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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목숨, 멈춤, 격렬, 주먹, 눈빛, 뜨거움, 피. 최영의 혹은 최배달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최배달은 일제시대 비행사가 되고 싶어 일본에 건너가 소년항공학교에 다니다가 미군이 진주한 뒤 야쿠자 보스의 보디가드가 되기도 했고, 입산 수련 뒤 전일본공수도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했으며, 실전공수를 내세우며 전국의 가라테 도장을 순례하며 강자를 격파하기도 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최고의 파이터들과 자웅을 겨루었으며,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 극진가라테라는 새로운 유파를 만들었던 ‘남자’다. 남자를, 여자를 운운하는 것은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20세기의 수식어처럼 보이지만, 최배달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단어는 바로 ‘남자’다. 그래서 그의 삶은 뜨겁고, 늘 목숨을 건 위기의 순간이며,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고, 움직임과 멈춤의 앙상블을 조율해야 한다.남성들 사로잡은 영웅의 일대기매력적인 텍스트인 최배달의 삶은 여러 번 만화로 각색되었는데, 기억할 만한 작품은 모두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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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절묘하게 불편한 제목이다. 불편해서 절묘하고 절묘해서 불편하다. 그런데 이 시집 24쪽 <행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끝없는 행려(行旅)가 있을 뿐 돌아갈 곳이 없다/ 컨테이너 박스 안을 둥구는 재고가 된 옷보따리와/ 그 곁의 새우잠처럼’(<행려> 중 ) 그리고 단 4쪽 뒤에 하나 더. 이번에는, 아예 시 첫머리다. ‘그 단칸방에도 몇번쯤 봄눈이 내렸을 것이다// 모가지를 뚝 뚝 떨구어내는/ 낙숫물 소리// 그리고 겨우내 수척해진 몸을 부르르 떠는 전봇대 몇 그루’(<봄빛> 중)….궁상은 물론 가난 자체를 넘어, 마치 가난의 뼈를 깎는 듯한 비참이 이리 절묘하게 서정-풍경화한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정말 아름다움이 불편하고 불편함이 절묘하고 절묘함이 다시 아름답고 불편하다.박영근은 1979년 데뷔한 이래(그러니까 나보다 문단 데뷔 1년 선배다) 노동(운동)현장을, 그리고 노동자의 삶을, 희망과 절망을, 그리고 전망을 줄기차게
박영근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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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생각하면 너바나(Nirvana)라는 ‘현상’은 마치 화염방사기처럼, 듣는 이를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덮치고 지나가버린 그 무엇이었다. 록 장르가 말초신경을 간질이며 돈을 갈구하는, 약간 더 하드한 ‘팝송’으로 귀결되었다고 누구나 여기던 1990년대 초반, 너바나(와 시애틀의 그런지 동료들)는 돌연 록을 ‘순수함’의 고갱이로 바꿔놓았다. 이들의 노래는 염증나는 세상에 대한 자기 파괴적 분노로 가득 찬 ‘저항 음악’이었다. 록 음악에서 저항은 1970년대 중반 펑크 록을 끝으로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체념했던 팬들을 완전히 압도한, 예기치 못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음악을 기존의 활력없던 록 신을 완전히 ‘대체’한다는 뜻의, 얼터너티브 록이라 불렀다.<Nevermind>로 점화된 너바나의 신화는, 그러나 돌연 끝나버리고 말았다. 리더 커트 코베인의 자살(1994년 4월5일) 때문이었다. 스타덤을 못 견딘 자기 파괴의 욕망이 일차적인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너바나 베스트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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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좋아>는 어떻게 보면 노년에 만나 정열적인 사랑에 빠진 두 노인의 섹스일기이다. 두 노인의 사랑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열렬하며, 서로의 몸에 대한 탐닉 역시(특히 횟수) 젊은이들 뺨친다. 다큐멘터리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극영화이기도 한 이 영화가 표방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수법은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다. 