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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파티마, 피에 젖은 파트너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지, 언제쯤 그 긴 이야기가 끝나는지, 다만 그것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그러나 부질없는 희망인가? 수만년에 걸친 별과 기사와 요정과 기계괴물의 이야기를 불과 몇 십년 동안 전해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나가노 마모루의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가 겨우겨우 10권을 냈다. 그래도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별다른 해설도 붙지 않고 만화로만 260쪽이 넘는 최대 분량의 권이다. 이것으로 9권에서 시작된 제5화 <더 시발리스>(the Chivalries)가 종결되었다. 오랜 다섯별 이야기 중 가장 슬프고도 아름답고 유머 넘치는 테마, 기사와 파티마의 발라드가 빛나는 화음으로 어우러졌다. 10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제5화는 그야말로 ‘기사와 파티마’의 이야기다. 중심 줄거리는 성단력 2995년에서부터 3010년 마법제국 황제 보스 야스포트의 플로트 템플 내습에 이르기까지의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 10권,제5화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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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으로 부지런하게 혹은 바지런하게 산과 절을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아픈 발바닥과 공기상쾌한 피로감, 그리고 세속의 찌든 때가 휘발하기 직전 땀의 광경 속에 나타나는, 분명 산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마음자리 가장 깊은 곳에 집보다 더 안온하게 자리잡은, 다시 동시에 인간-자연 너머 청정 자체가 쉬는 안도의 한숨 같은 광경으로 절을 만나는 게 제격이겠지만 그럴 성격이나 사정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제격이다.더군다나 요새 유행하는 말을 쓰자면 ‘신세대적’으로, 젊게 제격이다. 심지어 ‘절 취향’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조차 이 책을 한번 읽어봄직하다. ‘구세대’ 절책들은 너무 고답적이거나 딱딱하거나 아니면 불교에 대한 맹신(불교는 탈이론적 종교라서 맹신이 정말 무섭다)으로 건물(혹은 불상, 탑 등등) 미학을 대신하거나 그랬었다.이 책은 우선 사진의 내용과 수준과 배치가 정말 오래 절을 다녀본 사람의 발자국을 그대로 닮은 듯 적절하다. 색감이 다소 화려한 듯하지만 절의 시간적 낡음을
걷지 않고 절에 가기,이형권의 <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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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적 사운드 그대로매시브 어택이 새 앨범을 들고 돌아왔다. <백 번째 창>(100th Window). 지난 앨범 <Mezzanine>을 내놓은 지 5년 만이다. 이들처럼 과작인 밴드가 또 있을까. <Mezzanine> 이후 멤버 교체를 겪기도 했고 밴드 내부에 여러 문제가 있었던 탓도 있긴 하지만, 정작 이들이 그토록 과작인 이유는 더 근본적인 데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들의 반복적인 리듬을 기본으로 한 전자음악은 언뜻 만들기가 쉬워 보이기지만 실은 굉장한 집중력과 불굴의 실험정신을 요구하는 음악이다. 이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미묘한 노이즈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계속하여 그것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사람 지치게 만드는 일이다. 이런 음악은 판 한장 만들면 지쳐서 일 년은 귀와 몸과 마음을 쉬어야 한다. 더군다나 지난 앨범 <Mezzanine>의 사운드는 얼마나 세기말적이었나! 영국 브리스톨에서 탄생한 세기말적 사운드의 이른바
매시브 어택의 신보 <100th Wind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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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을 다룬 김혜린의 역사만화 <테르미도르>가 복간판 발간에 앞서 팬들을 위한 특별 한정판 신청에 들어갔다. 이번 한정판 및 복간판 출판은 <로보트 킹> <바람의 파이터> <달려라! 봉구야> 등 기획력 있는 만화를 출판하는 도서출판 길찾기에서 시도하는 의미있는 사업이다. 사전주문은 그동안 기획력 부재에 시달렸던 만화출판계에 일정한 수량을 사전주문받아 안정적인 수요, 공급 체계를 만들어내는 기획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번 한정판 발매의 결정은 김혜린 공식 팬클럽(www.kimhyerin.com)에서 제안해 추진하는 사업으로 팬들의 자발적인 만화소비자 운동으로 하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 김혜린 공식 팬클럽 : http://www.kimhyerin.com
