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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기록,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의 기억
송경원 2025-09-12

기록이 수렴하고 기억은 발산한다. 기록은 기록자가 택한 형태로 고정되기 마련이다. 이때 기록의 대상과 내용만큼 중요한 건 기록이 새겨질 방식이다. 종이에 쓰는 것부터 시작하여 영상으로 남길 수도 있고, 때론 공간이 직접 기록의 매개가 되기도 한다. 기록이 기록자의 입장을 진하게 반영한다면, 기억은 받아들이는 쪽의 태도에 따라 매 순간 달리 발현된다. 우리는 기억이 과거의 것이라 여기지만 실은 기억이란 언제나 현재형이다. 기억을 ‘한다’는 건 과거를 지금 이 순간과 연결시켜 대화를 나눌 초대장을 보내는 것과 같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영화의 역사는(정확히는 다큐멘터리의 역사는) 기록과 기억 사이를 오간 궤적의 산물이다. 다큐멘터리사(史)를 논할 때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의 첫손가락은 주저 없이 프레더릭 와이즈먼이다. 이유야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차고 넘치지만 무엇보다 카메라라는 영화 장치로 현실의 몽타주를 담아낸 작가적 일관성 면에서 독보적이다. 그리하여 1967년부터 지금까지 45편의 장편영화를 만든 그의 행보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기능한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영화는 이미 여러 차례 상영되어 익숙할지 모르지만 45편 모두를 차례로 트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게 중요하다. 다이렉트 시네마로 대표되는 와이즈먼의 방식은 지나갈 것에 대한 기록과 보존이 아니라 매번 상영되어 관객을 만날 때마다 현재로 거듭나는 기억의 정수라 할만하다. 덕분에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작품은 만나는 순서, 방식, 장소, 상황에 따라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선택과 배열을 통해 비로소 발현되는 기록들. 아마도 영화가 영원이 되는 대표적인 비밀중 하나. 나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익숙하지만 또 새로울, 낯선 얼굴의 프레더릭 와이즈먼을 만날 준비를 마친다.

충무로역 내 번잡한 인파 한가운데, 쉼터처럼 자리한 영상센터가 있다. ‘오!재미동’을 알게 된 지는 한참이지만 웬일인지 아직도 이름이 입에 잘 붙지 않았다. 갓 영화평론상을 받고 활동을 시작할 무렵 우연한 기회로 이곳에서 작은 토크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고, 그게 벌써 13년이 넘었다. 원래 한번 엉덩이를 붙이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소 같은 성격이라 그랬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긴 시간 나를 허락해준 이 장소에 애틋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지금도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모두의 공간은 세월과 경험의 먼지가 쌓여 어느덧 (내게 있어) 대체 불가능한 장소가 되었다. 자신의 기억이 곳곳에 묻어 있는, 외장메모리 같은 장소가 있다는 건 꽤 감사하고 축복받은 일이다.

오!재미동이 곧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곧 건립될 서울영화센터에 편입되지 않고 그냥 없어진다고 한다. 복잡한 사정은 차차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때때로 내가 그곳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장소가 우리를 기록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목적 지향으로 살아가는 데 길들여진 한국 사회는 그런 장소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 지나치게 인색한 것 같다. 순화해서 낯설고 쑥스러워서 그렇다면 이젠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사라지는 것들을 이대로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도록, 시간이 점이 아니라 범위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장소에 쌓이는 여정을 허락하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 기억으로 연결될 접점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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