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라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가사처럼 음악인 조용필을 잘 표현하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 저 가사가 조용필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상할 정도다. 그래서 그는 50줄을 넘긴 나이에도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간다.
그가 ‘오르려 애쓰는’ 음악적 영토가 오페라 혹은 뮤지컬이라는 사실은 몇 차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 있다. 그래서 이번 앨범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이를 위해 한편으로는 대규모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라는 순수음악계의 인물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탄생의 멤버를 포함한 대중음악계의 인물들이 대거 초빙되었다. 두 부류의 음악인들은 앨범의 각 트랙에서 만났다 헤어졌다 다시 만난다.
그 ‘만남’은 <태양의 눈> <도시의 오페라> <꿈의 아리랑> 같은 야심작들에서 가장 유기적이다. 급박하게 몰고 가는 드럼, 날카롭게 찔러대는 기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키보드가 장엄한 합창과 오케스트레이션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진다. 조용필의 오랜 팬이라면 그의 유구한 정서적 코드가 업데이트되어 있는 모습을 음미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불굴의 의지’, ‘현대인의 고독’, ‘한국인의 한(限)과 희망’ 등등…. 한편 록음악의 오랜 팬이라면 록음악이 화려하고 웅장했던 한때를 떠올릴 것이다. 앞으로 나올 조용필식 록 오페라가 어떤 것일지 예상하는 재미도 있다.
이상의 트랙들이 ‘웅장’에 승부를 걸고 있다면, ‘우아’에 모든 것을 건 트랙들도 있다. <오늘도> <그 또한 내 삶인데> <꽃이여> 같은 발라드, 그리고 소프라노 전은정과 듀엣으로 부르는 <With> 등이 그렇다. 때로는 현악의 화려한 앙상블이, 때로는 피아노의 섬세한 타건이 주도하면서 통속적인 요소들을 말끔히 짜내버리는 방향으로 편곡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장식만 덕지덕지 많이 붙은 보통의 발라드 가요와는 품격이 다르다.
조용필이 새로운 곳을 찾아떠나지 말고 우리 곁에 머물러주기 바라는 사람을 위한 배려도 있다. 직접 작사를 맡아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일성(一聲)>은 기타를 둘러멘 그의 모습을 환기시키고, 죽은 아내를 추모하는 애절한 비가 <진(珍)>은 녹슬지 않은 그의 목청에서 나오는 열창을 감상할 수 있다.
따라서 50분 정도의 길이에 열개의 가요를 담은 형식을 취하고 있더라도 이 앨범의 최적의 감상법은 통상적 가요 음반과는 다르다. 뚜렷한 스토리 라인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가사와 음악이 일관된 컨셉 아래 전개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각 트랙은 오페라의 한 장(혹은 막)처럼 무대가 바뀌는 것 같은 상이한 공간감을 선사한다.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음악’에 대한 호오와 무관하게, 이 앨범이 공들여 만든 작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음악을 앨범 전체로 감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누군가 ‘이번 앨범에 실린 곡 가운데 이제까지 발표된 조용필의 주옥같은 명곡에 필적하는 곡이 있느냐’라고 질문한다면, 나 역시 또렷하게 답변하기 힘들다. 간단히 말해서 이 앨범은 조용필의 ‘예전의’ 팬(=30대 이상의 국민 전체?)이 아니라 ‘오래된’ 팬이 좋아할 음반이다.
이는 공식적으로는 그를 장인적 예술가로 예우하는 세간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를 ‘노래 잘하는 대중가수’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단적으로 말해, 10만원 가까운 거금을 지불하여 조용필의 공연장을 찾기는 해도, 단돈 1만원을 지불해서 새 앨범을 구매하는 데는 인색하다는 이야기다. 지금 그에 대한 진정한 예우는 후자일 텐데 말이다. 그래서 이 음반의 발매에 즈음하여 ‘조용필 35주년 기념 음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또 하나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한 조용필의 예전 소속사의 행동은 참 얄궂기만 하다. 신현준/ 대중음악평론가 homey@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