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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이병률의 새 시집이 나왔다.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이번 시집은 ‘두 사람’으로 시작한다. 문을 여는 시 <어떤 그림>은 미술관의 두 사람이 이 방과 저 방을 지키는 일을 한다는 문장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다음 시(<공원 닫는 시간>)에서 (아마도 같은, 아마도 다른) 이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가는 중이다. “각자 태어난 두 나무가 서로 몸을 끌어 가까워져/ 담을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고/ 서로에게서 솟아난 영감은 서로 엉키고/ 누구도 그들의 엉킴을 풀지 못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전모라지만.”
사랑의 말을 듣고 싶을 때 이병률을 찾는 이들을, 이번 시집은 실망시키지 않는다. 코로나19의 풍경을 말할 때도 그렇다. 중국에서 봉쇄당한 경험, 한국에서
씨네21 추천도서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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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 지음 / 글항아리 펴냄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증언하는 책이 나왔다. 김유태의 <나쁜 책>은 이른바 ‘금서’로 취급되어 출간이 금지되거나 작가가 고발당하거나 심지어 작가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책들을 다룬다. 금서는 왜 금지당하는가? 사회의, 나아가 국가의 치부를 들춰내고 고발하기 때문이다. 그 거침없는 당당함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깨달음을, 해방을 준다. 이 책들은 작가의 수난 시대로 이어지는가 하면 베스트셀러의 영예를 안기기도 한다. 이 책 자체가 매력적인 작품들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저자 김유태는 각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책에 얽힌 우여곡절을 상세히 전한다. 하나같이 읽고 싶게 만들면서.
박찬욱 감독이 시리즈로 만든 <동조자>는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임에도 베트남에서 금서다. 공산당 모독이 반복해서 서술되는 데다 베트남의 국부로 통하는 호찌민을 직접 비판한
씨네21 추천도서 - <나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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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 지음 / 민경욱 옮김 / 비채 펴냄
호러와 미스터리를 결합한 독특한 분위기의 소설. <검은 얼굴의 여우> <하얀 마물의 탑>에서 이어지는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전후 일본 사회를 충실히 담아내는 역사물로서의 매력과 초현실적인 공포를 느끼게 하는 사건의 연쇄, 그리고 이성으로 차근차근 짚어가는 사건풀이가 두루 재미를 준다. 시간순으로는 <검은 얼굴의 여우> 이후의 사건이며, <붉은 옷의 어둠> 이후에 <하얀 마물의 탑>의 시간으로 진입한다.
시리즈에서 명탐정 역할을 하는 인물은 모토로이 하야타. 탄광에서 검은 얼굴의 여우로 불리는 괴기와 밀실 살인을 해결한 그는 만주 건국대학에서 만난 동창 구마가이 신이치에게서l 연락을 받는다. 도쿄에 와서 이상한 사건을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요청이다. ‘붉은 미로’라 불리는 비좁은 미로 같은 암시장에서 여성들을 뒤쫓는 ‘붉은 옷’이라 정체불명의 괴인에 대한
씨네21 추천도서 - <붉은 옷의 어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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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의 어둠 - 미쓰다 신조 지음
나쁜 책 - 김유태 지음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이병률 지음
조금 더 사랑하는 쪽으로 - 안미옥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5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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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연재 초반부터 오랜 인연을 암시한 네코마 고등학교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배구부가 거쳐가야 할 숙명의 라이벌이 되어 봄철 대회에서 재회한다. 이전 연습 게임에서 패배한 카라스노는 그사이 더 발전한 팀워크로 공을 향해 질주한다. “힘들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일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소년들의 세계는 현재에 전력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한 가치를 얻는다. 2012년부터 2020년 겨울까지 8년 반 동안 <하이큐!!>를 연재한 집영사의 <주간 소년 점프> 편집자를 서면으로 만났다.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이 지닌 희망을 들여다보기 위해 1대 편집자 혼다 히로유키, 2대 편집자 이케다 료타, 3대 편집자 아즈마 리키에게 질문을 건넸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결국 성장한다. 간단하지만 그 어떤 명제보다 중요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 분투한 이들의 다정한 시선을 전한다.
- 8년간의 원작 만
[피플] 소년만화적 승리와 패배의 미학, <하이큐!!> 편집자 혼다 히로유키, 이케다 료타, 아즈마 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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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올해도 어김없이 <씨네21>은 칸영화제 현장을 찾았다. 전 세계 영화인들과 언론인들이 모이는 칸에서는 공식 행사 외에도 다양한 일이 벌어진다. 올해는 칸 현지 소식을 좀더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지면보다 발 빠르게, 온라인에 칸영화제 소식을 먼저 전하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77회 칸영화제 기간 동안 <씨네21> 기자들의 일기장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예정이다. '77회 칸영화제 다이어리’는 영화제 개막부터 폐막까지 쭉 이어진다.
