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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3>에서 약물에 관한 한 장면. 동료 구출 작전에 뛰어든 톰 크루즈가 고문으로 인사불성이 된 여자요원에게 아드레날린 주사를 놓는다. 그러자 이 약물은 순식간에 그녀를 여전사로 돌변시켜 가공할 파워를 뿜어내게 만든다. 이 육체의 복원 효과는 현란한 액션만큼 인상적이지만 실제 체험은 그닥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와 <섬>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는 육체의 환락이 아니라 정신의 해방이란 가능성을 놓고 약물의 세계에 용감하게 파고들었다. 1953년, 사이키델릭이란 용어를 만든 정신과 의사 험프리 오스몬드의 관리 아래 메스칼린을 복용하고 체험한 환각이 시작이었다. 메스칼린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종교 의식에서 사용했던 페요테 선인장의 활성 원소다(당시 이것과 동일한 효과를 내는 약물로 리세르그산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화학적으로 아드레날린에 매우 가까운 것이었다).
헉슬리는 메스칼린을 체험하기 전에 쓴 <멋진 신세계>에선
약물로 꿈꾸는 ‘해탈’ 혁명, <모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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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앨범 <Please>(1986) 이후로 죽 앨범 타이틀을 한 단어로만 지어온 펫 숍 보이스(이하 PSB)의 신보 제목은 <Fundamental>이다. 새삼스레 뜻을 들춰보면 이렇다(1번 뜻만 보겠다). 기본적인, 근원의, 최초의; 타고난, 본래의 성질[성격]에 속하는(<동아프라임 사전> 참조). fundamental은 원색, 기본형, 기본적 인권, 원리, 원칙, 기초음 따위의 말을 설명할 때 쓰는 단어다. 다소 강제적인 느낌을 주는 이 제목은 그러니까 이번 앨범을 통해 PSB의 음악의 근간이 무엇이냐를 보여주겠다는 뜻 같기도 하다.
최소한의 리듬구와 쉽게 따라 부르도록 쓰여진 멜로디, 닐 테넌트의 영하 4도C의 목소리와 예의 막막한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멜랑콜리함, 변함없이 복고적인 댄스 필(feel)과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우아한 믹스. <Fundamental>은 지금껏 우리가 PSB를 통해 충족해왔던 모든 것들을 빠짐없이, 그리고
펫 숍 보이스에 관한 순도 100%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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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서울시장의 ‘황제 테니스’ 논란, 김덕룡·박성범 의원의 공천 헌금 의혹, 최연희·박계동 의원의 성추행 사건에도 아랑곳없이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상종가를 쳤다. 야당 ‘승리’의 주원인인 집권당의 문제, 즉 “부패보다 무능이 더 싫다”는 일부 여론은 소비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대중의 위태로운(그러나 어쩌면 절박한) 욕망을 보여준다. 민중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보다 자신이 동일시하고 싶은 ‘명품 정당’(한나라당의 표현)에 투표했다. 계급, 지역, 성별 등에 따른 개인들간의 빈부 격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하나가 될 때, 결국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겠는가. 역대 정권 중,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공동 운명체라는 근대 국민국가 특유의 본질을 가장 잘 활용한 체제는 박정희 시대였다.
