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 프랑스에 서다(2)
(390호에 이어서 계속) 작은 도시 앙굴렘은 30주년이나 된 연륜을 자산 삼아 도시 곳곳을 축제의 분위기로 물들였다. 버스 정류장에 설치된 거대한 대형 부스에는 만화를 구입하거나 작가와 만나려는 독자들이 가득했고, 도심은 전시를 관람하기 위한 관객으로 가득했다. 느닷없이 거리에 등장한 퍼포먼스 팀들도 있었다. 행사 때마다 생 마르셀 광장 앞에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는 스트리트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사람도 여전했다. 노천가게에서는 만화잡지나 만화책, 간단한 주전부리를 팔았고, 앙굴렘 도심의 가게들은 늘 하던 대로 만화책으로 쇼윈도를 꾸몄다. 2001년 처음 앙굴렘을 찾을 때나 2003년이나 풍경은 똑같았다. 그러나 이번 축제에는 ‘한국’이라는 역동성이 있었다.
24∼26일 3일 동안 한국만화특별전의 문화공연으로 준비된 줄타기 공연단은 생 마르셀 광장의 한국만화전시관에서 길놀이를 시작해 12개의 만화만장을 앞세우고 판을 벌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길놀이와 줄타기, 그리고 한국 만화는 낯선 프랑스 도심에서 하나로 어우러졌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한국 만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줄타기, 풍물놀이, 거대한 만화만장과 함께 앙굴렘 도심에 스며들었다. 이것은 전혀 다른 문화적 충격이었다. 만화만의 전시가 아닌 만화와 문화의 만남, 만화의 특징을 다른 문화로 표현할 수 있는 확장된 여유를 보여줬던 것이다.
한국 만화의 역동성이라는 전시 주제는 전시관 구성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4개의 각기 다른 전시를 100평이라는 크지 않은 공간에 배치한 것은 물론 전시 표현도 매우 다양했다. 당대를 상징하는 사진자료와 출판된 자료를 중심으로 주요 작가를 선정해 보여주는 역사전과 개별 작가의 작품을 일정한 패턴에 맞춰 재출력해 구성하는 19인 작가전 중 ‘만화와 욕망’, ‘일상의 발견’ 섹션, 작가들이 직접 전시 기획과 전시물 제작에 참여한 19인 작가전 중 ‘새로운 감수성’과 대학생 만화전, 거기에 디지털, 모바일 기술을 기반으로 한 전시에 한국의 열린 문화를 상징하는 평상까지. 한국만화특별전은 앙굴렘의 다른 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공간에 각각 다른 전시들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냈다.
만화만이 할 수 있는 일
이같은 전시기획은 한국 만화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유럽 관객에게 한국 만화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19인의 작가전 중 곽상원 전시.
19인의 작가전 중 이애림 전시.
오히려 앙굴렘의 다른 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함이 현재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마치 모든 것이 역동적인 것처럼, 한국 만화와 한국 만화 전시는 프랑스에 강렬한 첫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은 그리 낙관적인 일이 아니었다. 2002년 2월에 공식공문을 접수한 뒤, 5월에 전시를 준비하기 위한 팀이 꾸려지기 시작해, 9월이 돼서야 공동 큐레이터 3인(성완경, 박인하, 김낙호)와 코디네이터 4인(김성진, 이미정, 조희윤, 허준영)의 체계가 완성되었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 결합한 인력도 부족했다. 거기에 전시기획도 마지막까지 확정되지 못했다. 11월3일, 만화의 날에 CNBDI 학술부장인 메르시에와 앙굴렘 조직위의 언론담당인 피네가 방한해 한국의 만화인프라를 살펴보며, 전체 전시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전시기획이 확정되고, 역사전이 아닌 19인 작가전이 전시의 중심이 되었다. 지나간 역사보다는 90년대 이후 한국 만화의 단면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보여주자는 기획이었다. 전시준비에서부터 완성까지, 모든 일은 전시 제목처럼 역동적으로 진행되었다. 만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일의 희망
한국만화특별전에 대한 현지 반응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현지 관객은 작품 하나하나에 관심을 보였다. 출판 관계자들은 구체적으로 작가에 대한 정보를 문의했고, 한국으로 연락을 약속한 사람들도 많았다. 몇몇 신생 출판사들은 새로운 일본 만화로 한국 만화를 보았고, 몇몇 출판 관계자들은 한국 만화가들의 새롭고 창의적인 작품에 흥미를 나타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5월에 개최되는 만화페스티벌(Comics Festival Brussels)에서는 한국전 초청의사를 밝혔고, 6월에 개최되는 파리만화살롱에서도 한국 만화에 대한 높은 관심을 전해왔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세계에 한국 만화를 효율적으로 알리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 만화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이번 전시의 가장 소중한 성과일 것이다.
축제기간 내내 유쾌한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날았던 축제는 끝났다.우리에게 남은 것은 축제의 성과를 효율적으로 이어가는 일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
야외에서 진행된 한국공연 중 줄타기 공연.(왼쪽) 전시장을 가득 메운 관객.(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