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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변신>에서 그레고르는 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 모습으로 변형되자 가족에게 소외받는다. 그를 의사소통 부재의 상황으로 내몬 것은 흉측한 벌레가 되어버린 그의 외모이다. 삶에서 단 한 가지의 조건이 바뀌었을 뿐인데, 전부가 바뀌었다. 혹은 전부를 알게 된다. 이는 마치 과학자들의 실험 방식과도 같다. 각기 다른 컨디션을 통해 목표한 결과를 유추해낸다. 이 직접적이고 기괴한 작품을 통해 카프카는 인간사 부조리와 가려진 허위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한편 <시리어스 맨>의 주인공인 물리학자 래리는 수업시간에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칠판에 그리는데, 이 실험에서 고양이는 강철상자에 갇혀 있다. 그 녀석이 독극물에 오염되지 않고 살아남을 확률은 반반이다. 결과를 알기 전에 실험자는 상자 안의 상황을 볼 수 없다. 그가 알게 될 것은 오직 결과뿐이다. 이 실험을 통해 슈뢰딩거는 미시세계의 불확실함으로 인해 거시세계 역시도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고 한다. 이 경우 실
[영화읽기] 우리는 섣불리 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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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며칠 동안 여독을 푸는 데 쓰이는 시간을 가리켜 종종 여진을 앓는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뒤늦게 밀려오는 지진처럼, 한동안 낯선 땅을 밟고 돌아오면 몸은 시차로 인해 또 다른 몸을 배회하기 시작하는데, 자신의 눈이 잠시 그 몸을 다 돌아보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개의 경우 그 여독을 감당하기 위해 시도했던 문장은 어떤 무렵을 향해 울렁거리게 마련이다. 내게는 그런 무렵들이 시로 다가왔다고 그동안 몇권의 시집으로 충분히 ‘시차’에 대해선 엄살을 떤 것 같고, 그 시차의 이름들을 지어주며 보내는 시간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라는 말로 내 여행의 목록은 다시 채워지고 있다. (내 생각에 사람들 대부분은 일생을 자신의 몸으로 빚어내는 시차들에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보내고 있으므로) 하나의 여행기란 언제나 내면의 추상이 가득 담긴 풍경화에 가깝거나 내면의 풍경이 점점 어떤 추상화에 가까워지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는 새로운 여장을 또 꾸릴 것이
[김경주의 섬세함을 옹호하다] 여행을 마친 어느 집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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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올 문학상은 없다 싶었는데 하나 더 추가. 문학동네에서 <제1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냈다. “한국 문단의 최전선”에 서 있는 “젊은 감각”을 지닌 작가들의 단편이란다.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김중혁과 배명훈을 찾자. 대상을 받은 김중혁의 <1F/1B>는 상가건물 관리자라는 ‘소외’의 아이콘을 요리조리 굴리는 손맛이 백미다. 건물 관리자들이 비밀 지하벙커로 모여 외부 공격에 맞선다는 장르적 설정도 있고, 지하벙커가 ‘1F’와 ‘1B’ 사이에 존재하는 ‘/’(슬래시) 같은 공간이듯 관리자들 자신도 그런 존재라는 한국문학적 통찰도 있다. 진지한 투로 건네는 썰렁한 농담도. 건물관리자연합 회장이 펴낸 책을 보자. “우리는 손을 뻗어서 형광등의 열기에 맞서 싸운다. 우리는 깜빡이는 형광등보다 외로운 존재들이다.”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는 철학적 아이디어 덕분에 이 작품집과 제법 어울리는 본격SF다. 과학자 신수정이 자살한 뒤 ‘나
[한국 소설 품는 밤] 이야기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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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소년 소녀의 지구는 일기와 편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어딘가에 일기와 편지에 쓰인 일들이 일어나는 가상우주가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 소풍을 가거나 가족과 외식을 했다. 요즘처럼 실시간으로 트위트와 리트위트를 반복하는 시대라면 코웃음칠 펜팔이라는 문화는 어땠나. 매일같이 우리는 묻고 또 물었다. 하우 아 유?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자문자답. 아임 파인 땡큐. 우표 수집을 취미로 갖지 않은 아이가 없었고, 정 할 말이 떨어지면 <펜팔 예문집>에 나온 남의 일상을 베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 그 일이 좋다 아니다를 말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가끔은 몹시 그리워진다. 글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나만의 가상현실.
