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 나는 지인들과 함께 만화 공부 모임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나 그렇듯이 그 모임에서도 토론이 끝날 즈음에야 고개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한둘씩 있었다. 그런 지각생들의 태도는 이상하게도 양극단을 달린다. 어디 기어들어갈 구멍이라도 없나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가 막히네’ 하며 되레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그날의 지각생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후자라 할 수 있었는데, 왠지 그 태도가 당당해 아무도 눈치를 못 채고 지나가버렸다. 헐레벌떡 계단을 올라온 그는 우리를 한번 꼬나보더니 가방에서 묵직한 책 한권을 꺼내 탁자 위에 쿵 하고 떨어뜨렸다. “아이 참, 무거워 죽겠네.” 보통의 만화 잡지 두권을 옆으로 붙여놓은 듯한 엄청난 크기. 소문의 만화 창작 및 비평지 <계간 만화>(서울산업진흥재단·새만화책 펴냄)였다.
판형에 걸맞은 짜임새는 아마도 지금까지 국내에서 나온 만화 서적 중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책일 것이다. 외국의 만화책으로는 크리스 웨어의 <애크미 노벨티 라이브러리> 제7호(1996)가 <계간 만화>보다 10% 정도 더 큰 판형을 하고 있다. 1993년에 나온 퀴노의 <마팔다 전집>(1993)은 <계간 만화>보다 조금 작은 판형이지만 전체가 650쪽이나 되어 무게로는 몇배 이상 된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다가온 위압감으로는 <계간 만화>만한 것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옆으로 둘이 나란히 앉아 지하철에서 이 한권의 책을 함께 보는 흉내를 내며 그 버거움을 개그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그 공포의 판형을 바꾸지 않은 채 <계간 만화>가 제2호를 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첫호를 볼 때만큼의 거북함이 없다. 그동안 내성이라도 생긴 걸까? 페이지 수라도 좀 줄었나?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그것보다는 이제야 그 판형에 걸맞은 잡지적인 짜임새를 갖추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쟁과 이미지’라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창작과 비평의 스펙트럼을 오밀조밀 담아놓았다.
이희재의 <허리>에서부터 로버트 크럼의 <아메리카>를 지나 김형배의 <성 聲>에 이르는 ‘새 만화’가 창작의 중심이다. 대가와 신진, 한국과 서구를 아우르는 작가들은 ‘전쟁’이라는 뼈아픈 주제를 제각각의 스타일과 이야기로 풀어낸다. 아버지의 아픈 허리라는 명료한 은유로 분단의 현실을 담은 이희재나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언어로 현대 미국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토로한 크리스 웨어의 작품은 두 대가의 대조적이고도 명료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박현미의 <그림자 놀이>는 뱀과 개의 싸움이라는 그림자 놀이에서 핵폭발이라는 파국의 상황에까지 이르는 점층의 과정을 무언의 표현으로 보여주고, 이우일의 <삐라>는 발칙한 욕설과 키치적인 색 범벅으로 후세인과 부시, 노무현과 김정일을 자근자근 씹어버린다. 극도로 단순한 캐릭터와 현실적인 대사로 이루어진 마이크 하트주스의 <이라크 전쟁>과 암울한 재색과 탁한 적색으로 전쟁과 평화의 이미지를 용광로처럼 녹여낸 박건용의 <하늘과 땅>은 하나의 주제를 표현하는 극단의 대조를 보여준다. 여러 작품들이 지나친 은유의 남발이라는 자기 만족의 세계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불만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실험적인 표현의 형식적 완성도에서는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는 작품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조혜승의 <판도라의 편지>가 그 양면을 함께 보여준다.
만화의 경계를 넘어서다
<계간 만화>는 만화를 중심으로 시각 예술의 여러 창조적 가능성을 하나로 안으려는 ‘의욕 가득한’ 시도를 하고 있다. ‘새 상상’과 ‘새 만화’라는 창작의 두축이 그 영역을 나누어 가지고 있지만, 사실 두 분야가 명료하게 나누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이애림의 <무제>가 만화쪽에 실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정현의 <죽음>이 상상쪽에 담긴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과 만화의 교류는 만화 창작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많은 ‘재능있는’ 작가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그 바깥으로 향한 재능이 만화의 본질 자체를 해체해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냥 해체해버리고 말기엔 우리 만화의 몸통이 너무나 왜소해져 있으며, 이 책을 사서 보는 많은 독자들은 ‘색다르지만 분명히 만화인’ 즐거움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남의 <네모를 찾아서>와 같은 ‘비평’의 축이 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웹사이트, 신문, 단행본, PDA 등 서로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의미를 내보이는 만화의 큰 칸(페이지)과 작은 칸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라. 훌륭한 만화는 선의 혁명, 네모의 혁명, 이야기의 혁명이다. <계간 만화>의 거대한 몸집 역시 충격 이상의 어떤 혁명이 되길 바란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