5월 15일 수요일 – 조현나 기자
상영 시간에 맞춰 극장으로 이동하거나 마켓을 구경하다 보면 한국 수입사 직원분들과 마주치곤 한다. 안부 인사를 나눈 뒤, 첫 질문은 대체로 정해져있다. “괜찮은 영화 좀 있으셨어요?” 수입사를 상대로 열리는 마켓 스크리닝과 기자들을 상대로 열리는 프레스 스크리닝은 서로 스케줄이 다르다. 때문에 관람한 작품이 잘 겹치지 않아 서로의 영화 리스트를 공유하곤 하는 것이다. 영
[칸 다이어리 2] 영화제 가면 배우들 실물도 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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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랫동안 스스로를 공작부인(工作婦人), 무언가를 만드는 여성이라 지칭했다. SNS 프로필에도 ‘궁극의 만들기 여자’라는 소개 문구를 오래 기입해두었는데 근래 ‘싱어송라이터’로 바꾸었다.
= 사실 계속 두고 싶었다. 그런데 SNS가 아티스트의 주요 PR 수단으로 자리하는 시류가 생긴 이후 ‘궁극의 만들기 여자’를 써놓은 게… 좀 아마추어 같았다. (웃음) 이젠 나도 멋있는 걸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바꾸었다.
- 히트곡인 <야상곡>을 포함해 이번 앨범의 <종언> <체취>와 같은 한자어 제목의 곡들의 표기 방식이 재밌다. 언급한 곡들은 포털사이트엔 한글로 표기되지만, 앨범 부클릿엔 한자로 제목이 쓰여 있다. 한자 표기의 즐거움이 있다면.
= 우선 자우림(紫雨林)도 한자고 내 이름도 한자다. 나는 윤리 윤(倫)에 나 아(我)를 쓴다. ‘윤’자엔 차례라는 뜻도 있다. 결국 내 이름은 ‘My turn’, 그러니까 내 차례란 뜻이다. (웃음) 한
[기획] 솔로 앨범 《관능소설》 발매한 김윤아 ③ 생을 살아야 음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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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세상의 모든 사랑을 테마로 한 <사랑의 형태>라는 콘서트를 연 적 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비롯해 사랑에 관한 여러 텍스트를 노래와 엮은 공연이었다. 이 공연이 사랑 노래를 엮은 《관능소설》의 탄생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을까.
= 사랑 노래를 채우기로 한 건 2010년 발매한 솔로 3집 《315360》부터다. 돌고 돌아 지금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기 좋은 때가 됐다. 거꾸로 《관능소설》같은 앨범을 만들고 싶은 갈망이 <사랑의 형태> 공연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2010년대 후반은 자우림에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던 터라 자우림에 집중하는 시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우림이 3인 체제가 된 후 나온 첫 앨범 10집 《자우림》(2018)은 굉장히 중요한 앨범이었다. 그리고 자우림의 11집 《영원한 사랑》(2021)이 나왔다. 요컨대 견고한 우리의 자우림을 보이기 위한 몇번의 쐐기가 필요했다. 또 자우림 결성 25주년을 맞
[기획] 솔로 앨범 《관능소설》 발매한 김윤아 ② 갈망이 낳은 글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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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도록 아름다운 자극.’ 이는 싱어송라이터 김윤아가 인터뷰 중 본인을 감화하는 예술의 공통점을 요약한 문장이지만, 그의 신보 《관능소설》에 대한 20자평으로도 손색없는 정리다. 김윤아가 자우림의 보컬이 아닌 솔로 뮤지션으로서 8년 만에 컴백했다. 김윤아의 5집 《관능소설》은 그가 오랫동안 자신의 약점이라 생각했던 사랑 노래로 충만한 앨범이다. 김윤아는 창작을 위해 수많은 멜로영화를 스스로에게 끝없이 쏟아부으며 대상 없는 연애에 젖어갔고, 덕분에 작정한 사랑 노래 모음집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김윤아는 ‘관능’의 사전 뜻풀이 중 첫 번째 정의를 꼭 짚고 넘어간다.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기‘관’의 기‘능’.” 그러므로 《관능소설》은 김윤아가 여성이자 예술가이며 시민으로서 생의 한가운데를 부단히 살며 날갯짓하는 여행기이기도 하다. 김윤아를 만나 《관능소설》과 앨범에 함께 담긴 에세이집 <관념산문>의 작업기를 물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를 존재하게 한 음
[기획] 솔로 앨범 《관능소설》 발매한 김윤아 ① 미치도록 아름다운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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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기적이고 근본적인 기술혁신이 벌어져서 산업 패러다임이 바뀔 때마다 ‘우리의 일자리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공포가 확산된다. 이에 대한 경제학 교과서의 표준적인 대답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에 가깝다. 새로운 기술이 확산되면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직업이 창출되므로 그쪽으로 노동력이 이동하면서 생산성은 계속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낙관주의의 논리에 별로 설득력을 느끼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주장에서는 그동안 역사적으로 시기마다 나타났던 상이한 기술적 혁신들의 상이한 특성들, 그리고 그것들이 긴 시간 동안 진화해온 패턴 등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기술혁신’이라고 다 똑같은 성격의 것도 아니며,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노동력, 즉 사람의 대체’도 항상 똑같은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기 중반 이후 현재까지의 기술혁신은 개인적 집단적 차원의 인간의 노동능력을 하나씩 하나씩 기계가 빼앗아가면서 무력화시켜왔던 줄거리를 가
