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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와인 중에서 그래픽적으로 예쁜 걸로 골라주세요.” 이철하 감독(<사랑따윈 필요없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탭이 진열장에 꽂힌 기백개의 와인 중 하나를 골라낸다. 영화 <스토리 오브 와인>의 마지막 촬영이 한창인 이곳은 오전 9시 강남역 근처의 와인바 ‘스토리 오브 와인’이다. 아침부터 와인 냄새를 맡으니 기분이 알딸딸하다. 스탭들도 기분좋게 취해 있는 듯하다. “하루에 20시간씩 찍느라 다들 잠이 모자라서 그래요.” 김효정 PD의 말이다.
이기우가 연기하는 민성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와인업계에 뛰어든 소믈리에다. “소심한 녀석이에요. 하지만 와인 일을 하면서 자기만의 철학과 소신을 갖게 되는 녀석이죠.” 민성은 소믈리에 일을 하다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말이 통하지 않는 용병 야구선수와 와인으로 우정을 나누고, 손님으로 온 남녀를 커플로 만들어준다. 재미있는 건 관객이 초보적이나마 민성의 이야기에 직접 뛰어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스토리
소심한 소믈리에의 세상과 소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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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들의 촛불집회가 삼성동 메가박스를 습격했다. 7월3일 오후 8시30분, 영화 <패스트푸드 네이션>의 시사회가 끝난 메가박스 코엑스의 극장 앞에는 촛불을 든 영화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목적지인 아셈광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펼쳐든 건 <패스트푸드 네이션>의 포스터를 패러디한 커다란 현수막. 제목은 똑같은데 주연배우가 써 있어야 할 자리에는 커다란 글씨로 ‘미국 쇠고기’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마이크를 든 영화감독조합의 공동대표 정윤철 감독은 단체관람 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하냐의 문제를 떠나 사람들을 통제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영화의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사상과 입장에 관계없이 그저 안전하게 먹을 권리를 찾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는 말로 영화인들의 입장을 대신했다. 자리를 함께한 20여명의 영화감독과 스탭, 영화과 학생들은 정 감독의 선언문 낭독이 끝난 뒤 “미국의 소를 비롯한 전세계의 불쌍한 소들을 위
극장 앞에도 촛불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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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짓이 꼴통이면서 ‘꼴통‘이란 말에 발끈해서 차도 던지고 사람도 던지는 술 주정꾼 수퍼히어로 <핸콕>이 7월 첫째주 북미 박스오피스를 제패했다. <핸콕>은 7월2일 밤 개봉해, 금요일 부터 이어진 독립기념일 휴일 극장가를 사로잡았다. <핸콕>의 주말 3일간 개봉성적은 6600만달러, 화요일 밤 부터 집계한 5일 간 누적성적은 1억732만달러다. <핸콕>은 윌 스미스가 출연한 영화로는 8번째로 연속 1위 개봉한 영화이고, 7월4일 개봉한 영화 중에서는 3번째로 높은 성적을 올렸다. 현재까지 <핸콕>을 앞지르는 ‘7월4일‘의 금메달과 은메달은 지난해 개봉한 <트랜스포머>(주말3일: 7050만달러/ 누적 5일: 1억5540만달러)와 2004년 개봉한 <스파이더맨 2>(8810만달러/1억5230만달러)다. <LA타임즈>는 특정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매년 같은 날짜에 개봉하는 날짜 마케팅에 대한 주장을
<핸콕> 극장가 수퍼히어로 되다, 개봉 첫주 1억달러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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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즈다이어리] <핸콕>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
[헌즈다이어리] <핸콕>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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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앨범 ≪Prestige≫가 실패한 건 비극이다. 속상하지만 한번 더 돌아보자. 사람들은 <Cum2me>라는 싱글의 제목과 의상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난리를 쳤다. 순결한 척 뒤로 호박씨 까는 한국 네티즌의 졸렬함이 짜증스런 방식으로 표출된 거다. ‘아줌마가 뭐하는 짓이냐’는 댓글에는 하나하나 댓댓글을 달아주고 싶었다. “너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엄정화처럼 멋지게 나이먹을 수 있을 거 같아?”라고. 이젠 상관없다. 영리한 엄정화는 9집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내주는 새 앨범 ≪D.I.S.C.O≫를 들고 복귀했다. 앨범을 프로듀싱한 건 지금 한국에서 가장 품질 좋은 공장생산품을 만드는 YG엔테테인먼트다. 빅뱅도 곡을 쓰고 피처링을 했다. 첫 번째 싱글 <D.I.S.C.O>는 대프트 펑크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댄스곡이고 G드래곤이 만든 <Party>는 지금 트렌드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는 곡이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노래들이지만 작곡과 믹싱의 수준이 비범할 정
