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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드웰의 <영화 스타일의 역사>는 1907년에 만든 어떤 영화 속의 한 장면부터 1910년대, 60년대, 그리고 70년대에 만든 영화들의 장면들을 잇따라 제시하면서 이것들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서로 어떤 차이가 있고 또 어디에서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책에서 보드웰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 다시 말해 미장센, 프레이밍, 초점, 색상 조절, 편집과 사운드 등을 포함한 영화테크닉의 체계적이고 의미있는 이용(이것이 스타일에 대한 보드웰의 정의이다)에는 역사가 있으며 이 역사는 분석과 설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드웰은 “스타일상의 연속성과 변화의 패턴들을 발견하고 설명하려는 시도” 즉 스타일의 역사기술이 인문학 분야의 영화연구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정당화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그들(스타일의 역사가들)은 영화를 매력있게 만드는 특질들에 주목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왔다.
데이비드 보드웰의 <영화 스타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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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에 데뷔하여 직장생활(들)을 곧 때려치우고 배짱좋게도 ‘전업 시인’을 선포하고부터 내심은 줄곧, 마흔도 넘어 쉰살이 되면 실업자 시인들은 도대체 뭘 먹고살며, 뭘 내세우고 사나 궁금했었는데 정말 50을 한해 남기고 보니 생계가 여전히 막막하면서도 앞서간 사람들이 밟은 전철이 예상되기는 한다. 문단처럼 ‘나잇값’을 쳐주는 데가 다시 없는 것. 회의도 많고 심사도 많고 위원도 많고 그것들에 매회마다 따라붙는 거마비가 쏠쏠한 게, 식솔만 없으면 글 안 쓰고 그냥 버티고 싶을 정도다.한해도 저물고 이렇게 사는 인생에 다소 회의가 들 즈음이면 송년회를 겸한 시상식, 혹은 시상식을 겸한 송년회 초청장이 쇄도하는데다 사마다 혹은 상마다 무슨 경쟁이 붙었는지 ‘담당자’들의 참석 권유 전화도 오는지라 ‘회의하던’기분은 씻은 듯 사라지고 내가 무슨 중요한 인사라도 되는 양 우쭐해지기까지 한다.‘가난한’ 옛날에도 가난한 기준으로 보면 사정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40수 50수란 말이 있는
망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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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회사 건물은 어김없이 환해진다. 수위 아저씨가 문을 열고, 청소 아주머니가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몇십년을 한결같이 살아온 분들. 이들과 새벽에 마주치는 순간, 삶에는 먹고 자는 것 이상의 신성한 의미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무엇이 모진 비바람을 견디게 하고, 저토록 평화로운 표정까지 만들어냈을까.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삶을 지켜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그 표정을, 단편 <등대지기>에서 보게 됐다.김준기 감독이 만든 <등대지기>는 8분40초 분량의 3D애니메이션이다. 2002년 대한민국애니메이션대상 특별상을 수상한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따스함이다. 내용과 영상이 모두 따뜻한 느낌. 3D 영상임에도 이런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기술적으로도 대단하게 뛰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등대지기>가 빚어내는 따스함은, 바로 주인공 두보에게서 비롯된다. 느릿느릿한 움직임과 넉넉한 표정. 할머니가
추운 세상 밝히는 따뜻한 불빛,<등대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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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10일(화) 오후 7시(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인류학박물관에서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 관한 공식 기자회견이 개최되었다. 