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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들이 드디어 온다.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7월17일 만주 벌판에서 한국의 극장 스크린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지난해 4월7일부터 올해 1월23일까지 10개월 가까운 대장정을 수행한 이 영화는 200억원 가까운 총제작비와 중국 로케이션,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의 출연, 그리고 김지운 감독과 ‘만주 웨스턴’ 등 폭발성 높은 요소들이 한데 모여 화제를 불러 일으켜왔다. <씨네21>은 이 초대형 프로젝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해 8월 중국 둔황의 촬영장을 단독으로 찾았으며, 지난해 12월 정읍에 차려진 오픈세트 또한 방문했다. 물론, 총 170회에 걸친 촬영 중 고작 6회에 동참했다고 해서 이 영화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그저 배우와 스탭들이 쉴새없이 흘린 땀과 퍼부은 노력을 엿볼 수 있었던 관찰자의 입장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현장의 안과 밖을 소개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촬영현장에선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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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나오긴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고 70>의 조승우 인터뷰
-영화배우가 아닌 ‘뮤지컬 배우’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커리어를 쌓았다. 뮤지컬과 달리 기타를 잡고 세워진 마이크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나.
=이제는 마이크나 기타가 없으면 오히려 더 어색하다.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뮤지컬할 때 무대 위에서 몸에 무선 마이크를 달고서 연기하는 게 가장 힘들다. 아무래도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이라 떨어질지도 모를 걸 신경 써야 하니까, 지금이 더 자유롭다.
-최호 감독과는 <후아유>에 이어 두 번째다. 호흡은 어땠나.
=얘기해도 되나? (웃음) 그땐 사실 서로 잘 맞지 않았다. 내 나이가 그때 20대 초반이었는데 ‘이놈은 놀아보지도 않고 연애도 별로 안 해봤나’ 그렇게 답답하게 생각하셨을 것 같다. 닳을 대로 닳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때의 나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고 한참 뒤 <고고 70>을 다
<고고 70>의 배우 조승우, 최호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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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축구팬의 즐거움은 유로2008 시청이다. 월드컵에 버금가는 대회라 여러 가지 화제를 낳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진 다음 프랑스 대표팀 감독이 한 말이 걸작이다. “이번 패배로 사임할 생각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프랑스팀 감독 레이몽 도메네크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한 가지 프로젝트만 갖고 있다. 그것은 결혼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아름다운 일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 엉뚱한 대답은 곧 결혼할 예정인 연인을 향한 프러포즈다. 패배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 개인적인 사랑고백으로 응답한다? 이건 자신을 향한 질타를 피하려는 말돌리기일 수도,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대한 성실한 대답일 수도 있다. 아무튼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참담한 패배를 기록한 뒤에 나온 말로는 더없이 인상적이다. 내가 프랑스 사람이었다면 꽤 열을 받았겠지만 프랑스 국민의 성토가 극에 달했다는 후속보도는 보지 못했다. 대신 프랑스 축구협회는 이런 일이 있은
[편집장이 독자에게] 2008 놀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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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밤을 향해 쏴라. <고고 70>은 70년대 ‘닐바나’(Nirvana)라는 ‘고고클럽’을 중심으로 화려한 밤문화를 이끌었던 록밴드 ‘데블스’의 이야기다. 데블스는 보컬과 기타를 맡았던 리더 김명길이 이끌던 당시 실제 밴드 이름이다. 더불어 신민아가 연기하는 ‘미미’가 속한 ‘와일드 캐츠’ 역시 여성 댄스 그룹으로 시민회관과 닐바나 등에서 고고춤을 보급한 실제 주역이기도 하다. 기지촌 클럽을 전전하던 보컬 상규(조승우)는 기타리스트 만식(차승우)과 6인조 그룹 데블스를 결성,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 출전한다. 화려한 무대매너로 눈길을 끈 이들은 한 팝칼럼니스트의 눈에도 띄어 고고클럽 ‘닐바나’에서 활동을 시작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함께 상경한 미미 역시 ‘미미와 와일드 캣츠’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당대 춤과 패션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점차 밴드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상규로 인해 멤버들간에 불화가 생기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재로 멤버가 사망하는 사건까
최호 감독의 <고고 70> 촬영현장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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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밤문화 속으로 뛰어든 영화 <고고 70>이 촬영을 끝냈다. 충무로에서 음악적 재능으로 이만한 영화를 소화해낼 배우는 조승우밖에 없고, <라디오 스타>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로 주목받은 방준석 음악감독 역시 자신의 커리어에서 최고점을 찍으려 한다. 늘 다양한 장르를 돌파하며 개성 넘치는 심미안을 보여준 최호 감독의 신작이라는 사실 역시 기대를 부풀리는 요소다. 추석 개봉을 앞두고 있는 왕년의 화려한 고고클럽 영화 <고고 70> 현장을 찾았다.