섹스를 하고 있는 노인들의 실물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관객은 그 능숙하지 않은, 영화적으로 길들여져 있지 않고 유연하지도 않은 노년의 몸들이 뒹구는 장면 자체를 메시지 이전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 그로테스크한 현실은 하이퍼 현실이고, 우리는 어떤 표본실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사랑의 보편성, 혹은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몸의 보편성 같은 전언이 이 영화의 테마일 수도 있지만 정작 그 ‘몸’ 자체가 테마다.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몸들의 살아 꿈틀대는 실물감이 먼저 다가온다. 이 영화는 그러한 실물감을 내러티브나 메시지보다 우선시한 한국 초유의 영
목구멍 소리 그대로,하시게 <죽어도 좋아>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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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꺼내놓고 그림을 그리기 전 선생님은 “노란 크레용으로 본을 떠라”고 하셨다. 가끔 검은 크레용으로 밑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은 혼이 나곤 했다. 검은 선 테두리는 일종의 금기였다.지난 6월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가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홍익대 황선길 교수는 수상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만화는 선의 예술이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선 대신 면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검은 선 없이 색으로만 구분한 것이지요. 이런 독특한 형식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게 아닐까요.”선이 잘 드러나지 않는 작품의 특징은 부드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잔잔한 얘기를 꾸려나가는 데 적당하다. 이런 스타일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 <파워 퍼프 걸>이다. 귀여우면서도 무지막지한 세 꼬마소녀들의 힘은 두툼한 검은색 테두리로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가끔 TV에서 이 작품을 볼 때 왠지 모르게 갑갑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내 무의식 속에
유연한 테두리,<이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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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주는 만화 대상순수하게 독자들로 투표인단이 구성되어 최고의 만화에 상을 주는 ‘독자 만화 대상’이 만들어진다. 만화비평 웹진 <두고보자>, 만화비평 모임 ‘올쏘’, 만화검열 반대모임 ‘자유의 검은 리본’ 등 만화 커뮤니티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 중인 이 상은 최근 공식 홈페이지(www.comicreader.org)를 개설하고 만화독자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출판 만화 대상’, ‘오늘의 우리 만화’ 등 정부기관이 시행하고 있는 만화상들이 독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만화잡지의 공모전 역시 출판사의 신인 수급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새로운 상을 제정하게 된 이유라고 말한다. 12월3일까지 후보작들이 선정된 가운데, 12월28일까지 투표자 등록을 한 독자들에 한해 투표를 실시한다.아즈 망가 대왕 완결21세기 초반을 강타한 개그걸작 <아즈 망가 대왕>이 전 4권으로 국내 완결 발간되었다. 평범해서 더 특별해 보이는 여고생들의
독자가 주는 만화 대상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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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이다. 동그란 얼굴에 귀여움 가득한 눈, 속이려고 해도 틀림없다. 때로는 형사로, 때로는 스포츠 플레이어로, 나름대로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만 언제나 고양이의 본성을 숨기지 못해 망가지던 바로 그 녀석.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고양이 <왓츠 마이클>(What’s Michael, 학산문화사 펴냄)이 돌아온 것이다. 아니 처음으로 제대로 왔다고 해야 할까 그때는 제대로가 아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공원에서 새를 잡으려다가 실패하곤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며 달아나던 고양이 마이클. 한때 국내 만화잡지에 번역연재되어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던 바로 그 모습. 늦었다. 그래도 좋다. 뒤늦게라도 정식 단행본으로 제대로 만나는 즐거움은 크다.격투코미디의 제왕 고바야시 마코토가 1984년부터 연재해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왓츠 마이클>은 지금 보아도 신선한 감성이 넘치는 동물만화의 고전이다. 만화 속에서 동물 주인공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
