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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새터민에게 들은 말. “나도 그 체제가 싫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했다. 하지만 김정일이 일거에 무너지면 미국은 물론이고 여우 같은 일본과 곰 같은 중국이 득달같이 뜯어먹으려들 텐데, 그럼 토끼 같은 남한도 다 같이 잡아먹힌다.” 논란이 따를 비유이나 그의 표정은 절박했다. 제 앞가림도 어려운 처지에서 한반도의 앞날을 끊임없이 걱정했다. 북한 사람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당수는 민족의 생존과 체제 유지(혹은 점진적 변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한 날 인터넷에 들어가 방사능 유출이 없었다는 뉴스만 확인하곤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을 고르는 데 한참을 보낸 나는, 분단의 시간은 남북 사람들의 뇌구조까지 다르게 진화시킬 만큼 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사재기 열풍이 없었던 건 ‘양치기 정일’에게 너무 자주 놀랐고 민족공조 의식도 성숙해진 덕이겠지만, 분단불감증도 그만큼 심해졌다.
핵실험이 사실로 굳어진 뒤에도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슈] ‘벼랑 밑 전술’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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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의 머릿속에 퇴적된 사랑의 추억을, 지층을 감식하는 지질학자의 눈길로 검토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미셸 공드리 감독에게 인간의 머릿속은 골짜기와 폭포, 사막과 숲으로 이루어진 땅과 같아서 답사를 요한다. 기억에 이어 공드리가 발을 들인 오지는 인간의 꿈. 행여나 제목으로부터 잠의 원리나 불면증 퇴치법을 보여주는 영화를 기대하면 오산이다. 단짝 작가 찰리 카우프만(<휴먼 네이쳐> <이터널 선샤인>)에게서 독립해 미셸 공드리가 혼자 힘으로 시나리오를 쓴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증세를 가진 남자의 동화다. 또한, 염세적이고 철없는 남자의 연애 방식을 자학적으로 드러내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소심한 멕시코 아티스트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꿈속에서는 <TV 스테판>이라는 화려한 쇼의 활달한 진행자로 변신한다. 어려서부터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 속에 살아온 스테판은 심기일전해 파리로 날아
꿈과 현실을 이어붙인 뫼비우스의 띠, <수면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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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 놓인 커다란 돌덩이가 대뜸 눈에 들어온다. ‘마파도 촬영지 동백마을.’ 굽이굽이 꺾인 흙길이며, 저 멀리 서해바다, 들어가서 살 수 있도록 지어진 할매들의 집이며, 그 밑으로 보이는 배추밭까지,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지난 10월17일. 전남 영광 동백마을에 마련된 오픈세트, 회장댁 앞마당에 둘러앉은 다섯 할매와 두 남정네까지 마주하니, 2년 반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아니, 좀 달라지긴 했다. 다 함께 김치를 담그다가 술자리로 이어지는 장면을 촬영 중인 여수댁(김을동), 마산댁(김형자) 등은 갓 삶은 돼지고기로 푸짐한 보쌈을 만들어 모든 스탭들의 입에 넣어주기 바쁘다. 군복무 중인 이정진 대신 ‘삼순이 전 남친’ 이규한이, 욕쟁이 할매 진안댁(김수미)이 특별출연하는 대신 그 사촌언니 영광댁(김지영)이 합류한 것을 제외하면 모든 멤버가 다시 모인 자리는 전편의 시끌벅적함을 다섯 단계쯤 업그레이드한 느낌이다.
이들이 재회한 사연은 이렇다. 재벌회장의 첫사랑 꽃님이를
오지게 빡센 폭소 한 마당, <마파도2: 동백아가씨> 촬영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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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중순은 곧 부산국제영화제다. 필자는 다시 해운대의 같은 호텔, 거의 같은 방에 묵고 있으며, 엘리베이터도 변함없이 느리다. 그런데 무언가가 변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성장한 것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참가 베테랑 동료 중 한 사람이 와서 눈썹을 치켜올리며 “부산은 더이상 우리만의 비밀이 아닌 거 알지?”라며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 같은 열혈 집단이 남포동 식당에 몰려 앉아 있거나 코모도호텔의 바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새로운 한국영화의 발견에 대한 소식을 서구로 다시 가져가던 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남한영화의 국제적 위상은 이제 영원히 바뀌었으며 부산국제영화제도 그렇다.
