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 Disenchantments 안드레아스 피퍼/ 독일/ 2010년/ 100분/ 플래시 포워드
독일영화 특유의 사색적 분위기가 살아있는 작품으로 네 명의 중심인물을 따라 네 가지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탄생과 죽음, 사랑과 화해 같은 관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지나치게 무겁거나 난해하지 않다. 발칸반도에서 온 알렉스는 보스니아 내전 관련 모임에서 만난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만남이 생각보다 쉬운 것은 아니다. 독일어 교사 안나는 개인 레슨을 하게 된 미국인 변호사와 잠시 일탈에 빠졌다가 뜻밖의 임신을 하게 된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삶의 선물을 모두가 곧바로 반길 수는 없는 법이어서 안나는 잠시 고민에 빠지지만 타협점을 찾아낸다. 식물에너지를 연구하는 과학자 사라는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의심이 깊어지자 직접 실체 확인에 나서는데 생명을 살리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점차 집착의 행태로 바뀐다. 마지막은 사고 때문에 미국에 갈 기회를 놓친 제약회사 연구원 바스티안이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이다.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들 네 사람 사이에 특별한 연관은 없다. 이들이 현재 독일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곳에 펼쳐진 삶의 파편들을 확인해 볼 수는 있다. 네 개의 파편을 모아 환멸이란 제목으로 묶은 까닭에 대해서는 영화를 본 뒤에 다시 질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감독이 그 답을 영화 안에 직접적으로 풀어놓지 않았으므로 각자의 답을 구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면 환멸이라는 단어 대신 다른 말을 붙였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지 모른다. 삶의 파편을 모아 놓으면 그 안에 웬만한 관념이 들어앉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