70년대 밤문화 속으로, 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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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에서 대만영화제가 연장상영을 한단다. 그래서 늦기 전에 꼭 언급하고 싶은 배우가 하나 있다. 바로 과거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페르소나였던 잭 카오(高捷)다. <동년왕사>(1985)에도 출연했던 <동동의 여름방학>(1984)의 외할머니 ‘메이팽’이나, <희몽인생>(1993)의 주인공 그 자체이자 <연연풍진>(1986)과 <비정성시>(1989)에서 할아버지로 나왔던 리티엔루도 중요하지만 <나일의 딸>(1987)부터 허우샤오시엔과 조우한 잭 카오 역시 이후 그의 영화에서 늘 인상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비정성시>에서 말썽쟁이 셋째 ‘문량’(‘문청’ 양조위는 넷째)으로 나와 정신병자가 되고, <호남호녀>(1995)에서 여주인공의 헤어진 옛 연인 ‘아 웨이’이자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남국재견>(1996)에서 대만의 중년 양아치로 나와 선글라스를 낀 채 그저 시간만 때우고, &l
[울트라 마니아] 잭 카오,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불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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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앳 더 웨딩> Margot at the Wedding
<키킹 앤 스크리밍> Kicking and Screaming
1990년대의 미국영화계는 놀라운 신인들의 출현으로 시끌벅적했는데, 그 정글에 나타난 위트 스틸먼, 웨스 앤더슨 그리고 노아 바움바크는 연약한 동물 같았다. 당시에 빛났던 감독들이 대부분 희미하게 명멸하는 지금, 평론가 조너선 로젠바움이 에릭 로메르, 에른스트 루비치, 장 르누아르의 이름으로 평가한(그러니까 유럽의 영향 아래 있는) 세 감독의 생명력이 그저 신비할 따름이다. ‘은밀한 웃음과 우울한 위트 그리고 달콤한 상처’를 선보여온 세 사람 중 바움바크는 우리에게 뒤늦게 소개된 편이다. <오징어와 고래>에 이어 출시된 <마고 앳 더 웨딩>을 만나는 김에 그의 데뷔작 <키킹 앤 스크리밍>을 마저 구해 보면 어떨까 싶다. <키킹 앤 스크리밍>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캠퍼스 부근을 맴도는 친구들의 이
‘바움바크’식 성장의 기록을 만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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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6월19일(화) 2시
장소 용산CGV
개봉 7월3일
이 영화
독일에서 ‘위조의 제왕’으로 명성을 떨치며 화려한 삶을 살던 살로몬 소로비치는 경찰에 체포된 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타고난 그림 실력과 예술적 재능으로 나치 친위대 간부들의 초상화 등을 그려주며 다른 수용자들보다 나은 생활을 누리던 소로비치는 수용자 중에 전직 인쇄 기술자, 은행 직원들과 함께 나치의 대규모 위폐 생산과 공문서 위조 작전인 ‘베른하트 작전’에 투입된다. 실패하면 죽음 뿐인 작전에서 탱고 선율이 흐르는 작업 환경과 탁구대 등 다른 수용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혜택이 이들에게 주어지지만, 영국 파운드에 이어 미국 달러까지 완벽한 위조를 눈앞에 둔 이들은 삶과 영혼의 양심이라는 선택 속에서 갈등하기 시작한다.
100자평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독일에서 활동하던 위조지폐범 소로비치는 경찰에 체포된 뒤 유태인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나치 간부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역사상 최대 규모 위폐 작전 <카운터페이터>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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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이란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도상을 뜻한다. 자기 아닌 무엇을 상징하는 사람도 그 이름으로 불린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길게 보면 아이콘 따위는 되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속 편하다. 물론 아이콘의 발치에는 그가 하지도 않은 일을 찬미하는 꽃이 쌓이고 ‘신탁’을 구하는 이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역시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일로 말미암아 제일 먼저 험한 꼴을 당하는 것도 아이콘이다. 클릭해서 원하는 반응이 즉각 나오지 않을 때 유저들은 아이콘을 휴지통에 냅다 버릴 수도 있다. 단, 주지하다시피 아이콘을 버려도 프로그램은 시스템에서 삭제되지 않는다.
1987년생 배우 문근영을 세상에 알린 <가을동화>의 은서와 <장화, 홍련>의 수연은 아이콘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세 번째 영화 <어린 신부>의 보은은 아이콘이 되었다. 영화가 간판을 내리고도 오랫동안 미디어 속 문근영은 보은이로 살아갔다. 급기야 보은이와 근영이가 암묵적 합의 아래
[김혜리가 만난 사람] 배우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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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저먼의 영화를 보면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가 겹쳐 떠오른다. 저먼의 장편 데뷔작 <세바스찬>(1976)과 만테냐의 초상화 <성인 세바스찬>(1459)의 친밀성 때문만은 아니다. 두 작가 모두 남성 육체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데 온 정성을 다했다. 미술사에 따르면 만테냐가 동성애자였다는 믿을 만한 사료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가 동성애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처럼 남성의 몸을 탐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만테냐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은밀하게 드러냈다면 저먼은 전면적으로 표현했다.