그러나 부산영화제가 십대에 들어서는 성숙함과 더불어 새로운 책임들이 생겨난다. 그중 언론에 대한 대우가 적지 않은 책임이다. 부산영화제는 여러 전선에서 서구영화제 아이디어들을 모방하고 재빠르게 부산의 구조에 그것들을 흡수시켰다. 예를 들어 PPP, 파빌롱, 탤런트 캠퍼스, 그리고 이제 마켓까지 있
[외신기자클럽] 영화를 자유롭게, 마음껏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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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트 어웨이>의 속편이 만들어지려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극적으로 구조된 멕시코 어부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조건으로 380만달러를 받게 됐다. 고진감래 백만장자 스토리의 주인공은 살바도르 오르도네스, 헤수스 비다나, 루시오 렌돈이라는 3명의 20대 멕시코 청년들이다. 지난해 10월28일 태평양 연안의 작은 멕시코 어촌 ‘산 블라스’에서 3주간의 계획으로 상어잡이에 나섰던 그들은 섬유유리로 만든 8m 길이의 소형 고기잡이배가 고장나면서 기나긴 표류를 시작했다. 세 사람이 발견된 것은 출항으로부터 무려 9개월이 지난 2006년 8월. 날생선과 바닷새를 잡아먹고 빗물과 소변으로 목을 축이며 연명해온 그들은 출항지에서 8800km나 떨어진 남태평양 마셜군도 부근에서 대만의 참치선단에 발견되어 마침내 표류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멕시코의 고향마을로 귀환한 그들은 곧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한때는 마약 운반책이라는 미디어의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
[왓츠업] <캐스트 어웨이> 속편 만들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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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도시들이 그러하듯, 몬트리올에서도 수많은 영화제가 시작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중 이름마저 새로운 누보시네마영화제는 동시대의 영화를 날카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제는 늘 조용히 시작했다가 문을 닫아 안타까운 마음이었는데 올해는 특별한 이벤트로 모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영화서적에서만 보았던 그 이름, 비 내리는 비디오 화면 혹은 영화과 수업을 도강해서야 볼 수 있다는 필름(들)의 감독을 만나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마저 실험적인, 실험영화계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 시대의 게이 아이콘인 케네스 앵거가 그를 모델로 한 다큐멘터리의 상영일자에 맞추어 콩코디아대학에서 강연을 가질 예정이라 한다. 퀘벡/캐나다 섹션에서 상영될 엘리오 젤미니 감독의 다큐멘터리 <Anger Me>를 통해 전설로 남게 된 그를 기리고 현재의 그를 만나 다시 영화를 얘기한다는 누보영화제의 취지. 다른 어떤 화려한 영화제에 초대된 스타
[몬트리올] 케네스 앵거를 만나는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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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연습게임이었다? 지난 8월 미국에서 개봉한 이래 전세계에서 1억2500만달러를 벌어들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올리버 스톤 감독과 파라마운트가 지난 10월16일, 9·11 테러 이후 미국 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다룬 <조브레이커>(Jawbreaker: 발음하기 힘든 말 혹은 턱이 깨질 정도로 딱딱한 사탕이라는 의미)를 준비 중임을 발표했다. 영화의 원작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CIA와 특수부대 사이를 조율한 게리 번스타인의 최근 회고록으로 당시 아프가니스탄 동부 토라보라 지역을 공격했던 미국 정부의 과오를 파헤쳤다. 번스타인은 책에서 군대가 800명 이상의 충원 요청을 받아들였다면 빈 라덴을 생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정세를 뒤바꿔놓은 2001년 9월11의 참사를 순진무구한 영웅담으로 완성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베트남전이나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정치적인 배경과 음모를
올리버 스톤, 논쟁보다 드라마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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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검열·관리하려는 중국 정부의 눈매가 매섭다. 이번 가위질의 희생자는 마이클 만 감독의 <마이애미 바이스>. 다혈질 형사 소니와 마약조직 보스의 여자 이사벨라의 강렬한 애정 행각이 담긴 20분가량이 잘릴 위기에 처했다. 소니 역의 미국 배우 콜린 파렐과 몸을 섞는 이사벨라 역의 공리가 중국 태생이라는 점이 정부 당국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해석이다. 세계 각지에서 7월27일부터 10월 사이 관객을 찾은 <마이애미 바이스>의 중국 내 개봉은 자국영화 활성화를 위해 마련된 외화상영 금지기간으로 인해 11월1일로 미뤄졌다. 제작사인 유니버설픽처스는 8월 말 개봉을 지레짐작한 반면 현지 언론들은 입을 모아 장이모 감독의 뮤즈였던 공리의 섹스신에 대한 염려의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공리의 불운은 처음이 아니다. 공리가 질투어린 게이샤 하츠마마를 연기한 <게이샤의 추억>은 아예 중국 내 개봉을 금지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극중 게이샤들이 종군위안부를
공리와 콜린 파렐의 섹스신, 문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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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0일/ 10월2일 오후 4시 웨이브랩 스튜디오
본믹싱을 앞두고 그 준비단계라 할 프리믹싱을 하는 날이다. 스튜디오 문을 열자마자 비명소리가 가득하다. 스크립터, 홍보팀 등을 동원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터져나오는 행인들의 비명소리를 녹음하는 중이다. 마침내, 모니터에는 미니어처 촬영과 CG가 결합된 붕괴장면이 흘러나오고 있다. 붕괴, 아수라장이 된 현장, 매몰 지역에 가득한 구조요원 등이 스쳐지나간다. 스크린으로 봐야 분명해지겠지만, 저 정도라면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닌 듯싶다. 조영욱 음악감독이 보인다. “오늘 믹싱 못하는데 오셨네요. (바이올린 켜는 흉내를 내면서) 연주 녹음 중이거든요.” 음악에 대한 구상과 작곡 프로듀싱을 거쳐 연주를 녹음하는 단계에 이르러서인지 홀가분해 보인다. 다만 계약이 늦어지면서 예고편과 홈페이지에 들어갈 음악을 못한 것이 아쉽다는 표정이다. 6월에 <비열한 거리>를 끝내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음악을 대체로 마무리지은
[이성욱의 현장기행] <가을로> 후반작업 현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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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1일/ 9월1일 오후 5시 인사이트 비주얼 회의실
CG 1차 컨펌하는 날이다. 개봉이 10월26일로 확정됐다. 그러나 여전히 정해지지 않은 게 있다. 음악감독. 의아스러운 상황이다. 편집이 끝났는데 음악감독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니. <혈의 누> 때 김대승 감독을 감탄시켰던 조영욱 감독과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어떤 음악이 좋을지 의견 조율을 해온 모양인데, 제작자가 최종 승인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역시 제작비가 문제다.