위풍당당한 언니의 끝내주는 재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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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우리가 들어본 적 없는 음악. 시규어 로스의 음악을 규정하는 말로서 저것보다 빨리 와닿을 문장은 없다. 한때 슈게이징이라는 편협한 용어로도 설명됐던 시규어 로스의 음악은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장르의 카테고리 어디에도 속할 수가 없다. 그들은 클래식 오케스트레이션의 권위도 복종시킬 수 있는 록이고, 역사상 가장 상상력이 뛰어난 팝이며, 속세에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가르치기 위해 내려진 성가(聖歌)다. 마치 고고학자처럼, 시규어 로스는 예술로서의 음악의 원류를 찾으려는 과제를 실천 중인 것도 같다. 언제나 모국어인 아이슬란드어로 앨범 이름을 짓고 가사를 쓰고 부르는 그들이 이해될 법하다.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 궁금치 않은 건 아니지만, 시규어 로스는 바벨탑 이전의 시대를 상상하며 노래하는 음악가들 같아서 굳이 언어를 매개로 소통하지 않아도 풍요롭다. 종교의 이름없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영적인 음악. 이번에 발매된 다섯 번째 정규앨범은 예외적으로 <All Alright
세상에서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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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미국 시카고, 14살 소년이 유괴돼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잘려나간 손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끔 훼손된 얼굴. 현장에서 발견된 안경을 추적해 검거한 범인은 네이슨 레오폴드와 리차드 로브, 니체의 초인론에 심취된 19살 법대 졸업생들이었다. 미국사회를 경악게 한 끔찍한 살인사건을 토대로 만든 스티븐 돌기노프 원작의 뮤지컬 <쓰릴 미>는 자극적인 소재를 잔뜩 장착한 문제작이다. 명석한 두 소년을 모델로 한 인물, ‘나’와 ‘그’는 육체관계에도 거리낌이 없는 동성 연인으로 묘사되고, 멍청한 사회와 범인(凡人)을 조롱하는 대사는 신랄하게 공기를 가르며, 방화와 강도에서 유괴와 살인에 이르는 반복적인 범죄행위는 때론 최음제처럼 흥분되고 예술과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나’의 고백으로 시작해 ‘나’의 고백으로 끝맺는 이 뮤지컬이 마침내 마주하는 것은 살인행각이 선사하는 일회성의 쾌락이 아니라 영혼까지 내던질 만큼 강렬한 사랑이다. 애증을 오가는 두 인물
천재 소년들, 유괴와 살인, 그리고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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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소개에 앞서, 전시 관람 방법에 대한 숙지가 필요하다. 하루 8인,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하는 공간에서 1인당 1시간으로 관람을 제한한 이 전시는 사전 예약을 통해서만 관람할 수 있다. 총 23일간 진행되는 전시가 맞아들이게 되는 최대한의 관객은 184명뿐이다. 까다로운 관람법을 제시한 작가는 Sasa[44]. 본명 대신 인터넷 아이디를 쓰는 작가는 이 세상에 더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그가 집요한 수집가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의 수많은 대중문화 자료들은 그의 ‘아카이브적 충동’으로 인해 수집되고, 전시 주제에 걸맞게 선택되고 재배치된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1992년 전후’다. 만화, 가요 등 각종 대중문화 요소들을 차용해왔던 그의 작업이 이번에는 낭만, 비애, 눈물 등 대중적인 언어로 1992년을 바라본다. 그에게 이 시점은 소비사회로의 전환점이자, 한국사회의 변화된 지형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시기다.
대중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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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이라는 이름에서 사람들이 떠올릴 만한 작품은 오로지 <솔라리스>뿐이다. 하지만 종종 형이상학적으로 철학적인 원작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질려 스타니스와프 렘의 작품들을 멀리하는 건 실수다. 렘은 우주적인 철학가인 동시에 맛깔스러운 문학가였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되는 <사이버리아드>(사이버시대의 ‘일리아드’라는 의미다)를 예로 들어보자. 이 책은 창조자 로봇인 트루를과 클라포시우스가 우주를 떠돌아다니며 벌이는 열다섯 가지 모험을 실은 블랙코미디 단편 모음집이다. 신처럼 전능한 두 마리 로봇이 이런저런 은하계의 괴상한 장소와 인물들을 섭렵하며 따먹는 농담들을 보노라면 키득거림을 멈출 수가 없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좋아했던 팬들이 무작정 좋아할 만한 유머는 아니지만 SF와 슬랩스틱의 지적인 결합을 <사이버리아드>만큼 잘해낸 작품은 거의 없다. 과학소설 전문 출판사라는 이름으로 시장
SF와 슬랩스틱 코미디의 지적인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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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면증 환자에 카페인 중독증 환자다. 온갖 불면증 치료법과 수면제가 무력하다는 것을 지겹도록 체험한 빌 헤이스는 잠 못 이루던 밤을 이용해 수면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잠의 실마리를 찾아 부나방처럼 날아다니던 그의 노력은 <불면증과의 동침>을 통해 훌륭한 과학 교양서이자 흥미진진한 에세이로 탄생했다. 헤이스는 현대 수면과학의 창시자였던 너새니얼 클레이트먼, 렘수면의 발견자인 유진 아제린스키, 잠자리와 집안일의 개혁을 통해 여성 해방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메리 스톱스, 몽유병과 잠꼬대의 비밀에 맞선 에드워드 빈스 등 수면의 비밀을 밝히고자 고투했던 수많은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이며 생생한 에피소드를 통해 제시한다. 동시에 그는 다소 딱딱한 과학적 명제들을 놀랍도록 절묘한 바느질 솜씨로 자신의 삶에 꿰매어 넣는다. 몽유병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의 경험부터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감춰야 했던 아슬아슬한 기억까지, <불면증과의 동침>은 잘 정리된 교양 상식