데릭 저먼은 평생 동성애자의 조건을 영화의 전면에 내세웠다. 비스콘티, 파스빈더, 파졸리니 등 대표적인 동성애 감독들이 있었지만, 저먼처럼 극단적이고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저먼은 데뷔작 <세바스찬>을 발표하며 한순간에 동성애 영화의 중심에 섰다. 그는 동성애를 아름답게 혹은 동정심이 일어나게 그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소통이 안 되는 외로
탐미적 동성애 영화의 중심, 데릭 저먼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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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자고 전화를 걸었더니, 대뜸 푸념이 들려왔다. “바빠 죽겠어요. 내가 지금 정말 후회하고 있다니까….” 예상 못했던 건 아니다. 지난 6월6일 첫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는 수많은 앵글의 장면이 빠른 속도로 채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 은수가 여러 선택의 갈림길에서 멈칫하는 순간의 공기와 온도가 살갑게 담기기도 했다. 당연히 영화 같은 드라마라는 호평이 블로그를 채웠고 원작 소설의 판매량과 O.S.T의 다운로드 횟수가 급증했다. 하지만 그러한 매력은 그만큼 많은 시간에 공을 들여 만들었기 때문에 이뤄낸 성과일 것이다. 그러니 영화감독이, 그것도 차분한 호흡으로 영화를 연출하던 사람이라면 전쟁터나 다름없을 드라마 촬영현장이 무척 버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24시간을 초단위로 나누고 있을 사람에게 인터뷰를 제의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다행히 박흥식 감독은 시간을 내주었다. 강남의 촬영현장에서 마포에 있는 편집실로 가는 길목의 한 시간. 약속시간
[박흥식] 스케줄에 쫓겨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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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왜 놀라시죠?
-<둠스데이…>를 본 직후라 그렇습니다. 실례가 됐다면 용서하세요. 제가 아무나 보고 이렇게 놀라진 않는데 말입니다.
=제가 뭐 아무 모가지나 꺾는 스티븐 시걸도 아니잖아요. 안심하세요.
-그럴 리가요. 스티븐 시걸의 손에 사라진 수많은 무명 인간들보다 더 많은 인간들을 며칠 만에 해치우셨는데요. 사상자 수로 따지자면 <코만도>에 육박하고, 살상법의 잔혹도로 따지자면 <킬 빌>에 버금갑니다요. 싱클레어씨는 이제 <에이리언>의 시고니 위버나 <터미네이터>의 린다 해밀턴급에 오르실 것 같아요.
=흠. 이거 혹시 싫다는 이야기?
-좋단 소리죠(굽실굽실). 근데 이런 질문은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눈은 어쩌다가 그러셨어요?
=어쩌다가 그랬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정말 중요한 건 더 좋은 눈을 찾았다는 거죠.
-맞습니다. 맞고 말고요. 의안을 적외선 동영상 카메라로 사용할 수 있다니. 저도 하나
[가상인터뷰] 피도 눈물도 없는 <둠스데이: 지구 최후의 날>의 여전사 이든 싱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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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죽은 담에 아부지랑 엄마를 다시 볼 수 있니?” “응. 거긴 배도 아이 고프구 아픈 데도 없는 그런 데란다.” “그래두 비는 왔음 좋겠다.” 소년은 나지막이 읊조린다. 빗속에서 아빠와 축구했던 기억과 엄마의 결혼반지를 손 안에 품고, 사막을 가로지른다. 아빠의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 마른 지평선을 말없이 응시하는 준이는 탈북자 가족을 다룬 영화 <크로싱>의 응어리진 슬픔이다. “네”, “아니요” 또는 숙고의 시간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충북 영동 출신의 열세살 소년 신명철은 스스로 선택한 극한 다이어트와 함께 몽골 사막에서의 촬영기간을 보냈다. “얼굴이 너무 뚱뚱하게 나와서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이미 소설책 크기의 반밖에 되지 않는데도, 더 곤하고 마르지 않은 제 얼굴에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울었다고, 그의 모친이 옆에서 전한다. 아들은 고프다 못해 아픈 배를 움켜쥐고 사막을 걸었고, 어머니는 밤마다 아들과 함께 울었다.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먹기를 거부해서”
[신명철] 탈북소년이 됐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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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탈출> <매드 맥스2> <엑스칼리버> <오메가 맨> <노 블레이드 오브 글로리>…. 스무편에 이르기까지 쭉 꼬리를 물 이 목록은 닐 마셜 감독이 <둠스데이: 지구 최후의 날>(이하 <둠스데이>)을 만들 때 영감을 받았노라 꼽은 작품들이다. 2005년 <디센트>로 호러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찬사받았던 그는 전작의 10배 정도 되는 예산을 손에 쥐고 액션, 호러, 스릴러, SF를 고루 반죽한 그릇에 앞서 언급한 영화들을 잘게 으깨서 담아놓았다. 규모의 증가가 좀더 대중적인 영화로 이어지리라는 예측과 달리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개인적 취향과 장르 선배들에 대한 오마주로 소비한 것이다. 과연 그는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일까. 현재 차기작 <드라이브>를 작업 중인 닐 마셜 감독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둠스데이>에 대한 구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
=1980년 초반
[닐 마셜] 종말론적 영화들의 많은 요소들을 반영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