이번 기자회견은 주요 프로그램과 전시에 대한 내용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자리로 해외특파원을 포함한 국내외 기자 400여명과 만화가, 출판사, 후원사, 각국 정부기관 등 만화 관련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한국만화특별전의 총괄 큐레이터인 성완경 준비위원장은 역사전, 작가전, IT만화전 등의 행사를 작품 이미지와 함께 소개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내외신 기자들을 포함한 세계적인 만화인들은 낯선 한국만화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보이며, 특히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한국만화콘텐츠에 큰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중 사이버 머니를 이용하여 인터넷으로 한국 만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등에 매우 놀라워하기도 했다. 기자회견 이후에 진행된 리셉션에서도 한국 만화에 대한 집중적인 질문공세와 인터뷰 요청이 잇따라 세계 만화계의 높은 관심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문의: 02-2166-
한국 만화,세계인의 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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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목숨, 멈춤, 격렬, 주먹, 눈빛, 뜨거움, 피. 최영의 혹은 최배달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최배달은 일제시대 비행사가 되고 싶어 일본에 건너가 소년항공학교에 다니다가 미군이 진주한 뒤 야쿠자 보스의 보디가드가 되기도 했고, 입산 수련 뒤 전일본공수도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했으며, 실전공수를 내세우며 전국의 가라테 도장을 순례하며 강자를 격파하기도 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최고의 파이터들과 자웅을 겨루었으며,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 극진가라테라는 새로운 유파를 만들었던 ‘남자’다. 남자를, 여자를 운운하는 것은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20세기의 수식어처럼 보이지만, 최배달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단어는 바로 ‘남자’다. 그래서 그의 삶은 뜨겁고, 늘 목숨을 건 위기의 순간이며,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고, 움직임과 멈춤의 앙상블을 조율해야 한다.남성들 사로잡은 영웅의 일대기매력적인 텍스트인 최배달의 삶은 여러 번 만화로 각색되었는데, 기억할 만한 작품은 모두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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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절묘하게 불편한 제목이다. 불편해서 절묘하고 절묘해서 불편하다. 그런데 이 시집 24쪽 <행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끝없는 행려(行旅)가 있을 뿐 돌아갈 곳이 없다/ 컨테이너 박스 안을 둥구는 재고가 된 옷보따리와/ 그 곁의 새우잠처럼’(<행려> 중 ) 그리고 단 4쪽 뒤에 하나 더. 이번에는, 아예 시 첫머리다. ‘그 단칸방에도 몇번쯤 봄눈이 내렸을 것이다// 모가지를 뚝 뚝 떨구어내는/ 낙숫물 소리// 그리고 겨우내 수척해진 몸을 부르르 떠는 전봇대 몇 그루’(<봄빛> 중)….궁상은 물론 가난 자체를 넘어, 마치 가난의 뼈를 깎는 듯한 비참이 이리 절묘하게 서정-풍경화한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정말 아름다움이 불편하고 불편함이 절묘하고 절묘함이 다시 아름답고 불편하다.박영근은 1979년 데뷔한 이래(그러니까 나보다 문단 데뷔 1년 선배다) 노동(운동)현장을, 그리고 노동자의 삶을, 희망과 절망을, 그리고 전망을 줄기차게
박영근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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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생각하면 너바나(Nirvana)라는 ‘현상’은 마치 화염방사기처럼, 듣는 이를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덮치고 지나가버린 그 무엇이었다. 록 장르가 말초신경을 간질이며 돈을 갈구하는, 약간 더 하드한 ‘팝송’으로 귀결되었다고 누구나 여기던 1990년대 초반, 너바나(와 시애틀의 그런지 동료들)는 돌연 록을 ‘순수함’의 고갱이로 바꿔놓았다. 이들의 노래는 염증나는 세상에 대한 자기 파괴적 분노로 가득 찬 ‘저항 음악’이었다. 록 음악에서 저항은 1970년대 중반 펑크 록을 끝으로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체념했던 팬들을 완전히 압도한, 예기치 못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음악을 기존의 활력없던 록 신을 완전히 ‘대체’한다는 뜻의, 얼터너티브 록이라 불렀다.<Nevermind>로 점화된 너바나의 신화는, 그러나 돌연 끝나버리고 말았다. 리더 커트 코베인의 자살(1994년 4월5일) 때문이었다. 