고바야시 마코토의 <왓츠 마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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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은 그 어떤 공간도 닫힌 공간으로 만든다. 한국의 해안선은 3중의 의미에서 ‘벽’이다. 민간인들은 밤이 되면 아름다운 해안선의 어떤 부분을 넘을 수 없다. 반대로, 그 선은 수색대원들에게는 세상과의 단절을 뜻하는 선이기도 하다. 또 크게 보아 그 선은 ‘통일’로 가려는 조선인들의 열망을 막는 벽이다.이렇게 3중의 벽으로 닫힌 공간 속에 연기자들이 투입된다. 김기덕의 남자들은 그 속에서 넘어서는 안 될 것/넘고 싶은 것 사이의 심연을 깨닫는다. 김기덕은 다시, 그 남자들을 그 심연 속으로 침투시킨다. 그리고 김기덕의 여자들은 종종 그 ‘심연’에 존재하는 희생양들이다. 연기자들은 심연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닫힌 비극의 상태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꿈을 깨듯 영화는 끝난다.<해안선>은 그 닫힌 상태의 한 기록이다. 펼쳐져 있지만 드넓은 벽인, 닫혀 있는 물. 어떻게 음악적으로 그 공간을, 그리고 그 공간 속의 상황을 표현할까. 음악을 맡은 장영규(for 복숭아) 역시
닫힌 구조 속의 양떼,<해안선>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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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두드러진 출판경향 중 하나는 그동안 문단과 독자로부터 냉대받아온 추리소설의 주요 작품들이 완역·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난 도일의 걸작 <셜록 홈스 전집>과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전집>이 큰 인기를 누리는가 하면, 추리문학의 숨은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브라운 신부 전집>이나 고급 역사추리소설 <캐드펠 시리즈>가 완역되기도 했다.이런 흐름에 발맞춰 추리소설과 함께 아웃사이더 장르 취급을 받아온 SF소설의 걸작들도 하나둘씩 다시 출간될 채비를 하고 있어 각별히 주목된다. 그 첫 번째 신호탄으로, 미국 SF문학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SF소설가 어슐러 K. 르 귄의 수작 <어둠의 왼손>(시공사 펴냄)과 <빼앗긴 자들>(황금가지 펴냄)이 세련된 편집본으로 재출간된 것은 자유추리문고 문고판으로 처음 르 귄을 접했던 SF마니아들에겐 감격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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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 연재를 시작했다니 내가 연재 당시 이 만화를 읽었을 가능성은 없다. 양구에서 군바리로 ‘좆나게 기’던 때니까. 한데도, 모든 것이 낯익고 본 듯하다. <삼국지> 줄거리를 줄줄 외게 되었으니 그렇고(나는 최근 <삼국지>를 여러 용도본으로 여러 차례 읽을 기회가 있었다) 1972년, 내가 대학 1학년일 때 그가 연재하여 장안의 화제를 몰고 왔던 <임꺽정> 이래 ‘고우영표’로 명명된, 절묘하게 살을 섞은 익살과 재담과 풍자가 다시, 문학에 달하는 지문과 대사(지금 읽어도 문체가 전혀 신세대적이다), 그리고 미술에 달하는 세필화(지금보아도 전혀 빛바래지 않았다) 속으로 절묘하게 녹아드는 광경 때문에 그런가그것만은 아니다. 그의 만화는 5년 동안 세상과 격리되었던 나의 빈자리를 매우 적절하게 채워주고 빈자리 그 전과 그 뒤를 아주 편안하게 또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그 이어줌과 채워줌은 아직도 내 안에 잠재해 있을지 모르는 공허한 성(聖)의 관념,
무삭제판 고우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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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버티기’라고 말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빛이 안 보여도, 버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작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프로젝트가 더 많은 게 현실이고 보면, 확실히 버티기는 중요한 것 같다. 물론 현실적인 계산과 노력 없이 마냥 버티기만 해서도 곤란하지만 말이다. 레인버스 스튜디오(www.rainbus.com)의 3D애니메이션 <투모야 아일랜드>는 인내심과 추진력으로 마침내 빛을 보는 경우다.오는 12월25일 오후 3시, EBS에서 22분 분량의 특집으로 방영되는 이 작품은 원래 5분 52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다. 캐나다의 사운드벤처프로덕션사와 공동으로 제작될 예정으로, 커뮤니티 포털사이트 싸이월드(www.cyworld.com) 등에서 아바타로 더 많이 알려졌다. 본 시리즈는 한국의 EBS, 캐나다의 TV Ontario, TFO, Access TV에서 2003년 하반기부터 방영될 계획이라고 한다. 20여분가량의 데모 영상은 이미 나온 상태.작품의 배