불면의 고통으로 얻은 불면의 해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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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으로 <철콘 근크리트>를 만났다면 꼭 만화 원작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을 정도로 만화가 마쓰모토 다이요의 세계는 매혹적이다.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독창적인 그림체와 파격적인 연출, 그리고 감각적인 캐릭터 덕분에 만화제국 일본에서도 그는 거의 숭배의 대상이다. 최근 국내에 발매된 <제로>는 1991년에 집필한 그의 초기작으로 ‘대양(大洋: 다이요)의 전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의미있는 작품이다. 만화는 너무나 거대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나머지 그 재능을 산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복서 고시마의 처절한 숙명을 담고 있다. <철콘 근크리트> <핑퐁> <하나오> 등 그의 후속작에 등장한 캐릭터들이 성장통을 겪을지언정 어떻게든 타고난 재능을 개화시키는 것과는 달리 <제로>의 고시마는 그 재능에 잘근잘근 씹혀가며 ‘산화’라는 비극적인 정점을 맞이하고 만다. 작품 전반을 통해 마쓰모토 자신처럼 타고난 천
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복싱의 폭력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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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 중에 품행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세간에 손가락질당할 만한 일을 저지릅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중략) 잘라내버려라. 누군가를 잘라내지 않으면, 배제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행복이 있다.” 낳아준 부모가 목숨을 앗아간 도이자키 아카네는 가출을 핑계로 부재가 숨겨지는 문제아였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고, 마루 아래 16년 동안 묻혀 있었다. 아카네의 죽음은 부모의 자수로 드러나는데, 시효가 만료되어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잊혀진다. 미야베 미유키는 <모방범>의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의 9년 뒤를 <낙원>으로 불러들였다. 시게코는 죽은 아들이 예지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 중년 부인의 의뢰로 그 흔적을 조사하다 아카네 사건까지 손이 닿고, 사건을 조사하면서 <모방범>의 그림자와도 마주치게 된다. <낙원>은 아카네의 죽음을 조사하는 이야기와 표면적으로는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
16년간의 고통과 바꾼 찰나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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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면 영화인들의 시선은 칸으로 모인다. 그러나 6월에는 광고인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인다. 영화제가 끝나고 나면 세계 3대 광고제 중 하나인 칸광고제(Canne Lions International Advertising Festival)가 열리기 때문이다.
칸광고제는 극장광고 제작자들이 칸영화제에 자극받아 극장광고 중심으로 광고제를 시작한 것이 그 기원이다. 올해 칸영화제가 61회, 칸광고제가 55회니 6년의 차이가 있다. 지금은 필름(TV광고) 외에 인쇄, 옥외, 사이버(인터넷), 미디어(매체기획), DM(Direct Marketing), SP(Sales Promotion), 타이타늄 및 통합부문(TV광고를 비롯한 통합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평가) 등 그 영역을 확장해 분야별 그랑프리, 금사자, 은사자, 동사자상을 수여한다. 칸영화제의 심벌은 ‘종려나무’지만 칸광고제의 심벌은 ‘황금사자’다.
다른 영화제들도 많지만 칸영화제가 작품성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는 것처럼 칸광고제도
[CF 스토리] 여백있는 광고가 더 마음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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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금융그룹의 대표인 한민국(이성재)은 협의이혼 직후 여배우였던 아내 이애리(한은정)로부터 재산분할 청구소송을 당한다. 금액은 1천억. 돈방석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에게 인색했고, 때론 다른 여자들과 염문설을 뿌리고 다닌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수다. 대한민국 전대미문의 청구소송을 위해 이애리는 일류 변호사인 변혁(류수영)을 고용한다. 돈을 뺏기지 않기 위해 한민국도 유명한 변호사들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승산없는 싸움이라며 모두에게 거절당하고, 할 수 없이 사법연수원을 꼴찌로 졸업한 신참내기 변호사 우이경(이수경)과 팀을 이룬다. 알고 보니 변혁과 우이경은 한때 연인이었던 사이로 한민국과 이애리만큼 으르렁대는 사이다. 의뢰인과 변호사인 네 남녀는 사랑과 돈을 잃지 않기 위해 유쾌하고 통쾌한 법정 대결을 벌인다. <애드버킷> <변호사들>에 이어 만들어진 또 하나의 법정드라마지만 로맨틱코미디물에 가깝다. 이성재는 <천국보다 낯선> 이후 2년 만에 드라마에 출
[이주의 추천프로] 사랑과 돈을 내건 통쾌한 법정 대결