[홍기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사람은 이제 퇴출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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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운동의 예술이다. 영화는 운동을 재현하는 권능과 운동의 중단을 경험하게 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영화 속 시간은 생략되고, 늘어나며, 분기와 도약 속에 되돌아온다. 말하자면 영화는 시간 경험의 촉매를 제공한다. 어떤 작품들은 역사적 시간이나 시간의 지각을 탐구하거나 표현하기 위해 때때로 정지상태의 달인인 조각을 향해 렌즈를 겨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대작 <레오파드>(1963)의 조각도 그중 하나다. <레오파드>는 가문의 내부, 개인의 내면 안에서부터 쇠락하는 세계 혹은 시대를 묘사한다. 비스콘티의 카메라는 우선 대저택의 영지 안으로 들어가고 이어서 가족 미사가 열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원작 소설에서 영지는 무성하게 자라, 뒤엉키고 썩어가는 식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비스콘티가 찍은 오프닝에서 영지 입구에는 대저택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여러 개의 토르소 조각상이 부산한 혁명의 기운과 건조한 바람 아래 요동 없이 도열해 있다. 단단한 돌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조각과 함께 찍기 - 비스콘티, 로셀리니, 고다르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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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이 곧 무기가 되는 삶. 누군가가 여기 존재한다는 단순한 현실이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이미지는 저항의 수단이 된다. 르포르타주는 사회적인 현실에 대해 보고자의 주관을 섞지 않은 객관적 서술과 그 자료들을 가리키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두운 이면을 탐사하는 이미지는 결코 객관적인 상황만을 보여주도록 길들여지지 않는다. 19세기 뉴욕 로어 이스트사이드를 촬영한 제이컵 리스의 사진은 단순히 빈민가의 실태를 알린다는 목적을 넘어 그 자체로 정치적 효과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둠으로부터 가려져 있는 것을 드러내려는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저항적인 성격을 띤다.
낸 골딘의 삶-투쟁을 다초점의 이미지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가 향하는 곳 또한 어둡고 눅눅한 암실이다. 70년대 뉴욕 바워리의 밤, 지하 클럽에 모여 취해 있는 사람들,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음악과 함께 슬라이드 쇼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사진에 등장한 자신
[비평] 암실, 영화, 그리고 몸에 남는 것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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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필요>에선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포착한 풍경 장면이 삽입된다.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 여자 이리스(이자벨 위페르)가 하루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짧은 연대기를 따라가면서 영화는 인물들이 헤어지는 구간마다 자연을 담아낸 무인의 숏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에 삽입된 풍경은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아 미묘하게 윤곽이 뭉개진 형태로 나타난다. 이 영화의 풍경은 흐릿하고, 흐릿한 풍경의 삽입은 세 차례에 걸쳐 반복된다. 특정한 순간에 초점이 맞지 않는 장면을 활용하는 선택은 거의 모든 장면을 초점이 나간 화면으로 구성한 <물안에서>의 일관된 구성보다 세밀한 의구심을 건넨다. 영화를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되묻자면, 왜 하필 풍경을 담은 장면만 흐릿한 모양으로 나타나는 걸까?
흐릿한 풍경의 숏은 영화의 전체 내러티브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독립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간직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특정 인물의 시점을 대리하
[비평] 흐릿함에 관하여, <여행자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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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는 말이 좋거나 훌륭한 느낌을 대리하는 속어처럼 쓰이기 시작한 시대에 <베이비 레인디어>는 적확한 수식어를 빼앗겨 억울할 법한 시리즈다. 4만1천여통의 이메일과 350시간 분량의 음성 메일을 보내고 라이브 공연의 훼방을 놓는 걸로도 모자라 부모까지 협박한 여자가 경찰의 제지로 마침내 인생에서 사라진 순간. 코미디언 도니(리처드 개드)는 삶에 “이상하고 섬뜩한 침묵”이 찾아왔다고 고백한다. 스토커 마사(제시카 거닝)의 부재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그는 산더미 같은 음성 메시지들을 주제별로 분류해 폴더로 정리(특히 ‘칭찬 폴더’가 유용하다)하는가 하면, 그녀의 사진을 들고 자위하기에 이른다.
<베이비 레인디어>를 보는 사람은 번번이 포식자의 먹잇감을 자처하는 주인공을 답답해하는 사람과 도니를 부정할 수만은 없는 심정으로 모종의 거울치료에 동참하는 이들로 나뉜다. 어리석은 주인공이 필요 이상으로 수난받는 서사의 대부분이 작가의 악취미이기 이전에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혼란으로 걸어 들어가기, 넷플릭스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