<연애편지의 기술>을 보면 소싯적 편지 한통으로 지구를 정복할 기세였던 지난 세기의 몇몇 순간이 떠오른다. 편지는 소통이라고 배웠는데 사실 대부분은 혼잣말이고 넋두리였다. <연애편지의 기술>에서 편지를 쓰고
[도서] 이 미친 유머감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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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다 읽었다. 가볍고 술술 읽히는 소품이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있지만 추리소설이라기엔 아쉽고, 으스스한 분위기는 있지만 공포소설이라기엔 부족하다. 그런데도 미간에 주름 잔뜩 잡고 두근거리면서 읽게 만든다. 책읽기가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다면 이런 책들 때문이 아닐까.
‘바벨의 모임’이라는 수수께끼의 사교모임을 둘러싼 연작 소설인데, 사실 모임 자체가 사건의 중심에 서는 일은 없다. 상류계급의 영애들만 가입 가능한 문제의 독서모임 ‘바벨의 모임’의 멤버들이 각자 겪은 이상한 일이라는 편이 맞겠다. ‘마지막 한줄의 반전’이라지만 대개 짐작 가능하니 너무 크게 기대하지는 말 것. 책을 좋아하는 몽상가로 십대를 보낸 소녀라면 손톱을 마구 깨물며 부모에 대한 불만과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몸부림치던 성장기를 떠올리게 되는 대목들을 만나게 된다. 집사물 덕후라면 이 책에 각별한 애정을 느낄 듯. 소녀를 보필하는 소녀라니, 거참….
요즘 이런 작은 모임을
[도서] 후루룩 연작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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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경우,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으면 충분히 즐길 수 없는 경우.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은 후자에 속한다. 제목부터 그렇지 않나. 세계가 ‘두번’ 진행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는 한번 진행된 적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정혜윤은 이번 책에서 고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이 고전의 제목과 내용은 대강 알지만 읽은 적은 없는 독자에 속한다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 이상을 얻기는 힘들다. 이 책들을, 카프카의 <변신>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었다면, 정혜윤은 그 세계가 다시 진행되는 언어의 숲으로 당신의 손을 잡아 안내한다. 맹세컨대 당신이 이 책들을 어제 읽었다 할지라도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을 읽으
[도서] 사랑하는 그 세계에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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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름은 마리나라는 여자 보컬과 더 다이아몬즈란 백밴드를 일컫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정작 그녀는 솔로다. 마리나 램브리니 다이아몬드란 여자의 예명인 셈인데 ‘다이아몬드’는 그리스어 성을 영어로 바꾼 것이다. ‘내가 마리나, 여러분은 다이아몬드’라고 마이스페이스에 썼다.
첫 앨범 ≪Family Jewels≫의 인상은 강렬하다. 다이내믹한 여성 보컬이 모든 사운드를 압도하고 주도하는데 마치 마녀(여사제)의 제사를 보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심각한 건 아니다. 댄서블하고 섹시하다. 그래서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2009년의 혜성 같은 신인 플로렌스 앤드 더 머신과도 유사하지만 그보다는 더 일렉트로니카적이다. 밴드 사운드를 압도하는 여자보컬이란 점에서 사운드와 젠더에 대해 생각할 여지도 많다. 특히 뮤직비디오가 볼 만한데 <Mowgli’s Road> <I Am Not A Robot> <Hollywood>에서 그녀의 카리스마를 확인할 수 있다.