스타덤을 못 견딘 자기 파괴의 욕망이 일차적인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너바나 베스트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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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좋아>는 어떻게 보면 노년에 만나 정열적인 사랑에 빠진 두 노인의 섹스일기이다. 두 노인의 사랑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열렬하며, 서로의 몸에 대한 탐닉 역시(특히 횟수) 젊은이들 뺨친다. 다큐멘터리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극영화이기도 한 이 영화가 표방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수법은 한편으로는 충격적이다. 섹스를 하고 있는 노인들의 실물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관객은 그 능숙하지 않은, 영화적으로 길들여져 있지 않고 유연하지도 않은 노년의 몸들이 뒹구는 장면 자체를 메시지 이전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 그로테스크한 현실은 하이퍼 현실이고, 우리는 어떤 표본실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사랑의 보편성, 혹은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몸의 보편성 같은 전언이 이 영화의 테마일 수도 있지만 정작 그 ‘몸’ 자체가 테마다.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몸들의 살아 꿈틀대는 실물감이 먼저 다가온다. 이 영화는 그러한 실물감을 내러티브나 메시지보다 우선시한 한국 초유의 영
목구멍 소리 그대로,하시게 <죽어도 좋아>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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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꺼내놓고 그림을 그리기 전 선생님은 “노란 크레용으로 본을 떠라”고 하셨다. 가끔 검은 크레용으로 밑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은 혼이 나곤 했다. 검은 선 테두리는 일종의 금기였다.지난 6월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가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홍익대 황선길 교수는 수상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만화는 선의 예술이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선 대신 면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검은 선 없이 색으로만 구분한 것이지요. 이런 독특한 형식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게 아닐까요.”선이 잘 드러나지 않는 작품의 특징은 부드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잔잔한 얘기를 꾸려나가는 데 적당하다. 이런 스타일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 <파워 퍼프 걸>이다. 귀여우면서도 무지막지한 세 꼬마소녀들의 힘은 두툼한 검은색 테두리로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가끔 TV에서 이 작품을 볼 때 왠지 모르게 갑갑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내 무의식 속에
유연한 테두리,<이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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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주는 만화 대상순수하게 독자들로 투표인단이 구성되어 최고의 만화에 상을 주는 ‘독자 만화 대상’이 만들어진다. 만화비평 웹진 <두고보자>, 만화비평 모임 ‘올쏘’, 만화검열 반대모임 ‘자유의 검은 리본’ 등 만화 커뮤니티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 중인 이 상은 최근 공식 홈페이지(www.comicreader.org)를 개설하고 만화독자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출판 만화 대상’, ‘오늘의 우리 만화’ 등 정부기관이 시행하고 있는 만화상들이 독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만화잡지의 공모전 역시 출판사의 신인 수급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새로운 상을 제정하게 된 이유라고 말한다. 12월3일까지 후보작들이 선정된 가운데, 12월28일까지 투표자 등록을 한 독자들에 한해 투표를 실시한다.아즈 망가 대왕 완결21세기 초반을 강타한 개그걸작 <아즈 망가 대왕>이 전 4권으로 국내 완결 발간되었다. 평범해서 더 특별해 보이는 여고생들의