네버랜드를 꿈꾼다,<투모야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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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 반전만화로 알려진 <맨발의 겐>(전 10권, 김송이·이종욱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펴냄)의 나카자와 게이지가 지난 11월22일부터 25일까지 한국을 다녀갔다. <맨발의 겐>은 원폭투하로 초토화된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소년 겐과 주변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만화. 실제 히로시마 출신으로 6살 때 원폭투하 지점에서 불과 1.3km 떨어진 곳에서 피폭을 당했고, 피폭후유증 때문에 어머니를 잃었던 작가 자신의 체험과 함께, 전쟁과 핵무기의 무시무시한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교 진학도 포기한 채 생업에 나서야 했던 나카자와는, 간판 가게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만화의 꿈을 키웠다. 이후 도쿄에서 <울트라맨> <킹콩> 등의 작가 가즈미네 다이지의 사사를 받았으며, 낙진 때문에 시커먼 비가 내렸던 히로시마의 기억을 담은 <검은 비를 맞으며>로 1968년에 데뷔했다. <맨발의 겐>은 1973년
<맨발의 겐> 만화원작자 나카자와 게이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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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그나마 분단되어 4면이 막힌 한반도 남쪽에서 사는 내게 ‘중국’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상상이 만주에 미처 이르기도 전에 대륙의 파란만장한 깊이를 느끼게 했지만 ‘일본’이 내게 모종의 ‘충격=감동’적 실감으로 온 것은 약 5년 전, 나이 40을 넘기고서다. 프랑스 라루스 테마 백과사전 ‘예술과 문화’편을 뒤지다가 마주친, 약 1천년 전에 출간된 무라사키 부인의 ‘세계 최초-걸작 소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 삽화는, 명징한 색깔과 명징한 모양의 결합이 달하는 또한 명징한 깊이가, 개방된 성(性)으로서 색이 예술로서 색과 상호교통하는 통로를 응축하는 듯하여, 내 눈과 감각이 유교민족주의에 찌들어 있다는 점을 단박에 깨닫게 했다.이러한, 일본적 일상의 ‘색과색’은 정치지상화할 경우 잔혹한 ‘육체성’을, 예술지상화할 경우 ‘죽음의 탐미주의’를 낳지만( <바람의 검심>은 그 결합이다), 일본 만화는 이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만화적 상상력으로 일상을
일본의 색과 색,그리고 만화 <천황을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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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훌륭한 예술작품이 그러하듯이 좋은 영화는 한동안 사람의 안온한 일상을 뒤흔든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그 흔들림을 소화하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나의 경우, 그 소화 행위는 감독사전을 펼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로부터 받은 재미와 감동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가 무엇보다 궁금해지는 까닭이다. 그리고 감독사전을 통해 그 영화의 전후사를 읽다보면 오로지 그 역사의 지평에서만 볼 수 있는 새로운 사실과 의미를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동안 가장 빠르게 또 가장 쉽게 나의 이런 갈증을 풀어주었던 것이 바로 <씨네21 영화감독사전>이었다. 사실 국내에서 출판된 한국어판 감독사전으로는 거의 유일무이한 것이었으므로 어찌보면 강요된 선택이었던 셈이다.감독사전은 관객과 감독의 좀더 깊은 의사소통의 매개체이자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이다. 또한 그것은 한 나라 영화문화의 폭과 깊이를 가늠케 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3년 전
3년 만에 개정판 나온 <씨네21 영화감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