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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영화 시장의 시곗바늘이 과거로 향하고 있다. 지난여름부터 시작해 9월4일 <비포 미드나잇>으로 마침표를 찍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시리즈, 9월4, 11, 18일 순차 개봉한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삼부작, 에드워드 양의 <독립시대>와 장뤼크 고다르의 <국외자들>(9월25일),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10월2일)와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0월9일)까지. 이른바 명작들의 귀환이다. 제작 60주년 만에 국내 최초 정식 개봉(<국외자들>)하거나 30주년 재개봉(<세 가지 색> 삼부작) 등 기념할 만한 의미를 입은 것 너머로, 극장가에 과거의 영화들이 돌아온 현상의 배경과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클래식을 마주하는 세개의 다른 목소리도 한자리에 모았다. 정이현 소설가의 <비포> 시리즈의 추억이 담긴 에세이, 에드워드 양 감독 영화의 전편
[특집] ‘극장에서만 누릴 수 있는 희귀한 빛’, 과거의 명작들이 극장가에 돌아오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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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사북>
박봉남/한국/2024년/124분/한국경쟁
내레이터는 형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원도 정선의 사북을 방문한다. 동양 최대의 민영 탄광으로 알려졌던 동원탄좌가 위치한 사북은 1980년 당시 3천명이 넘는 광부와 그 가족의 생활 터전이었다. 매해 수백명의 광부가 사망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사측과 어용노조를 향한 광부들의 갈등이 고조되던 때, 노조 선거에서 지부장 교체와 임금협상에 실패하자 사북 사건 첫날의 기억이 시작된다. 광부들의 시위와 경찰과의 무력 충돌 이후 평범한 광부와 그 아내의 삶은 더이상 평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어른이 된 내레이터는 사북에 살았던 이웃 어른이자 항쟁의 생존자를 차례로 찾아간다. <1980 사북>은 살아남은 자와 그 가족의 증언으로 지난날의 기억을 서로 더듬으며 오래된 사진과 필름, 사료, 문건과 함께 다시 쓰인다. 사북 사건 당시를 떠올리는 경찰과 광부, 그 가족은 피로 물들었던 끔찍
[기획]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추천작 리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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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데이터의 축> The Axis of Big Data
저우타오/중국/2024년/58분/프런티어
중국 구이저우성의 데이터 센터 내부를 비추며 오른쪽으로 패닝하는 카메라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기계로 가득 찬 서버실의 삭막한 풍경을 뒤로하고 녹음의 자연 풍광이 펼쳐진다. 중국의 시각예술가 저우타오의 연출에서 돋보이는 점은 카메라의 역할이다. 카메라는 풍경 자체를 바라보기보다는 그 안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탐정 같다. 그 과정에서 포커스 아웃이 되며 선명했던 이미지는 어느새 흐려진다. 영화는 제목처럼 데이터 센터를 축으로 삼아 360도 회전하며 감상하는 VR 영상처럼 보이는 감각적인 풍경 영화다.
