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사전심의는 위헌이라고 일러줬지만, 가위든 자들은 귀머거리였다.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가 “동성애를 주제로 한 영화”라는 이유로 수입되지 못했고,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는 “아이 아버지 이름은 김영삼”이라는 대사를 자진 삭제한 다음에야 개봉이 가능했다. <나쁜 영화>도 지루한 싸움 끝에 두 장면을 직접 걷어내고 극장에 걸렸고, <억수탕>은 곳곳에 ‘보카시’ 처리를 해야 했다. 새 영화진흥법이 발효되고 공륜을 대체한 공진협이 10월부터 심의 업무를 떠맡았지만 수십년 버릇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11월5일, 서준식씨는 제주 4·3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혐의를 받아 체포됐다. 알아서 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삼성이 주최한 제2회 다큐멘터리영상제에선 중국과의 무역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주최쪽의 판단에 따라 개막작 <태평천국의 문> 상영을 취소했고, 이에 따라 프로그래머들이 행사 직전 사퇴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대기업의 ‘가위 쇼’는 끝이 없었다. 방한한 뤽 베송이 <제5원소>의 일부 장면이 삭제된 것을 알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출국했고, 그런 뤽 베송을 달래기 위해 삼성은 <마지막 전투> <서브웨이> <아틀란티스> 등 흘러간 영화 3편의 판권을 사들이는 촌극을 연출했다.
1997년의 영화
눈물의 제왕_<편지>
기획에만 3년을 공들인 최루성 멜로영화. 개봉 주말 이틀 동안 서울시내 15개 극장에서 5만 관객을 동원하며 “제2의 <접속>이 될 것인가” 하는 기대를 부풀렸다. <편지>는 해를 넘겨 3개월 이상 상영됐고, 서울에서 72만4747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영화 기획에 있어 ‘혁명가 혹은 개척자’라 불렸던 신씨네 신철 대표에게 당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빚 탕감인 듯 보인다. 그는 흥행으로 빚을 어느 정도 갚았지만, “한국영화의 수준을 몇년 뒤로 후퇴시킨 영화”라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개봉 직전 전국 1천여 우체국에 <편지> 포스터를 붙이고, 엽서를 배포하는 등 이벤트 마케팅이 돋보였다.
나쁜 영화, 나쁜 감독?_<나쁜 영화>
장선우 감독은 ‘나쁜 감독’인가? 이슈메이커 장선우 감독의 신작 <나쁜 영화>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섰다. “오럴섹스, 윤간, 폭력 등 문제장면을 포함하고 있어 등급을 부여할 수 없다”는 공륜의 입장에 <나쁜 영화> 제작진은 문제시된 여섯 장면 중 두 장면을 잘라 개봉했다. 본드 불고 섹스하는 10대들의 삶을 가감없이 담겠다던 그의 의도는 개봉 전후 외려 아이들을 이용했다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굳이 구체적인 장면을 연출했어야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구체적인 장면이 아니면 추상적인 장면으로 보여주나?”라고 반문했다. 작가주의냐, 선정주의냐는 영화계 찬반 논쟁도 거셌다. 개봉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아선지 1주 동안 6만7천여명의 관객을 모았지만 총관객은 13만8604명에 그쳤다.
TREND
표절 시비
<체인지>는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했다는 사실을 숨겼다가 표절 의혹을 받았다. 김의석 감독의 <홀리데이 인 서울>은 ‘왕가위에 대한 성의없는 오마주’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접속> 또한 일본영화 <하루>와의 유사성이 제기됐고, <올가미> <편지> 등도 일본영화 표절 도마에 올랐다.
영화음악 시대가 열리다
<접속> O.S.T의 성공은 주제가 한곡 달랑 담은 한국 영화음악의 암흑시대에 종말을 고했다. 사라본의 <러버스 콘체르토>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페일 블루 아이스>를 앞세운 <접속> O.S.T는 복고풍 컴필레이션 음반의 유행과 맞물려 1997년에만 60만장 가까운 판매고를 기록했다. <샤인> <트레인스포팅> <해피 투게더> <로미오와 줄리엣>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의 O.S.T가 줄줄이 쏟아졌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직배사 파워 앞에 대기업 휘청
1달러가 800원이던 시절. 마케팅 비용까지 포함해 100만달러짜리 외화가 본전을 건지려면 적어도 서울에서 10만명 이상의 관객을 거둬들여야 했다. 1997년의 승자는 외화수입에 진력한 대기업이 아니라 직배사였다. <제5원소>(삼성영상사업단), <피스메이커>(CJ엔터테인먼트)를 제외하고 직배사 영화들이 외화 관객동원 10위까지 모조리 차지했다.