김대승 감독이 CG팀에 대한 격려품을 들고 들어오자 곧바로 회의가 시작된다. 강종익 대표의 인사이트 비주얼과는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 시절인 <축제> 때부터 줄곧 손발을 맞춰왔던 터라 상당히 익숙한 분위기로 본론에 빠져든다. 김상범 편집기사가 주문했던 민주의 사진 찍는 장면을 놓고 제법 긴 시간이 흘러간다. CG팀이 안을 만들어오기로 정리됐다. 김대승 감독의 디테일 챙기기는 편집실에서 이미 봤지만 CG팀이 효과를 입힌 장면들의 수정보
[이성욱의 현장기행] <가을로> 후반작업 현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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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깃: 김대승 감독의 세 번째 영화 <가을로>
취재기간: 8월22일~10월5일
현장: 김상범 편집실, 인사이트 비주얼, 웨이브랩 스튜디오
취재 중에 만난 사람: 김대승 감독, 김상범 편집기사, 강종익 인사이트 비주얼 대표, 이태규 녹음기사, 조영욱 음악감독, 배우 김지수·엄지원·유지태 등
프롤로그
<번지점프를 하다>를 데뷔작으로 내놓은 김대승 감독과 처음 인터뷰를 했을 때다. 임권택 감독의 오랜 조감독 시절을 회상하며 임 감독에게 자기 작품이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무척 조심스러워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혈의 누>를 거쳐 세 번째 작품 <가을로>의 후반작업을 시작한 김대승 감독을 만나면서 다시 한번 “임권택 감독은…”으로 시작되는 말을 자주 듣게 됐다. 이번에 기억나는 건 두 가지다. 첫 번째. “<태백산맥> 때 임 감독님이 안성기 선배한테 나라를 잃은 자의 슬픔이기도 하고, 그게 또 우습기도 하고 하며 연기
[이성욱의 현장기행] <가을로> 후반작업 현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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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0월27일부터 11월2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인디다큐페스티발 2006이 열린다. 지금,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반드시 고민해야 할 몇 가지 화두, 그러나 그 어디서고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한-미 FTA 4차 협상일로부터 4일 뒤 시작하는 올해 영화제는 NO FTA 특별전을 마련하여 <146-73=스크린쿼터+한미FTA>(이훈규)를 포함한 국내외 10편의 다큐멘터리를 소개한다. 개막 전날인 10월26일 오후 7시에는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NO FTA 문화행동’ 행사도 열린다. 이번 행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지역상영운동 활동가와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직접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오픈 마켓 행사. <월마트: 싼 가격을 위한 비싼 댓가>를 포함한 두편의 해외장편 상영과 독립다큐멘터리의 국내외 배급사례를 통해 배급전략을 논의하는 세미나가 진행된다. 한해 동안 만들어진 화제의 다큐를 소개하는 국내신작전이
다큐의, 다큐를 위한, 다큐에 의한 영화 축제, 인디다큐페스티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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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타짜> 타짜들의 신기술
[정훈이 만화] <타짜> 타짜들의 신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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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은 해적이 아니었다. 관습적인 삶을 추구하는 대신 영혼의 자유를 꿈꾸긴 하지만 그는 화가였다. 그리고 그는 가난했다. 약혼자 알리스와 살고 있는 이삭은 살아가기 위해 간판을 그려 먹을 것을 사고, 자신보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동료 화가를 돕기 위해 그의 그림을 사주기도 한다. 선량하고 쾌활한 이삭이지만, 궁핍한 생활과 창작의 고통은 그와 알리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생계를 위해 그림을 들고 나가 팔려던 이삭은 상상으로 그린 인물이 실존 인물과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 배는 안 타봤지만 바다라면 그림이며 옛 문서까지 뭐든 좋아하는 이삭은 그림을 사준 남자가 소개해준 선장의 배를 타게 된다. 며칠 만에 돌아올 수 있을 뿐 아니라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에 혹해 배를 탄 이삭은 배가 향하는 곳이 아메리카이며 쉽게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8세기 파리 뒷골목을 무대로 시작한 <해적 이삭>은 이삭의 행로를 따라 거친 바다로 향한다. 동시에 파리에 홀로 남은 알
해적이 된 전직 화가의 기이한 바다 모험, <해적 이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