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우울해도 만화는 나오고 있다. 신간 리스트가 온통 일본 만화로 도배되지만, 새롭게 출간되는 한국 만화도 있다. 싸구려 종이에 인쇄도 엉망으로 잉크가 번져나지만 그래도 독자들에게 읽힌다. 전작단행본이라는 출판형태는 물량 중심의 출판이 만들어낸 상흔이지만 그래도 잡지가 속속 폐간되는 요즈음 신인들에게는 소중한 데뷔의 장이 될 수 있다. 얼마 전에 이 지면에서 소개한 <말리>도 전작단행본을 통해 빼어난 ‘한국 만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도깨비 신부>를 발표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 8월 막 세권째를 발표한 변미연도 나름대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작단행본의 신인이다. 변미연의 <미스티>는 2003년 1월에 첫권, 5월에 2권, 8월에 3권이 나왔다. 여자친구에게 크게 끌리지 않는 남자가 무언가 공허해 보이는 또 다른 남자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고 그에게 빠져든다는 이야기의 기본구조는 낯익다. 이른바 ‘야오이 코드’라고 불리는 평범한 구조인데, 변미연은 이 평범한 설정을 풍부한 이야기로 바꿔낸다. 페이지에 이야기를 담아내고 풀어내는 방법을 안다는 말이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100% 이해했을 때 가능하다. 이야기는 인물과 분리되지 않고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평범한 설정의 이야기가 힘을 얻어 독자를 끌어당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권을 본 솔직한 느낌은 유시진 코드에 권교정의 감성이 버무려진 것이었다. 하지만 2권을 넘어 3권으로 나아가며 변미연은 자신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방법을 깨닫고, 유시진보다는 권교정쪽으로 방향을 튼다.
세속적인 능력은 없어 보이지만 적어도 남다른 사진을 찍어내는 해맑은 백수 프리랜서 청년 재은과 어린 시절 혼자 남겨져 가족을 소망하다 가족을 갖게 되지만 결국 아내와 아이를 잃어버린 슬픈 남자 성배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 특히 성배와 우연히 눈이 마주친 뒤 그 남자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게 된 재은의 이야기는 딱 줄거리만큼 상투적이지만 2권부터는 도영이 등장하며 이야기의 외연이 확장되고, 다시 3권에서는 도영이 사는 아파트 아래층의 꼬마와 고등학생 형, 그리고 아버지가 등장하며 다시 한번 풍부한 감정의 겹침을 만들어낸다.
‘쿨’한 게이들의 연애담 혹은 불타오르는 꽃미남의 육체라는 상투적인 야오이 코드를 넘어서는 순간, 성배라는 불행한 남자의 그늘을 넘어서는 순간, 이야기는 생동감을 찾게 된다. 학원 옥상에서 펼쳐지는 도영과 진경의 14쪽에 이르는 대화 시퀀스는 상투성을 벗어나 개성적이며 보편적으로 형상화된 인물의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명은 서울대를 나와 잘 나가는 학원강사로 자신만만한 미모의 소유자. 그리고 다른 한명은 산업체 고등학교를 나온 학원의 직원. 결혼에 대한 상이한 관념이나 그 관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담담하게 고백하는 자신의 과거. 14쪽에 이르는 대화장면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두 인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으로 힘을 갖는다. 게다가 꿈이란 꿈은 죄다 접히고, 도망갈 만한 구멍은 돈 많은 남자, 더 정확히는 아무 데도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진경이나 이런 상대에게 무지 춥다고 들어가자고 말하는 도영도 모두 생생하고 솔직하다. 이것이 바로 변미연의 장점이다. 그의 만화는 상투적인 기본 구성에서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풍요롭게 진보하고 있으며, 이야기의 형상은 거짓이 없고 솔직하다. 그래서 이야기와 인물의 감정을 독자가 느끼게 된다. 성공한 형상화다.
변미연은 진보하는 작가다. 특히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감정을 배치하고, 독자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따라오게 만드는 능력은 발군이다. 하지만 인체를 그리는 방법에서는 약점을 보인다. 페이지를 나누고, 칸을 배치하고, 앵글과 숏을 잡아내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지만 동세를 표현하는 부분은 어색한 장면이 종종 눈에 띈다. 같은 인물이 때론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약점은 풍부한 이야기로 진보하는 신인 변미연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한국 만화가 지닌 약점 중 하나는 빼어난 스토리텔러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대중이 소비하는 만화는 서사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그림이 전면에 나서지만, 결국 독자를 움직이는 것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변미연은 꽤 괜찮은 신인 스토리텔러다. 그래서 3권 이후의 행보가 기대된다. 3권 이후 새롭게 드러나 보이는 인물들의 관계는 어떻게 형상화되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이 미묘하게 엮이는 감정의 실타래는 통속과 진정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텐데 과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1권부터 작품의 중심된 주인공인 성배와 재은은 많은 만화에서 묘사되는 쿨한 게이의 전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낯익은 이야기들이 상투적이지 않고 보편성을 통해 독자에게 감정을 감염시키기 위해 변미연은 이야기 그 자체에 더욱 충실하게 몰입해야 될 것이다.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