[음반] 폭발하는 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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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의 엔딩과 <너는 내 운명>(2005)에서 전도연이 퇴원파티 때 울며 노래하는 장면. 이때 <사랑밖엔 난 몰라>가 흘러나온다.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에서 임원희가 마적단 본부에 침투해 총격전을 벌일 때는 <그때 그 사람>이, <열혈남아>(2006)의 어머니 나문희와 <와일드카드>(2003)의 형사 정진영의 애창곡은 <백만 송이 장미>. 모두 심수봉의 노래다. 그의 노래는 여러 영화에서 사랑의 설렘과 이별의 아픔, 그리고 지나간 추억의 아련함을 이어주었다.
그가 30주년 기념 전국 투어 중이다. 30년이란 세월에 세대차를 느낄 필요는 없다. 세대를 초월한 공감대는 이번 콘서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의 히트곡을 재즈와 월드뮤직 등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다양한 장르로 녹여내고, 여기에 로큰롤 음악에 맞춰 드럼 연주와 안무까지
[공연] 영화도 사랑한 ‘그때 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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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바라만 보다가,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한겨레> 사진기자 출신 사진작가 임종진도 그중 한명이었다. 2004년부터 캄보디아를 지원하는 NGO단체 JSC(Jesuit Service Cambodia)와의 인연으로 캄보디아를 종종 찾았던 그는 2008년 가을, 아예 그곳에 눌러앉아 무료 사진관을 차렸다. 임종진의 세 번째 개인전 <Cambodia-흙, 물, 바람>은 캄보디아에서 머물렀던 그 15개월의 기록이다. 휠체어 경주를 벌이는 소년들, 수줍게 웃는 소녀, 낮술에 붉어진 얼굴의 할아버지가 작가의 사진에 담겼다. 모두 큰 기교를 부리지 않은,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사진들이다.
그러나 그저 ‘기록사진’으로 규정짓기에 이 사진들은 어딘가 다른 지점이 있다. 그건 바로 친근감이 아닐까 싶다. 이방인이 아닌, 동료나 친구에게 지어 보이는 표정들이 임종진의 사진 속에는 있다. 스스로 풍경 안에 몸을 담고, 그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이 아니고서는 담을
[전시] 캄보디아 15개월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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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미스 사이공>
4월4일까지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
4월16일~5월1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5월14일~9월12일 충무아트홀 대극장
출연 김보경, 임혜영, 이건명, 마이클 리, 김성기, 이정열, 김선영, 김우형, 이경수 등
문의 02-518-7343
이 먹먹함은 뭘까. 공연장을 나오는 길, 머릿속에 맴돈 생각이다. 4년 만에 다시 막을 올린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시간은 1970년대에 머물러 있지만 여전히 가슴을 울린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뮤지컬 버전인 <미스 사이공>은 1975년 사이공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의 철수가 시작되는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한 미군과 베트남 여인의 러브 스토리다. 미군 크리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지고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킴. 정혼자 투이의 구애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힘들게 살아가던 킴은 극적으로 크리스와 재회하지만 그의 곁에는 이미 다른 여자가 있음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공연이 끝난 뒤] 사랑은, 사이공 언덕 위에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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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트렌드 지수 ★★★★★
음악의 미래 지수 ★★★★☆
2009년 말, 영국에서 가장 핫하게 다뤄진 밴드는 아무래도 THE XX다. 규정되지 않음, 알 수 없음을 뜻하는 기호를 이름으로 삼은 이 밴드 멤버들은 데뷔 당시 모두 19살이었다. 손발이 바쁜 리스너들은 이미 MP3로 이 시크한 데뷔 앨범(셀프 타이틀 앨범이다)을 들어봤거나 수입, 해외 주문으로 앨범을 구했을 텐데(나도 연말에 아마존에서 주문했다) 다행히 얼마 전에 국내에 라이선스되었다.