어떤 면에서 나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발전한 한국 여성운동의 최고 수혜자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성운동뿐 아니라 대개 사회운동의 열매는 투쟁한 당사자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박근혜 대표와 성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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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빗금이 잔뜩 그려진 얼굴로 집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사정은 대충 이랬다. 도서관이 갑갑하다고 숙제도 공부도 커피숍에서 하는 내 동생은 학교 앞에 단골 커피숍을 두고 있다. 실제 사장은 존재만 있고, 실질적인 운영은 매니저 A가 하는 작은 가게다. 참새 방앗간 드나들듯 하던 동생은 아르바이트 B와 꽤 친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A와 B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게 됐다. A와 B는 단골들을 붙잡고 은근히 서로의 흉을 보는 모양이었다. 거기까지는 좋다 치자. 둘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자 A는 B를 내보내고 싶어진 모양이다. 그리하여 몇몇 사건이 터졌다. 다 말하기엔 기나, 요약하자면 A가 없는 말을 지어내서 사장과 B를 이간질했다는 것이다. 사장에게는 B가 하지도 않은 짓을 지어내 말하고, B에게는 사장이 말하지도 않은 것을 지어내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 사실은 B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동생과 그 친구들에게 전한 것이다. B는, 매니저 A가 단골손님들과
[오픈칼럼] 건강한 뒷담화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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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돈>을 보고 나니, <포세이돈 어드벤쳐>와 <타워링>이 그리워졌다. <포세이돈>이 최악은 아니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인터넷에 오른 악평으로 단련을 하고 갔기에, 충분히 액션만 즐길 수 있었다. 기대를 낮추면, 대부분의 영화가 즐겁다. 거대한 해일에 호화 유람선이 뒤집어지는 과정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멋졌다. 뭐, 그것뿐이다. 지금은 별다른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다. <포세이돈>을 떠올리려고 하면, <포세이돈 어드벤쳐>의 장면들이 기억난다.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타고 사람들이 올라가고, 물이 들어오자 뒤늦게 저마다 오르려고 하다가 트리가 넘어가버리는 장면, 진 해크먼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공중에 매달려 핸들을 돌리는 장면 등등.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포세이돈 어드벤쳐>와 <타워링>의 장면들도 그렇다. <포세
[B딱하게 보기] 재난영화에 리셋은 없다, <포세이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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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현상은 ‘힌트’로 시작된다. 뱃살이 늘어진다는 것은 이제 곧 볼살이 찔 것이라는 힌트이고, 첫 문장이 안 풀린다는 것은 그 글을 쓰는 내내 개고생을 할 것이라는 힌트가 된다. 물론 좋은 결과를 암시하는 힌트들도 있지만, ‘결국 넌 망하게 되어 있어~’라고 ‘망할송’을 부르며 우리를 괴롭히는 나쁜 힌트들도 있다. 그리고 늘 머릿속의 암흑파와 싸우고 있는 내게 세상 힌트의 대략 87%는 나쁜 힌트로 보인다. 나는 그걸 ‘스포일러’라고 부른다.
많은 이들이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의 스포일러에 버럭 화를 낸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은 인생의 스포일러를 듣고도 샤방샤방한 미소를 날리며 말한다. 그딴 거 안 믿어. 그런 광경을 목격할 수 있는 대표적인 동네가 점집이다. 난 한 사주 카페에서 좌절을 담뿍 안겨주는 많은 스포일러들과 접선했었다.
-의대에 가면 성공하겠군. (죄송합니다, 이미 사회학과를 나와버려서.)
-서른넷쯤 결혼하겠구먼. 아냐, 서
[이창] 스포일러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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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싸우지 않고 적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병법의 최고라 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 재즈 뮤지션 중 최고수는 누가 뭐래도 차인표일 것이다. 그는, 데뷔작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의 색소폰 연주에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허리만 한 차례 젖혀주는 존 케이지적 아방가르드 미학을 선보임으로써 국내에 ‘재즈’라는 단어를 알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그것은 불지 않고도 관객을 쓰러뜨리는 최고의 경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연주 스턴트’ 기법은 극미량의 노력으로 극대량의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지금까지 장르와 매체를 가리지 않고 두루 애용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개봉된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피아노 치는 장면이 시종일관 주야장천 등장함에도 ‘연주 스턴트’ 기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연주 영화사에 일획을 긋는다. 하지만 당 영화는, 그렇게 높은 기술적인 완성도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투덜군, 천재에만 주목하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 탄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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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마지막 상영작은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었다. <아들의 방> <피아니스트> <멀홀랜드 드라이브>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등이 상을 나눠가진 그해 영화제에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거장에 대한 예우 차원의 초청처럼 보였다. <나라야마 부시코>와 <우나기>로 두번씩이나 황금종려상을 받은 노장이 유작이 될지 모르는 작품을 내놓았으니 초청작 명단에 포함시키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따라서 영화를 보는 입장도 아주 편안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였으면 했는데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정말 그랬다. 칸영화제처럼 낯선 작가영화가 우루루 쏟아지는 곳에서 부담없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영화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뻔뻔하게 야한 할아버지, 좋아 좋아.”
그해 칸영화제에 이마무라
[편집장이 독자에게] 나라야마에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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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3부작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홈무비일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세편의 홈무비가 콜레오네 패밀리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코폴라 가족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예술인 집안’ 출신답게 감독인 프랜시스 코폴라뿐만 아니라 여동생, 딸, 아들, 아버지 등이 총출동, 카메라 안팎에서 3대에 걸친 마피아 패밀리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동참했던 것이다. 3편에 출연했던 배우 조 만테냐가 메이킹 필름에 담은 인터뷰는 코폴라 가족과 콜레오네 패밀리의 역사가 끈끈한 인연으로 얽혀 있음을 말한다. 그는 마이클 콜레오네가 훈장을 받은 성당이, 1편에서 코니의 딸(3편의 소피아 코폴라)이 세례를 받았던 바로 그 장소라는 코폴라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코폴라가 촬영 전 배우와 스탭들을 데리고 만찬을 여는 등 친밀한 관계를 조성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촬영장을 가족 모임과 같은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대부>와 같은 영화를 위해 이 이상의 멋진 팀워크는 없을 것이다.