<자살시도 두 시간 전 담배 피는 영상>
권지윤/한국/2024년/125분/한국경쟁
권지윤 감독은 첫 번째 자살 시도 때 기록한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한다. 이 영상이 알고리즘을 타면서 감독은 영상에 달린 댓글에 충격을 받
[기획]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추천작 리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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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경작하다> Farming the Revolution
니쉬타 자인, 아카시 바수마타리/인도, 프랑스, 노르웨이/2024년/105분/개막작, 국제경쟁
아직 코로나19가 세계 곳곳을 휩쓸던 시기. 인도 정부가 농업개혁법을 제정하고, 농민들은 물론 모두가 공멸할 것임이 틀림없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50만명이 넘는 국민이 집결한다. 대규모 시위대가 결성되자 정부는 물대포와 가스탄을 동원해 진압하지만, 성별과 계급, 연령과 직업 등을 불문하고 한데 섞인 불씨가 금세 고요해질 리 없다. <혁명을 경작하다>는 집회 현장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이 법안의 시행과 철폐까지의 긴 여정을 소상히 살피는 다큐멘터리다. 농민이 가장 많은 국가로 알려진 인도에서 이 시위는 가히 혁명이었다. 수도 뉴델리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들고일어났고, 동질의 고통을 공유하는 이들의 연결은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낮에는 트랙터를 탱크 삼아 전진하는가 하면, 밤에는 생일 케
[기획]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추천작 리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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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9월26일부터 10월2일까지 주 상영관인 메가박스 킨텍스와 롯데시네마 주엽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에서 영화 상영 및 각종 행사를 진행한다. 경쟁부문인 국제경쟁, 한국경쟁, 프런티어 섹션과 비경쟁부문인 베리테, 다큐픽션, 에세이, 익스팬디드, 기획전 섹션에서 총 43개국 140편(장편 80편, 단편 60편)을 상영한다. <씨네21>은 개막작 <혁명을 경작하다>를 위시한 경쟁부문의 선정작 위주로 올해의 추천작 10편을 소개한다. 추천작 외에도 작금 다큐멘터리영화의 최전선에 있는 수많은 작품과 한국 비디오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를 조명한 ‘연대의 연대기: 한국의 미디어 액티비즘’ 등 3개의 기획전, 도심의 백화점 레이킨스몰에서 열리는 ‘비(非)극장 상영 프로그램’까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언제나 그랬듯 다양하고 단단한 영화제로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추천작을 소개합니다.
[기획] 다큐로 만나는 우리, 오늘 -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추천작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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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의 작품 중 단연 대화의 영화라 부를 만한 <독립시대>는 1990년대 대만 문화산업의 최첨단에 있는 사람들의 소동을 따라간다. 재벌집 딸 몰리, 그의 친구이자 비서인 치치를 중심으로 제작자, 투자자, 연극연출가, 소설가, 아나운서 등이 끊임없이 관계를 번복해나간다. 이들의 갈등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도대체, 새로운 대만(신타이베이)에 걸맞은 가치란 무엇인가. 도시의 마천루에 곧잘 머무르는 영화는 자본주의적 부조리를 관조하면서 부유층과 예술가들의 허위를 희극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연대를 통해 자기소외를 극복해나가는 이들을 낭만적으로 긍정한다. 결국 <독립시대>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시대로부터 결코 깨끗이 독립할 수 없는 이들이 느끼는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직시하면서 <하나 그리고 둘>로 나아가는 과정의 움직임이다. 1994년작을 30년 만에 처음 마주하는 관객들에겐 당대에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던 퀴어적 요소 또한 새로운
[리뷰] 도시의 비극을 포착하는 에드워드 양의 희극과 낭만, <독립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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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비와 친구들은 거울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미러’를 마주친다. 미러는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마법의 일곱 빛깔 카네이션을 친구들에게 소개한다. 한편 마법의 카네이션을 독차지하려는 못된 마법사는 부하들을 보내 미러의 꽃을 빼앗으려 한다. 호비 일행은 각자의 소중한 가족들과 나누고 싶은 행복을 떠올리며 마법의 카네이션이 피는 기적의 섬으로 떠난다. <호비와 마법의 카네이션>은 1991년부터 방영된 일본의 인기 교육 애니메이션 시리즈 <내 친구 호비>의 극장판이다. 유아용 교육 콘텐츠라는 목적에 맞추어 어린 시청자의 적극적인 참여와 호응을 독려한다. 