충무로, 창투사에 적극적 구애
일신창업투자의 <은행나무 침대>의 성공 이후 충무로에서 적지 않은 전주 역할을 한 창투사. 그러나 <용병이반> <영웅의 이름으로> 등이 줄줄이 실패하자 창투사들은 “돈 대고 욕먹을 수 없다”며 철수할 분위기였다. 창투사를 향한 제협의 조직적인 프로포즈가 터져나왔던 것도 이 무렵. 대기업이 영화사업에서 슬슬 발을 빼던 차에 창투사마저 충무로를 외면한다면 제작자본이 마를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승희 신드롬
<플레이보이> 자매지인 <란제리> 표지를 장식한 한국인 누드모델 이승희의 방한은 상업주의 언론의 극성과 맞물려 기이한 신드롬을 낳았다. 프로의식으로 무장한 페미니스트, 국위를 선양한 애국자라는 찬사가 따라붙었고, 이승희는 금의환향 일주일 동안 영화 출연료 2억7천만원을 포함, 수억원의 수익을 챙겨 돌아갔다.
1997년 흥행 5걸
(당해 개봉작, 서울 기준, 단위: 명)
1. <쥬라기 공원2: 잃어버린 세계> 100만1279
2. <콘 에어> 97만9100
3. <제5원소> 85만7752
4. <페이스 오프> 71만6107
5. <접속> 67만4933
<편지> 72만4747(98년 이월작)
NUMBER
59 한국영화 제작편수
16.8 전년도 대비 한국영화 시장 매출 신장률(%)
25.5 한국영화 시장점유율(%)
15 <산부인과> 촬영일수. 보름에 OK, 박철수식 영화찍기
359 제1회 <씨네21> 시나리오 공모 출품작 수
5,000,000 삼성영상사업단, <제5원소> 수입가(달러)
200,000 <은행나무 침대>의 홍콩 판권 수출가(달러)
7448 할리우드의 노랑나비 이승희와의 채팅을 위해 남정네들이 1시간 동안 천리안에 접속한 횟수
CHARACTER
“배, 배신, 배반형이야”_<넘버.3>의 조필
한국 복싱이 잘 나가다 왜 갑자기 나락에 빠졌는지 아는가. 현정화가 중장거리 육상선수로 변신한 게 언제인 줄 기억하는가. 잠자는 개한테는 왜 햇볕이 비추지 않는지 궁금한가. 하늘색이 말 한마디로 빨간색으로 변한다는 마술은 어떻게 부리는가. 궁금하다면, <넘버.3>의 조필에게 물어보면 된다. 한 가지 주의할 점. 토 달면 안 된다. 배반형으로 낙인 찍힌다. 그리고 즉사한다. 폭포수 같은 침을 튀기며 최배달 선생을 회고하고,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던 조필은 캐릭터 열전이라 할 만한 <넘버.3>의 스타 중 한명에 머물지 않았다. 개인기를 갖춘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그의 흉내를 내기 바빴고, 그럴수록 송강호의 주가는 상승곡선을 탔다. 마동팔 검사 역을 맡은 최민식이 가장 하고 싶었다는 역도 바로 조필이다. 하긴 배우라면 누군들 탐나지 않겠는가.
말, 말, 말
“문화예술산업을 진흥시키려면 적극적으로 도와는 주면서 간섭하면 안 돼요. 안 도와주면 약하니까 못 일어서고 또 간섭하면 창작물이 제대로 안 나오니까요.”(대선출마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손을 입가에 갖다대며 은밀한 어조로) 남자들을 나쁘게 그릴 수는 없지 않은가.”(김기영 감독, 여자를 악녀로 그리는 건 무슨 이유냐고 묻자 농담)
“걔(성룡)가 하는데 내가 왜 못해?”(박중훈, 첫 할리우드 출연작 <아메리카 드래곤> 촬영현장에서)
“원래는 안 그랬는데 살이 찌더니 목소리도 변하더군요. 바지를 지금은 36을 입지만 원래는 28이었거든요.”(차승재, 저음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하자)
“원시 태동기의 단군은 선비풍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누구나 옷을 벗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은 사회였다.”(만화가 이현세, <천국의 신화>의 음란성 논란과 관련하여)
“(자기 손으로 가슴을 받치며) 보다시피 내가 가슴이 좀 크다. 그러니까 ‘젖소부인 바람났네’라는 제목은 문제가 없다. 다른 비디오 영화 제목들이 더 문제다. <만두부인 속 터졌네>에는 만두가게 주인공이 여주인공으로 안 나온다.”(진도희, 에로비디오의 어이없는 제목에 관해 묻자)
PEOPLE
문학적 영화작가 등단하다_이창동
영화감독으로의 전업은 성공적이었다. “흥미로운 행간을 지닌 분명한 줄거리, 강렬한 감정적 가치들, 뛰어난 출연진에 연기 공간을 활짝 열어주는 복잡미묘한 인물성”을 갖고 있다는 토니 레인즈의 말처럼 데뷔작 <초록물고기>는 그가 만만찮은 내공의 이야기꾼임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올해의 영화로 뽑힌 직후 그는 <씨네21>에 “좋은 점보다 거슬리는 게 많아 거북했다”는 말로 소감을 밝혔지만, 그건 신인감독의 겸손이라기보다 작가로서의 욕심에 가까웠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소설가로서 인정받을 무렵, 느닷없는 방랑기는 그를 <그 섬에 가고 싶다> 연출부 생활로 밀어넣었다. 마흔넷에 메가폰을 잡게 된 그의 등장을 두고 “경제공황의 시기에 당연히 정리해고감인 44살 중늙은이의 저력을 보여주었다”는 농담이 나왔지만, 이후 그의 깊고 너른 행보는 그런 세평을 훌쩍 뛰어넘었다.