이 앨범에 대한 세간의 평은 ‘미니멀리즘의 구현’으로 수렴된다. 착실하게 쌓아올린 비트가 만드는 공감각, 가득 채우는 대신 여백에 집중하는 사운드, 멈칫거리는 틈에 불현듯 도약하는 기타 리버브, 남녀(혹은 소년 소녀)의 혼성 보컬이 그를 총총 뒤따르는 구성은 이 음악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린 펜던트처럼 만든다. 첫곡 <Intro>부터 <Crystalised> <Heart Skipped a Beat>
[음반] 일렉트로니카와 슈게이징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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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순간들>
2008년 감독 얀 트로엘 상영시간 106분
화면포맷 1.85:1 아나모픽
음성포맷 DD 5.1, 2.0 스웨덴어 & 핀란드어
자막 영어 출시사 아이콘(영국)
화질 ★★★☆ 음질 ★★★ 부록 ★★★☆
2008년, 나란히 77살을 맞은 얀 트로엘과 야마다 요지가 신작을 발표했는데, 구만리 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진 두 영화 <영원한 순간들>과 <엄마>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약속이나 한 듯이 두 노장은 ‘어머니’라는 존재로 눈을 돌렸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감독과 오랜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의 가족으로부터 나왔으며, 두 주인공은 공히 20세기 초·중반의 험난한 시기에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살았다. 진지하고 우아한 필름영화의 가치를 일깨워준 두 영화는, 그러나 인물에 대한 접근방식이 서로 다르다. 어머니를 향한 애정 어린 눈길을 내내 거두지 않는 <엄마>가 관객의 눈물을 쏙 뽑는 드라마라면, 세
[dvd] 노 감독이 어머니에게 바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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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너의 마지막을 3대 음식영화로 매듭질까 한다. ‘3대’라고 해서 <어시장 3대>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뽑은 최고의 음식영화 세 가지다. 그 첫손가락에는 <음식남녀>를 꼽아야 한다. 리안 감독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걸작이다. 패션은 변해도 요리는 그렇지 않으니까. 은퇴한 거물 요리사 주사부가 딸들을 위해 요리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그가 게와 생선을 손질하는 장면, 찌고 굽고 튀기는 중국 요리의 다채롭고 스케일 큰 손놀림은 식욕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대만 최고의 호텔 주방에서 직접 찍은 현장신은 관객의 몰입을 절정으로 이끈다. 수많은 요리사들이 각자의 테크닉으로 요리하는 장면은 화면 밖으로 기름이 튈 것처럼 생생하다. 이 영화 이후 나온 모든 아시아 음식영화는 크든 작든 리안 감독에게 빚을 지고 있을 만큼 요리를 다룬 영화의 한 전범을 이뤘다. 가족애와 유쾌한 반전까지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요소도 두루 갖춘 영화.
아시아에 <음식남녀>
[그 요리] 내 인생의 세 가지 음식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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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두나가 갇혔다. 그곳은 경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속 장면이다. 무심한 듯 자연스러운, 잔뜩 풀어진 배우 배두나는 <공기인형>에서 자신을 꽁꽁 묶어두는 모험을 한다. 섹스돌 ‘노조미’의 몸속, 빳빳하게 긴장한 목선 하나까지도 기존의 배두나를 거스르는 ‘부자연스러운’ 연기다. 도전을 감행한 그녀의 변이 궁금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는 어떻게 알게됐나.
=감독님이 내 팬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러다 봉준호 감독님을 만나 “배두나가 맡아줬으면 하고 쓰는 배역이 있는데, 해줄까” 하면서. “근데 좀 야하다”고 고민을 털어놨다더라. 봉 감독님이 “배두나라면 괜찮다고 할 거다”라고 했고. (웃음)
-그래서 역시 ‘배두나여서’ 괜찮았던 건가. 섹스돌이라는 만만치 않은 캐릭터였는데.
=오히려 좋았다. 시놉시스는 완성된 영화보다 설정 자체가 훨씬 셌는데 그게 확 다가왔다. 게다가 독창적이고 엄청난 세계관이 있는 감독이 날 선택한 거다. 했으면 좋겠다는
[배두나] 다 벗었다, 기쁘게 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