다만 대상층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간소하게 꾸려진 이야기에 다양한 세대가 함께 공감할 여지는 적다. 2020년부터 극장판 시리즈에 도입된 풀 CG애니메이션도 호비 특유의 평면적 캐릭터디자인의 매력을 반감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리뷰] 아이들에게 손 내미는 꼬마 호랑이, 흥미보다 참여를 우선시 한다, <호비와 마법의 카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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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구마사제인 패트릭(더그 브래들리)은 라울(빅터 마라나)과 의사 올리비아(카일라 필즈)와 함께 악마가 들린 소녀 헉슬리를 구하려 24시간 동안 진행되는 퇴마의식에 임한다. <엑소시스트: 더 데빌>의 원제는 <엑소시스트>(1973)의 원제 끝에 s자를 더한 ‘The Exorcists’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엑소시스트>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그 명성에 무임승차하는 영화로 보인다. 우선 한편의 영화라고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완성도가 부족하다. ‘왜 퇴마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생략한 채 곧장 퇴마의식을 행하는 전개를 선택한 탓이다. 또한 영화엔 맥락 설명이 전무해 감정을 이입할 여지가 적다. 퇴마 중에도 경문을 매뉴얼 읽듯이 말하는 배우의 기계적인 연기도 몰입을 방해한다. 템포는 느리며 모든 상황이 대사로 전달돼 지루함을 유발한다. 크리처 디자인도 <엑소시스트>를 재탕한 수준이고 엑소시즘과 좀비 장르를 섞은 설정도 설득력이 없어 무리수
[리뷰] 퇴마의식을 거행할 때마다 <더 룸>을 보는 듯한 낯부끄러움, <엑소시스트: 더 데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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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절의 시대다. 인간관계에서 불편한 타자를 가차 없이 차단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그들과 공존해야 하는 상황은 찜찜함을 넘어 모종의 공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스픽 노 이블>은 바로 그 공포를 겨냥한다. 전형적인 중산층인 벤(스콧 맥나이어리) 가족은 휴가지에서 패디(제임스 매커보이) 가족을 만나 친구가 된다. 패디 가족은 벤 가족을 시골에 있는 저택에 초대한다. 벤의 아내 루이스(매켄지 데이비스)는 채식주의자인 자신에게 고기를 먹이는 등 악의는 없어 보이지만 무례한 패디의 행동에 계속 불편함을 느낀다. 영화는 시골과 문명사회의 가치관 충돌을 그려낸 포크 호러의 공식을 영리하게 뒤집는다. 난민과 하층민 등 타자를 보는 서구 중산층의 불안감을 도발적으로 그린 초반부가 특히 독창적이다. 사실적 액션과 원맨쇼에 가까운 제임스 매커보이의 호연이 눈길을 사로잡지만, 이에 비해 빌런의 설정에 구멍이 많다는 단점이 더욱 눈에 띈다.
[리뷰] 손절과 안온다정함에 대한 현대적 우화와 블룸하우스 호러 사이의 불협화음, <스픽 노 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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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중공업 대리인 준희(장성범)는 인사팀에 발령된 후 구조조정 업무를 맡는다. 150명의 해고자를 추리는 과정이 내킬 리 없지만 회사를 위한 일이란 생각에 인사팀은 신속하게 일을 진행한다. 회사의 의견을 잘 받아들일 직원을 근로자 대표로 선발한 뒤 해고 대상자 선발 기준을 세우려 하지만, 사태를 파악한 또 다른 직원들이 반발하고 나선다. <해야 할 일>의 화자는 해고 당사자가 아닌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실무자다. 직접적인 실행자이자 관찰자로서 준희는 상황을 폭넓게 살핀다. 그의 눈을 통해 본, 영화가 그리는 구조조정의 핵심은 회사와 직원간의 싸움이 아니며 결국 직원들 사이의 갈등만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스템상의 문제는 그대로지만, 이 상황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다루거나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은 채 현실감 있게 전달한 것이 <해야 할 일>의 미덕이다. 박홍준 감독이 조선소 인사팀에서 4년간 근무한 실제 경험담이 반영됐다.
[리뷰] 불온한 시스템 아래 인간의 존엄 따윈 얼마나 미력한가,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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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속밴드를 만들어 첫 라이브 공연을 마친 기타리스트 고토 히토리(아오야마 요시노)와 멤버들은 다음 무대로 히토리가 다니는 고등학교 축제의 공연을 결정한다. 처음엔 많은 관객 앞에 서기를 꺼렸던 히토리지만, 다른 선배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보고 난 뒤 용기를 얻게 된다. 그렇게 오른 공연 무대엔 예상보다 더 많은 관객의 호응이 따르고 이에 흥분한 히토리는 뜻밖의 기행으로 무대를 마친다. <극장총집편 봇치 더 록! 전편>에 이어서 12부작 TVA <봇치 더 록!>을 재편집한 극장판이다. 원작의 9~12화 주요 부분을 정리했다. 작품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고등학교 축제 시퀀스에 큰 힘을 들였다. 하지만 일상 이야기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적절히 추가된 O.S.T와 합리적인 몽타주 편집으로 인해 TVA 재편집의 별다른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TVA와 조금 다르게 꾸려진 결말 역시 극장판만의 감동을 느끼게 한다.