[만화가 화제] <테르미도르> 한정판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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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 프랑스에 서다(2)(390호에 이어서 계속) 작은 도시 앙굴렘은 30주년이나 된 연륜을 자산 삼아 도시 곳곳을 축제의 분위기로 물들였다. 버스 정류장에 설치된 거대한 대형 부스에는 만화를 구입하거나 작가와 만나려는 독자들이 가득했고, 도심은 전시를 관람하기 위한 관객으로 가득했다. 느닷없이 거리에 등장한 퍼포먼스 팀들도 있었다. 행사 때마다 생 마르셀 광장 앞에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는 스트리트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사람도 여전했다. 노천가게에서는 만화잡지나 만화책, 간단한 주전부리를 팔았고, 앙굴렘 도심의 가게들은 늘 하던 대로 만화책으로 쇼윈도를 꾸몄다. 2001년 처음 앙굴렘을 찾을 때나 2003년이나 풍경은 똑같았다. 그러나 이번 축제에는 ‘한국’이라는 역동성이 있었다.24∼26일 3일 동안 한국만화특별전의 문화공연으로 준비된 줄타기 공연단은 생 마르셀 광장의 한국만화전시관에서 길놀이를 시작해 12개의 만화만장을 앞세우고 판을 벌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
2003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보고서 그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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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구했던 삶과 음악에 대한 갈증을 모두 빨아들이기라도 한 듯, 이병우가 선보이는 5번째 독집 음반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다. 95년 <야간비행> 이후 무려 8년. 참 오랜만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병우는 84년 조동익과 듀오 ‘어떤날’을 결성하고, 포크와 재즈, 뉴에이지를 넘나드는 서정적인 선율, 일상의 풍경과 정서를 세밀하게 담은 노래들로 우리 대중음악의 토양에 낯선 발자국을 남겼던 뮤지션. 89년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을 필두로 일렉트릭과 어쿠스틱, 클래식의 경계를 넘어 기타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의 영역을 넓혀온 연주자로 활동해왔다. <그들만의 세상> <세 친구> <스물넷> 등 틈틈이 영화음악을 맡았던 그는, 지난해 장편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의 음악으로 뜸했던 소식을 잇기도 했다.어른이 되어버린 바닷가 마을 소년의 추억을 불러내는 음악이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 관현악과 컴
서른아홉,생의 은근한 고백 이병우의 5번째 음반 <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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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세계란 노동이 예술의 차원에 달하는 것이라는 말 말고는 ‘문화운동’에 대해 별로 논하지 않았다. 그의 문체가 문학적 향취를 뿜었을 뿐이다. 엥겔스도 별로 논하지 않았다. 그의 문체가 시적 응축에 달하면서 간혹 논리 비약을 범할 뿐이다.오늘날 문화운동이 정치에 너무 좌지우지되는 현상은 문학이 공무원 자질시험(과거)의 주요 과목이었던 조선시대 유물이기도 하고 가깝게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문화운동에 그대로 적용한 80년대 민중문화 운동의 유산이기도 하다.그렇게, 문화운동의 취약점은 정작 문화정책의 결여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도 나온다. 87년쯤인가, 당시 수배 중이던 임홍배(서울대 교수)에게 특별부탁하여 동독 문화정책 관련 서적을 빌려본 일이있는데, 문화정책(혹은 운동)은 freizeit-gestaltung(자유시간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이 관건이라는 말에, 파업용 노래를 만드는 것보다는 자유시간에 음미할 거리를 만드는 게 더 어렵고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이론의 높이와 실천의 깊이,심광현의 <문화사회와 문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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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처리인 트라우마> 발간개그 패러디만화 <파타리로>로 잘 알려진 마야 미네오의 <요괴 처리인 트라우마>가 국내에서 번역 발간되어 나오고 있다(시공사 펴냄). 