‘영화배우’_전도연
<접속>의 ‘여인2’는 전도연에게 영화배우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1996년 KBS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로 얼굴을 알린 전도연은 <접속>으로 충무로에 사뿐히 안착했다. “분위기와 이미지를 대단히 잘 살렸다”는 호평들이 통신을 도배했다. 전형적인 장르영화 안에서 소진되지 않고 전도연은 자신의 개성적인 인상을 단단히 심었다. 정작 자신은 첫 인터뷰에서 그 공을 인형과 소품들까지 촬영장으로 옮겨놓은 장윤현 감독과 스탭들의 세심한 배려에 돌렸지만. 질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접속>은 이듬해 <약속>으로 이어졌고, 관객이 멜로배우라는 낙인을 찍을 무렵, 전도연은 <내 마음의 풍금>(1998)의 꼬질꼬질한 17살 소녀 홍연이로 다시 태어난다. 심은하, 고소영 등과 함께 1990년대 후반 여배우 트로이카 체제를 가동시켰던 그녀는 이제 홀로 남았으나 여전히 건재하다.
월력
1월 <체인지> 성공으로 방송사들 영화제작 타진 <에비타> 입장료 7천원 인상하려다 PC통신 비난 여론으로 결국 포기 동숭아트센터와 <씨네21>, 김기영 감독을 필두로 한국영화회고전 시작
2월 덩샤오핑 사망 <인샬라> 베를린영화제 비경쟁 부문 진출 탤런트 박규채, ‘낙하산’ 타고 영화진흥공사 사장 되자 영화계 강력 반발 스크린쿼터 감시단, 96년 하반기에만 41건의 위반 사례 적발
3월 <인샬라> 흥행실패로 제이콤 제작 축소 최민수 시리즈 유행 대우, 플레이보이 채널 방영하려다 비난 여론 때문에 계약 백지화 <하이눈> <지상에서 영원으로> 프레드 진네만 타계 최야성 감독, 배급자 나서지 않아 <로케트는 발사됐다> 무료 상영
4월 대법원, 전두환씨 무기징역, 노태우씨 17년형 확정 <잉글리쉬 페이션트>, 69회 아카데미영화제 9개 부문 석권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 성황리에 폐막
5월 내무부, 극장 10개 중 6개는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조사 발표 홍상수 감독의 두 번째 영화(<강원도의 힘>) 주연공모 대기업의 외화사기 경쟁 위험 수위 이르렀다는 지적 나와 <꽃잎>, 방영불가 판정 <체리향기>,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6월 <내게 거짓말을 해봐> 작가 장정일, 반성의 기미 보이지 않는다며 법정구속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 방송불가 판정
7월 홍콩, 중국 반환 무너졌던 성수대교 재개통 영진공, 한국은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들의 11번째 시장이라고 발표 20여명의 무술감독들 모여 <고수> 제작 발표
8월 제1회 부천국제영화제 개최
9월 김수용 감독 한·일 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 일본영화로 분류돼 국내 개봉 어려움 <비트>, 비틀스 노래 <렛 잇 비> 무단사용했다 3천만원 지불 <마리아와 여인숙> 만든 선익필름 부도로 충무로에 위기감 증폭 퀴어영화제, 공륜 심의 문제로 무기한 연기.
10월 인권영화제 집행위원 11명,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긴급체포 남대문극장, 에로영화전용관으로 변신 개관 DJ, 영화정책공약 발표 제1회 <씨네21>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인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 제작발표회
11월 DJP 연합 일신창투, <할렐루야> <접속> 등 한국영화 투자에 이어 외화 수입도 추진
12월 김대중 후보 대통령 당선. 50년 만에 야당 대통령 탄생 <인디펜던스 데이> 비디오 시장도 석권 영화계 IMF 한파. 인원 감축하고 외화수입 축소 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