[리뷰] 이질감 없이 매끄러운 재편집, 이야기는 덜고 음악은 많이, <극장총집편 봇치 더 록! 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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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앨범을 내고 홀연히 사라진 싱어송라이터 터커 크로우(에단 호크). 애니(로즈 번)는 그를 광적으로 추종하는 던컨(크리스 오다우드)과 권태로운 생활을 보내는 중이다. 자신보다 록스타가 우선인 남자 친구에 대한 질투였을까. 애니는 던컨이 운영하는 팬카페에 그의 우상을 비판하는 글을 게시한다. 매서운 혹평에도 가식적이지 않은 태도가 마음에 든 터커는 곧바로 인터넷 속 익명의 그녀에게 연락을 건넨다. 15년을 함께한 연인이 바람 피운 사실을 알게 된 여자. 무성한 소문과 달리 알코올중독으로 허송세월을 보낸 남자. 두 사람 사이에 진실한 대화가 오가고 마침내 그들은 런던에서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약속한다.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산뜻한 템포가 영화를 감싸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위로를 건넨다. 성숙하고 여유로우며 때로는 발칙한 <비포> 삼부작의 대화가 그리운 관객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영화다.
[리뷰]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계속해서 뒤돌아보는 당신에게, <줄리엣, 네이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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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부산대학교 최초의 페미니즘 축제 ‘마녀들의 카니발’이 개최되기 전. 일찍이 부산을 터로 삼고 여성 권리 신장 운동을 전개해온 선배 마녀들이 있었다. 옛 동지의 부름에 모인 노동운동가 6인은 근로기준법 교육과 사회운동 조직화의 거점이었던 1988년 ‘부산근로여성의집’ 시절을 회상한다. 1세대 여성주의자들의 투쟁은 부산여성장애인연대 설립, 완월동 성 착취 반대 운동, 대학 내 반성폭력 학칙 제정 운동, 청소년 ‘스쿨미투’로 이어지며 40년 부산여성운동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전설의 여공: 시다에서 언니되다>(2011)에서 여성 구술 생애사의 영상화를 시도한 바 있는 박지선 감독이 구술과 채록 기법을 다시 한번 적용했다. 관객이 마음을 주고 따라갈 주인공 격 사건과 인물이 부재하다는 한계가 명확하나 부산, 여성, 그리고 사회운동을 키워드로 엮어낸 주제에 대한 교육적 열망을 일정 부분 충족시킨다.
[리뷰] 가부장제 심은 곳에 페미니스트 난다, <마녀들의 카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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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 유명 팝스타의 콘서트장을 찾은 다정한 아버지 쿠퍼(조시 하트넷). 인파 속에서 딸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그는 콘서트장 일대에 배치된 특수부대와 경찰 인력을 보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친근함을 무기로 관계자에 접근해 알아낸 사실은 이 모든 상황이 12명을 토막살해한 연쇄살인마 ‘도살자’를 잡기 위한 덫이라는 것. 쿠퍼가 바로 그 도살자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을 수 없다. 그는 필사의 탈출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연출한 <트랩>의 주인공은 살인마다. 평범한 인물이 수세에 몰렸을 때 느끼는 공포 심리가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 처한 악인이 어떻게 난관을 돌파할지를 보며 관객은 중심인물에 어디까지 공감하고 몰입할지를 시험당한다. 예측할 수 없는 중반의 국면 이후 전개는 여러 번 방향을 뒤튼다. 팝스타와 팔로워, SNS 라이브, 살인마와 프로파일러, 정신분석학과 무의식을 잠식한 환영의 요소가 잘 버무려진 스릴러다.
[리뷰] 정작 자신은 해방시키지 못하는 출구의 아이러니, <트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