파타리로처럼 3등신의 꼬마인 트라우마 네코타로는 가난뱅이 정신으로 무장한 빈곤신과 함께 요괴들을 퇴치한다. 그러나 역시 별다른 능력없이 큰소리만 뻥뻥 치고, 요괴를 퇴치하기는 하지만 뒷끝은 별로 좋지 않다. 전작인 <파타리로>처럼 썰렁한 농담과 패러디로 가득 차 있어 아는 사람만 웃을 수밖에 없는 점은 여전한 한계로 남아 있고,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에피소드들이 조금은 식상해 보인다. 하지만 청소년 보호법 여파로 <파타리로>를 더이상 볼 수 없는 마야 미네오 팬에게는 나름의 대용식이 되어줄 것이다.<도고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도도한 고양이’ 혹은 ‘도둑 고양이’로 읽힐 수 있는 고양이 주인공 도고의 이야기를 담은 신명환의 만화집 <도고가 동쪽으로 간
[만화가 화제] <요괴 처리인 트라우마> 발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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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잊지 못한다. 1983년, <보물섬>이라는 만화잡지를 타고 그 녀석이 우리 동네로 이사오던 날. 머리카락 두 줄기만 솟아난 민대머리에 가로로 찢어진 큰 눈, 딱 보기에 심술궂어 보이는데다가 이름까지 악동이라니. 그런데 우리에게 놀라웠던 건 그 녀석이 말썽쟁이 만화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아니었다. 그 이전 우리를 즐겁게 했던 길창덕의 <꺼벙이>도, 박수동의 도 부모와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모범생들은 아니었다. 이 속깊은 말썽쟁이가 진짜 새로워 보였던 것은, 그 천진난만한 소동의 뒤끝을 빗질하면서 어린 우리에게 이 세상에는 참으로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항상 그 만화 근처에는 서늘한 진실의 냉기가 서려 있었다.독재정권에 대한 명료한 은유어린이 만화잡지 <보물섬>의 전성기에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던 <악동이>가 최근 복간되어 나왔다. 윤승운의 <두심이 표류기>, 신문수의 <도깨비 감투&
우리들의 일그러지지 않는 영웅,이희재의 <악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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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외 29인 지음 박맹호 고희 기념집- <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
마치 동공이 영혼의 황폐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뼈만 남은, 그러나 뼈보다 견고한 예술의 형식(시인 최승호-조각가 자코메티), 음악의 황홀경을 육체-감각의 황홀경으로, 그러나 다시 육체보다 명징한 예술의, 육체와 다른 생애(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소설가 함정임), 죽음의 사건과 본질을 매개로 한 대중문화 신화 뒤집기(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소설가 김미진), 건축언어와 문학언어 사이 치열한, 상상력 풍부한 교호를 통한 예술 유토피아의 공간-가시화(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시인 김혜순), 일상(의 결과 범위)을 어느 정도 확대심화하면 예술과 혁명은 등식을 이룰 수 있는가(지하철 낙서 화가 키스 헤링-시인 디자이너 박상순), ‘코스모스=키오스’를 품은 여체를 형상화하는 페미니즘 넘어 페미니즘(화가 프리다 칼로-시인 김승희), 가공할 무의식의 멀쩡함(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루통-불문학자 송진석), ‘양변기
[컬렉터 파일] 고희의 아방가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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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스파이스는 한국 최초의 모던 록 밴드 중 하나이다. 비교적 최근에 태어난 장르/스타일들이 그렇듯, ‘모던 록’ 또한 난삽한 유전자를 지닌 용어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매끈한 선율에 내성적인 정서(가사)를 지닌 기타 팝/록’이라는 해석이 승리했고, 델리 스파이스의 음악은 그 승리의 주요 공신이다. 영화 <후아유>(2002)의 사운드트랙에 리메이크되어 실리기도 한 <챠우챠우>를 듣다보면 델리 스파이스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데, 반복적이면서도 인상적인 선율과 가사, 재기 넘치는 기타 연주, 예민하고 정감어린 편곡은 이들의 데뷔 음반을 관통하는 특징이었다. 그뒤로도 석장의 음반을 내놓으면서 다양한 스타일(전자음, 관현악 등)을 건드렸지만, 그 중심은 언제나 명료한 선율을 지닌 기타 팝/록에 있었다.하지만 2년 만에 나온 새 음반은 베테랑 밴드의 자기쇄신 노력을 보여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빨래판 긁듯 거칠게 내달리는 드럼을
