 넘기다가 그냥 눌러진 것 같다. 그 영상은 제가 좋아할 만한 영상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1976년 수학 강사이자 방송인인 그에게는 이게 벌어져서는 안되는 일이다. QWER이나 과즙세연을 원래 알고 있었는지,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꼭 나이로 결정되는 문제는 아니지만 김제덕과 정승제의 집단 사이에는 분명한 벽이 있다. 본인을 포함한 주변 집단에서 인플루언서 문화를 접하고 수용하는 빈도가 확연히 차이난다.
요즘 젊은 세대는 저급한 인터넷방송과 숏폼에 찌들었다는 둥 그래서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소비한다는 둥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성인이 된 이후에 스마트폰을 구입한 세대와 초등학생 때부터 스마트폰을 달고 사는 세대는 완전히 다른 정보망을 통해 집단 문화를 만들어간다. 이 글을 읽는 3040세대를 위해 쉽게 비유하자면, 같은 반 친구가 H.O.T나 동방신기를 좋아하고 <스타크래프트>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쫓아갔던 또래 집단 문화가 지금 세대엔 인터넷방송과 유튜브와 SNS가 됐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알고리즘은 원본을 몰라도 파생 밈은 접할 수 있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주작, 잼민이, ㅇㅈ, 나락 같은 유행어의 시초가 된 방송을 직접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종종 응용한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의 스타가 등장하고 그들의 입지가 커지면서 레거시 미디어는 젊은 세대에 영향력 있는 이들을 이용하고 싶게 됐다. 이를테면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 유명 배우들이 영화 홍보차 출연한다거나, 나영석 PD가 침착맨에게 유튜브의 세계를 배우고 싶다며 찾아간다거나, <더 인플루언서> 같은 예능프로그램이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토양에서 자란 플레이어들이 엮이기 시작하면서 점차, 사실은 자주 충돌이 발생한다. 지난 5월 <피식대학>은 ‘메이드인 경상도-경북 영양편’ 영상에서 지역 비하 발언을 코미디로 포장하고 블루베리 젤리를 먹으며 “할머니 살을 뜯는 것 같다”는 이상한 발언을 했다가 비판받았다. 여성 아이돌 출연 회차의 섬네일에 ‘F*CK’처럼 보이는 문구를 의도적으로 넣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에 채널 구독자 수가 28만명 이상 감소하는 등 후폭풍이 거세지자 <피식대학>측은 사과문을 게재하고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 문제가 되는 표현을 잡아낼, 레거시 미디어에서 칭하는 ‘데스크’가 없기에 생긴 일이다. 그런데 리스크 관리에 엄격해야 할 유명 연예인들은 작품 홍보를 위해 <피식대학> 채널에 수천만원의 마케팅비를 지불하며 출연해왔다. 적어도 협업을 하기 위해서는 <피식대학> 채널의 조회수만 볼 게 아니라 상대 문화에 대한 검토가 필요했다.
케케묵은 ‘검열’에 대한 논의를 다시 꺼내자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방송 출신 인플루언서들을 무분별하게 메이저 방송에 출연시키거나 역으로 유명 연예인들이 그들의 방송에 출연해서 ‘양지화’에 도움을 줘서는 안된다는 식의 주장은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 추세는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이다. 인플루언서는 한국의 어떤 집단엔 누구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류 문화에 가깝고, 이중 일부는 혐오 발언이 필터링 없이 소비되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여캠’들이 반페미니즘적 발언을 했던 과거를 ‘파묘’할 때는 한국의 온라인게임 유저들과 그들의 커뮤니티, 그들을 타깃으로 한 인터넷방송 생태계가 심각하게 여성혐오적이라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여성 크리에이터들을 대상으로 ‘페미냐 아니냐’를 사사건건 검증하며 ‘페미’로 확인될 경우 지구 끝까지 쫓아가 매장하려고 한다. 여성 BJ가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이미 유명한 남성 BJ와 ‘합동 방송’을 하거나 촬영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는 ‘큰손’과 손잡고 이들이 제안하는 기획을 수행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과정에서 성 착취적인 콘텐츠에 발을 들이고 돈을 벌고 다시 또 착취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는 악순환이 걸린다. 인터넷방송을 벗어나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틱톡으로 넘어가면 달라질까? 남성 크리에이터의 경우 여행, 주식,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명세를 얻은 사례가 존재하지만 상대적으로 여성은 메이크업, 필라테스, 패션 등 꾸밈노동에 관련된 이들이 많은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백과사전 나무위키에서 웬만한 인플루언서들의 이름을 검색하면 ‘논란 및 사건 사고’ 항목이 반드시 존재한다. 개개인을 조롱하는 것은 쉽다. 그러니 이들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면서 “어떻게 이런 인물이 메이저 방송에 나오냐”며 사람에 집중한 목소리가 먼저 커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시스템에 대한 비판, 즉 아프리카TV나 트위치를 위시한 인터넷방송과 유튜브, 틱톡 등 플랫폼의 무엇이 혐오적 콘텐츠가 돈을 벌게 만들고 확산되도록 부추기는지는 흐릿해지며 공론장에서 사라진다. 누구든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인플루언서의 시대, 우리는 알고리즘에 따라 편향된 정보와 시각에 노출되고 유명세를 얻고 싶은 사람들은 그 시류를 따른다.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이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알고리즘을 구성하고 이용한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인터넷 방송계에서 범람하는 선정적 콘텐츠는 사실 성매매 업계와 유사한 프로세스로 제작되며 일부 BJ들은 빚 때문에 발이 묶인 피해자라는 증언들이 나온다. 최근 BJ들을 위시한 인플루언서들과 레거시 미디어의 협업으로 파생된 갈등과 논란은 근본적으로 시스템의 충돌이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경계하고 꼬집고 제동을 걸어야 하는지 날을 정확히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