독자가 주는 만화 대상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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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이다. 동그란 얼굴에 귀여움 가득한 눈, 속이려고 해도 틀림없다. 때로는 형사로, 때로는 스포츠 플레이어로, 나름대로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만 언제나 고양이의 본성을 숨기지 못해 망가지던 바로 그 녀석.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고양이 <왓츠 마이클>(What’s Michael, 학산문화사 펴냄)이 돌아온 것이다. 아니 처음으로 제대로 왔다고 해야 할까 그때는 제대로가 아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공원에서 새를 잡으려다가 실패하곤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며 달아나던 고양이 마이클. 한때 국내 만화잡지에 번역연재되어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던 바로 그 모습. 늦었다. 그래도 좋다. 뒤늦게라도 정식 단행본으로 제대로 만나는 즐거움은 크다.격투코미디의 제왕 고바야시 마코토가 1984년부터 연재해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왓츠 마이클>은 지금 보아도 신선한 감성이 넘치는 동물만화의 고전이다. 만화 속에서 동물 주인공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
고바야시 마코토의 <왓츠 마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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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은 그 어떤 공간도 닫힌 공간으로 만든다. 한국의 해안선은 3중의 의미에서 ‘벽’이다. 민간인들은 밤이 되면 아름다운 해안선의 어떤 부분을 넘을 수 없다. 반대로, 그 선은 수색대원들에게는 세상과의 단절을 뜻하는 선이기도 하다. 또 크게 보아 그 선은 ‘통일’로 가려는 조선인들의 열망을 막는 벽이다.이렇게 3중의 벽으로 닫힌 공간 속에 연기자들이 투입된다. 김기덕의 남자들은 그 속에서 넘어서는 안 될 것/넘고 싶은 것 사이의 심연을 깨닫는다. 김기덕은 다시, 그 남자들을 그 심연 속으로 침투시킨다. 그리고 김기덕의 여자들은 종종 그 ‘심연’에 존재하는 희생양들이다. 연기자들은 심연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닫힌 비극의 상태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꿈을 깨듯 영화는 끝난다.<해안선>은 그 닫힌 상태의 한 기록이다. 펼쳐져 있지만 드넓은 벽인, 닫혀 있는 물. 어떻게 음악적으로 그 공간을, 그리고 그 공간 속의 상황을 표현할까. 음악을 맡은 장영규(for 복숭아) 역시
닫힌 구조 속의 양떼,<해안선>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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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두드러진 출판경향 중 하나는 그동안 문단과 독자로부터 냉대받아온 추리소설의 주요 작품들이 완역·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난 도일의 걸작 <셜록 홈스 전집>과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전집>이 큰 인기를 누리는가 하면, 추리문학의 숨은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브라운 신부 전집>이나 고급 역사추리소설 <캐드펠 시리즈>가 완역되기도 했다.이런 흐름에 발맞춰 추리소설과 함께 아웃사이더 장르 취급을 받아온 SF소설의 걸작들도 하나둘씩 다시 출간될 채비를 하고 있어 각별히 주목된다. 그 첫 번째 신호탄으로, 미국 SF문학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SF소설가 어슐러 K. 르 귄의 수작 <어둠의 왼손>(시공사 펴냄)과 <빼앗긴 자들>(황금가지 펴냄)이 세련된 편집본으로 재출간된 것은 자유추리문고 문고판으로 처음 르 귄을 접했던 SF마니아들에겐 감격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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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 연재를 시작했다니 내가 연재 당시 이 만화를 읽었을 가능성은 없다. 양구에서 군바리로 ‘좆나게 기’던 때니까. 한데도, 모든 것이 낯익고 본 듯하다. <삼국지> 줄거리를 줄줄 외게 되었으니 그렇고(나는 최근 <삼국지>를 여러 용도본으로 여러 차례 읽을 기회가 있었다) 1972년, 내가 대학 1학년일 때 그가 연재하여 장안의 화제를 몰고 왔던 <임꺽정> 이래 ‘고우영표’로 명명된, 절묘하게 살을 섞은 익살과 재담과 풍자가 다시, 문학에 달하는 지문과 대사(지금 읽어도 문체가 전혀 신세대적이다), 그리고 미술에 달하는 세필화(지금보아도 전혀 빛바래지 않았다) 속으로 절묘하게 녹아드는 광경 때문에 그런가그것만은 아니다. 그의 만화는 5년 동안 세상과 격리되었던 나의 빈자리를 매우 적절하게 채워주고 빈자리 그 전과 그 뒤를 아주 편안하게 또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그 이어줌과 채워줌은 아직도 내 안에 잠재해 있을지 모르는 공허한 성(聖)의 관념,
무삭제판 고우영 <삼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