모던 록에서 하드록으로,델리 스파이스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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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만화, 정보만화 등으로 불리는 기획만화 시장은 현재 춘추전국시대다. <그리스로마신화>로 시작된 대박행진은 <삼국지> <가시고기> 등으로 이어지더니 손해보지 않는 시장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기획자들은 어린이학습만화를 만들어내는 데 매진하고 있는데, 리틀미다스에서 출간된 <만화공자>는 참신한 기획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중국 5천년의 지혜가 살아 숨쉬는 제자백가 시리즈”라는 타이틀로 <만화공자> <만화장자> <만화맹자> <만화노자> 모두 4권이 출판되었는데, 이 만화는 길림촬영출판사가 기획했다. 조선족 연구자 황주엽이 글을 쓰고 카툰, 애니메이션, 만화 등 다방면으로 활동 중인 곽경웅이 그림을 그린 작품을 한국에서 채색작업을 추가해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중국에서, 그것도 조선족들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촌스럽거나 중국풍이겠지라고 속단하면 안 된다.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중국의 이야기를
[만화가화제] 중국에서 제작된 한국의 학습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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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 프랑스에 서다(1)2003년 1월23일부터 26일까지 4일 동안 만화를 사랑하는 20만명의 관람객은 인구 7만명의 작은 성곽도시 앙굴렘을 찾았다. 작은 강이 흐르고, 성곽에 둘러싸여 있어 걸어서도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한 작은 도시는 4일 동안 마술처럼 만화적인 분위기로 탈바꿈한다. 아마 페스티벌 기간이 아닌 평소에 앙굴렘을 찾아본 사람은 고즈넉할 정도로 조용한 도시 분위기에 놀랄 것이다. 그처럼 도심은 신비할 정도로 완벽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주차장에 거대한 임시 가설 전시장이 들어선다. 이곳은 프랑스 대형 출판사들이 독자를 만나는 장소다. 버스 정거장을 사이에 두고 북쪽 부스와 남쪽 부스로 나뉜다. 다르고, 위마노이드, 카스테르망, 글레나 등 10여개에 이르는 대형 출판사들은 3×3의 기본 부스 수십개를 활용한 대형 부스를 개설해 만화책을 팔며 작가 사인회 등을 개최한다. 물론 독립적인 출판사들도 1∼2개의 부스를 구매해 자사의 만화를 홍보하기도 한다. 올해도 이곳 상
2003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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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성에 관해 알고 싶은 모든 것성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고, 그냥 평범한 일상일 뿐이기도 하다.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종교에는 성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다. 인도와 티베트 등의 밀교에서는 섹스를 통하여 우주의 원리를 깨우칠 수 있고,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불교에서는 성을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의 하나로 보고, 그 욕망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정진한다. 누구에게 성은 욕망의 근원이고, 누구에게 성은 해탈의 과정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성은 이중적인 태도로 찬양되거나 거부당한다. 대중문화와 광고는 성적인 이미지로 충만해 있지만, 실제 포르노는 배척당한다. 역사 속에서 성은 늘 이중적인 대접을 받아왔다. 왜일까?성에 관한 이야기와 풍부한 화보를 담고 있는 <SXE: 잃어버린 자유, 춘화로 읽는 성의 역사>는 ‘SEX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지금과는 다른 각도에서 왜곡되지 않은 솔직한 시각으로 SEX에 접근하자’고 말한다. 그 의미를
SXE: 잃어버린 자유, 춘화로 읽는 성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