[서플먼트] <대부 DVD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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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가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행자>가 7분 긴 버전으로 재개봉되자 평론가들은 과거에 영화를 과소평가했다는 것과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의 의미가 깊어졌음을 인정해야 했다. 안토니오니의 많은 영화는 방황하는 서구인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여자 때문이건 아니면 진실 때문이건 그들은 내내 길을 걷다 종래에는 시작지점에 서서 빈손을 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자브리스키 포인트>와 <여행자>에 이르러 그 주제는 서구 문명의 퇴락으로까지 확대된다. <여행자>의 주인공 로크(잭 니콜슨)는 게릴라에 대한 취재를 나갔다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길을 잃는다(<여행자>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반대편에서 로렌스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호텔로 돌아와 이웃 방 남자가 죽은 걸 발견한 로크는 그의 이름 로벗슨으로 살기를 택한다. 반정부 해방집단에 무기를 제공하는 존재로 현실에 다시 개입한 그는 또 다른 여행자 ‘소녀’(마리
[해외 타이틀] 숨막히게 신비한 롱테이크!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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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도시 에디슨시를 지배하는 특수비밀경찰 조직 F.R.A.T의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신참 기자 폴락의 활약을 그린 액션스릴러. 모건 프리먼, 케빈 스페이시, 저스틴 팀버레이크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DVD 타이틀에 수록된 스페셜 피처는 이번 영화로 배우 신고식을 치른 저스틴 팀버레이크와의 인터뷰, 액션 하이라이트 모음, 뮤직비디오, 촬영현장보다 제작진들의 인터뷰 중심으로 영화제작 과정을 소개하는 메이킹 필름을 제공한다.
팀버레이크의 배우 신고식, <에디슨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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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과는 다른 차별성을 위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는 <언더월드2: 에볼루션>. 영화의 가치는 단연 케이트 베킨세일의 섹시한 매력과 하이브리드 액션 호러가 선사하는 아무 생각없는 오락성에 있다. 특히 늑대인간이 펼치는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은 정교한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으로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스펙터클한 액션을 선보인다. 일반판 DVD는 부가영상이 전무하지만, 전작과 동일하게 잡티를 찾아보기 힘든 정갈한 화질과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를 자랑한다.
잡티없는 스펙터클 액션, <언더월드2: 에볼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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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미술과 세트, 더빙을 사양한 장동건의 베이징어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무극>. 중국영화로서 드물게 대작으로 제작되었지만, DVD 타이틀에는 영화가 지니고 있는 장점들에 관한 부가영상이 거의 전무하다. 3분여의 메이킹 필름은 와이어 액션에만 집중되어 있어 볼 것이 없고, 오히려 쿤룬 역의 장동건의 인터뷰가 메인 부록으로 느껴진다. 자신이 생각하는 첸카이거 감독, 어려웠던 베이징어 연기,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다.
장동건을 보는 재미, <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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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실버타운에서 일어나는 애증의 가족사, 그리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간의 화합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린 <메종 드 히미코>. 다소 무겁고 민감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전혀 부담감이 없는 것이 장점이다. 이런 영화의 특성처럼 DVD 타이틀의 부가영상들 또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일본영화 타이틀 치곤 상당한 분량으로, 2시간47분에 이르는 만만치 않는 양이 수록이 되었다. 메이킹 필름만 1시간17분으로 우연히 신문에서 게이 양로원의 기사를 보고 제작에 착수, 영화가 완성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마사키를 연기한 야나기사와 신이치와 야마자키 역의 아오야마 기라의 인터뷰가 무척 인상적이다. 야나기사와(사진)는 59년 처음 영화에 출연한 것도 게이 역이었기 때문에, 촬영을 기다리는 내내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신선한 기분을 느꼈다고 얘기한다. 실제 게이이기도 한 아오야마는 자신이 맡은 배역에서 직업 관계로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 게이들의 아픔을
놓치면 아까운 2시간47분의 부가영상, <메종 드 히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